장례식 설교 요약 모음(2)


운명 전 예배 설교(돌아가실 분이 믿음이 없는 경우)

 

제목: 인생의 종말

찬송: 534, 539

성구: 49:28-30

 

인생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시유종(有始有終)한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났다가 때가 이르면 죽고마는 존재가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 지존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주심으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곧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생이 아닌 죽음이 다가옴으로 인해 인생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죽음의 의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도 존재의 사라져버림도 아닌 분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죽음이란 생명의 본체이신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범죄하면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18:4).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것이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둘째, 육체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가 영혼과 분리될 때 육체만 남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부패되고 썩어버립니다. 야고보서 2: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이것은 마지막 대심판대 앞에서 주를 밎지 않던 불신자들이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끝도 없는 세월 동안 단절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 속에서 영육이 다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2. 사후 상태

죽고 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세 가지로 그 상태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첫째, 일반적인 상태인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은 후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죽거나 자는 것이 아니라 멸하지 않는 생을 가지며 죽은 후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둘째, 신자의 상태를 보면 의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립니다(12:23, 고후 5:1,6). 셋째, 불신자의 상태인데 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짐을 받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통과 어두운 가운데서 대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서 능욕을 당하기 위해 부활하게 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좋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나쁜 세계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최후를 장식할 것인가? 이는 대단히 중요한 최종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날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부름을 받는 날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000,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십니다그러면 주님께서는 000님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000님과 가족 여러분들이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 천국의 소망이 든든한 가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례식 설교 요약 모음(1)


- 남겨진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

** 운명 전 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위로와 소망
찬송: 539, 545
성구: 살후 2:16-17

1. 이별이 주는 선물
사랑하는 애인과 이별을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일도 하기 싫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삶 자체에 대해 별 의욕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의 아픈 마음을 들어 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에 다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아픈 마음에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말도 해주지를 못했습니다. 세월이 약임을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인간의 헤어짐은 새로운 소망을 향한 출발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아픔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2.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죽음’의 문제로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불확실한 성도가 있었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들도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의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처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을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통해 당신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존귀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 당신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근심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하늘로 오르신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상담자, 위로자, 변호자를 의미합니다. 당신을 위로하시고 상담하실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께 당신의 아픔과 슬픔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당신의 생애 속에 아무런 낙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말할 때 주님은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둘째로 당신을 굳게 세워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될 때 당신을 붙잡아 주실 분,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는 당신이 실망될 때 당신을 든든히 지키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당신을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영원한 위로와 소망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감추거나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허전함이 느낍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000님에게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 넘쳐나기를 바라고, 굳게 세움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둔 가족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000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소망의 줄을 잡고 믿음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슬픔 가운데 머리 숙인 우리를 능히 굳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선한 싸움을 위해 질주할 뿐입니다.

오늘 임종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십자가 그늘 아래서 위로 받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례 및 제사 관련 용어와 종교행위, 바로 알고 행하기


49재(四十九齋)

많은 사람들이 49제라고 하지만, 49재(四十九齋)가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49재란,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원하며 거행하는 불공의식이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매 7일마다 7차례 재를 지내므로 칠칠재(七七齋)라고도 한다. 참고로, 재(齋)란, 상복 아랫단 재이다.

<구사론 俱舍論>에 의하면 한 인간의 존재 양상은 4유(有)로 구분되는데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를 생유(生有), 이로부터 임종 직전까지를 본유(本有), 임종하는 찰나를 생유(死有), 이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는 생유 이전까지를 중요(中有)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죽으면 중음(中陰)이라고도 불리는 중유의 상태로 얼마동안 있게 된다. 카톨릭의 연옥(煉獄)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중유에 대해 만일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7일을 여러 번 경과하는데, 그 최대 기간은 49일이라 한다. 즉 사람은 죽어서 7일마다 다시 생사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49일째는 반드시 출생의 조건을 얻어 다음에 올 삶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49재가 사자(死者)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정착되고 중시된 것은 이런 관렴에서 연유한다. 49재는 사자의 중유 상태 즉 중음신(中陰身)이 좋은 세계로 재생하도록 최종적으로 결정되길 기원하는 불공의식이며, 이 날에 이르기까지는 좋은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7일마다 경을 읽고 재를 올린다.

천주교의 연옥 개념이나 불교의 49재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영혼이란 죽음과 동시에 육체와 분리되어 떠나는데 살아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느냐 불신했느냐에 따라 낙원과 지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을 기다린다고 한다. 49재는 성경의 안식년 개념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지키는 49재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나 신자들은 결코 49재를 지켜서는 안 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기회가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우제(三虞祭)

삼우제란, 염려할 우, 우제우로 유교식의 전통상례의 용어로써 죽음 사람을 장사한 후 3일째 되는 날에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삼우제가 끝난 뒤에는 고인의 산소를 찾아 첫 성묘제사를 한다. 우제(虞祭)라는 말은 시체를 매장한 뒤 그의 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를 말하며, 초우제(初虞祭), 재우제(再虞祭), 삼우제(三虞祭)로 나뉜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천에 떠돌아다니거나 방황한다고 하지 않는다. 곧 바로 낙원이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한이 맺힌 영혼이 편안하게 쉬지 못하거나 귀신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따라서 신자는 영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해서 드리는 유교의 삼우제를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위령제(慰靈祭)

위령제란, 위로할 위, 영혼 령으로 죽은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말한다. 진혼제라고도 한다. 진혼이란 망혼(亡魂)을 진정시킨다는 말이다.

이 또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떠난 혼령을 위로 할 수도 없고 위로도 되지 않고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하는 무지의 행위들이다. 카톡릭에서도 위령미사가 있는데 매우 잘못된 것이다. 위로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위령제(진혼제)를 드리지도 말고 참여해서도 안 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영결식(永訣式)

영결식이란, 오랠 영, 이별할 결로 장례 때 친지가 모여 죽은 이와 영구히 헤어지는 의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고별식이라고도 한다. 주로 사회장이나 국장이나 국민장 그리고 유명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사망했을 때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사망 혹은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 즉시 생존자와 망자는 헤어진다. 그런즉 기독교 사상 관점에서 볼 때 영결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단지 의식적 절차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영결이라는 표현은 성경적 사상과 맞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신자가 사망했을 때는 영결식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장례식이라고 하면 된다.


명복(冥福)

명복이란, 저승 명, 혹은 어두울 명으로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을 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망자가 저승에서 좋은 곳에 가고 행복하기를 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현수막이나 깃발 혹은 사람들이 ‘명복을 빈다.’라고 한다. 아나운서도 그리 중계방송 한다.

그러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명복을 빈다고 해서 그리된다고 하지 않는다. 고인에게 전혀 유효하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단순히 소망하는 차원에서 그리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명복을 빌면 진짜 좋은데 간다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전혀 옳지 않다. 그런즉 신자들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신실한 신자로써 사망을 했으면 ‘하나님의 품에 갔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는 할 수 있어도 불신자가 사망했는데 위로한답시고 ‘명복을 빈다느니,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등의 비성경적인 말을 하면 안 된다. 살아있을 때 복을 빌라. 꼭 무슨 말을 해야만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니 적합하지 않은 대상일 때는 침묵이나 손을 잡음으로 위로를 해야 한다.  


분향(焚香)

분향이란, 불사를 분으로 부처 또는 죽은 이를 위하여 향을 피우는 것을 말한다. 죽은 이를 위하여 향을 피우는 장소를 ‘분향소’라고 한다.

단순히 애도 차원에서 분향을 하고 국화를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죽은 이를 위하여 분향과 국화를 헌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므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성경적이지 않다. 특히 분향을 하고 고인의 영전에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잔을 돌리고 음식을 차려놓고 고인을 위하여 제사와 예배와 미사를 드리는 행위들은 성경적이지 않다. 따라서 신자들은 비성경적인 의식과 행위들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생전에 자주 찾아뵙고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가 옳다. 신자들은 망자를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살아있는 분들을 위해서 실천해야 한다.


조문(弔問)

조문이란, 불쌍히 여길 조로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며 상주를 위문함을 말한다.

조문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자 성경적이다.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과 아는 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는 자와 함께 울며 유가족들을 위문해야 한다. 그러나 조의를 표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은 좋으나 삼가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유족들에게 불편을 주는 말이나 상처가 되는 말은 금해야 하며, 조문 시 고인의 영전에 엎드려 절하고 고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명복을 비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사후에 약방문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생전에 찾아뵙고 서로 섬기고 교제함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배(參拜)

참배란, 참여할 참과 절 배로 무덤이나 기념탑 등의 앞에서 절하고 기리는 것을 말한다.

단순하게 고인의 업적이나 뜻을 생각하며 묵념을 하는 것은 좋으나 무덤이나 영전이나 인격이 아닌 조형물 앞에서 절하고 빌거나 실제 고인을 위해서 뭔가를 기원하는 행위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살아있는 인격이라 해도 숭배하면 악한 것이며 영혼이 없는 비인격물에게 절하고 기도하고 기원하는 행위도 악한 행위가 된다. 그런즉 신자들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참배를 해야 한다. 사후에 참배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살아생전에 잘 찾아뵙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조(謹弔)

근조란, 삼갈 근, 불쌍히 여길 조로 삼가 남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를 표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존경하는 분이나 공적인 분들이나 가까운 분들이나 조직 내의 사람들이 죽으면 근조 리본을 달기도 하고 글씨를 써 놓기도 한다. 특히 신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웃의 죽음에 대하여 함께 슬픔하고 울고 돕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애도는 신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노제(路祭)

노제란, 길로, 제사 제로 운상도중에 친척이나 친지가 상여 옆에 제상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거리제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노제를 드리는 자들도 적지 않으나 신자들은 삼갈 것이 있다. 고인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함이나 망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이나 지식으로 하는 노제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단지 고인이 살던 곳이나 평소 즐겨 찾던 길이나 장소를 도는 것과 슬퍼하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살아생전에 누군가를 모시고 여행을 하거나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추모(追慕)와 추도(追悼)

추모란, 따를 추와 그리워할 모로 죽은 이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추도란, 슬퍼할 도로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의미는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하나 굳이 구분을 한다면 사망 직후에는 추도식이라고 하고 그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고인을 기리는 행사나 모임을 갖는다면 추모식으로 명하고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죽음과 이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믿기에 마냥 슬퍼만 하면서 사는 것은 또 다른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망자는 계속 슬퍼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전의 그분의 생을 생각하고 나누며 그리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교회나 신자들은 신자로 살다가 죽은 자에 대하여 ‘추모식’으로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추모나 추도식 때에도 신자였거나 불신자였거나 고인을 위해서 음식을 차려 놓거나 기도하거나 예배하거나 고인을 위해서 춤을 추거나 복을 비는 행위는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살아있을 때 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묘(省墓)

성묘란, 살필 성과 무덤 묘로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말한다. 참묘라고도 한다.

요즈음은 화장(火葬)을 하므로 납골당에 고인의 유골을 안치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매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묘는 신자나 불신자나 바람직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성묘 시에 삼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묘에 절하거나 묘 앞 비석이나 잔디 위에 음식을 차려 놓거나 술이나 음료를 묘에 뿌리거나 엎드려 기도하거나 절을 하는 행위들은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단지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만 해야 한다. 성묘명절이나 장례식 후 3일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날에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 온 가족들이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을 정하여 하면 된다. 사후에 성묘보다 평소에 부모나 형제나 지인들을 자주 찾아뵙고 사는 것이 후회가 없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명당(明堂)

명당이란, 밝을 명과 집 당으로 풍수지리에서 이르는 좋은 묏자리나 집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터를 명당자리라고 일컫는다.

성경적으로 보면 집터나 묘 자리는 명당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터가 좋은 곳이다. 단, 지리적, 교통적, 재해적, 수리적, 시간적으로 볼 때 적절한 곳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신자들은 어디가 명당이니 어디가 잘되는 터니 하는 터무니없는 말과 소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해서 집터와 묘 자리를 정하면 된다. 또한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서 풍수지리 관련자를 찾거나 점집을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길일(吉日)

길일이란, 좋을 길로 다른 날과 다른 길한 날 혹은 좋은 날을 말한다.

성경은 모든 날이 거룩하고 길일이라고 한다. 특별히 좋은 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날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날이 어느 날보다 더 편리하고 한가하고 모이기에 좋을 뿐이다. 어느 날이 어느 날보다 더 우월하고 좋다는 것은 없다. 이 또한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을 잡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서 장례 일정과 결혼 날짜와 개업 날짜나 기타 날짜를 잡는 것은 매우 미신적인 행위로 성경적이지 않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해서 날짜를 잡으면 된다.

지금까지 14가지 장례 및 제사 관련 용어들을 살펴보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매우 성경적이지 않아 신자들이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로 인하여 갈등이 불가피한 것들도 있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타협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서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는 문화에 대하여 동화되거나 합리화를 시키면 안 된다. 또한 전도를 내세워서 성경에 반하는 문화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교회와 신자는 지혜와 온유와 인내와 설득을 통해서 비성경적인 문화를 지혜롭게 변혁시키는 자지 동화되거나 타협해 버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고난과 핍박과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성경적인 바른 안목과 지식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온전한 모습으로 장례 문화와 제사 문화를 선도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혹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의 시작입니다/실화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현대의학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한때 아이젠하워(미국 제 34대 대통령)의 개인 담당의사였고,

현재 테네시주 다이아그나스틱(Diagnostic)병원의 내과 특히 심장혈관질환의

전문의이자 응급소생술의 국제적인 권위자입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평생을 의사로 일해왔고 거의 매일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경험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꿈이거나 환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1977년 어느날이었습니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조지아주 라파옛에 사는

48세 된 우체부 찰리 맥케익이라는 사람이 입원했습니다.

동료의사 팸 찰스워드가 그 환자의 심전도 검사를 하는 도중

갑자기 찰리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찰리는 자기 심장이 멎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4~5초가 지나자 찰리는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치 뭘 몰라서 질문이라도 하나 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뒤집고 그대로 까무러쳤습니다.

즉시 간호사 하나가 달려들어 '생명의 키스'라 불리는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을 실시했습니다.

그 사이 다른 간호사는 정맥주사를 준비했습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그의 심장을 정상으로 뛰게하기 위하여 심장조율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찰리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습니다.

"멈추지 말아! 난 지금 지옥에 있어! 지옥에 있다고!" 모리스 롤링스는 환자가 환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받아넘겼습니다.

"당신은 계속 지옥과 씨름하시오. 나는 지금 당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쁘오!"

그런데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개 환자들은 고통 때문에"그만 눌러요. 갈비뼈를 부러뜨릴 참이오"하고 의사에게 항의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흉부 압박맛사지는 때론 환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돌아오고 싶어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롤링스 박사가 그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당신은 어째서 내가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지옥에 있소"하고 소리쳤습니다.

 "지옥으로 가게 될까봐 무서워한다는 뜻이군" 박사의 말에 그는 "아니오, 나는 지금 지옥에 있소.

나를 가게 하지 마시오. 제발 나를 보내지 마시오. 내 말 이해 못하겠소?

나는 지옥에 있소. 당신이 소생법을 멈출 때마다 나는 다시 지옥에 간단 말이오.

제발 나를 지옥에 다시 보내지 말아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지금까지 죽음에 다가가는 많은 환자들의 항변을 무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환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5년 동안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있었고 평생 그토록 무서워하는 얼굴 모습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환자를 살리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환자가 "내가 어떻게 하면 지옥에서 나갈 수 있소."하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기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황한 박사는 "나는 목사가 아니오"라고 투덜대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간호사들의 따가운 눈총에 밀려 그는 마지못해 기도문을 선창했습니다.
"따라서 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저를 지옥에서 구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다시

산다면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 환자는 이 기도를 필사적으로 따라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진정되었고 곧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환자의 방에 갔을 때 그 환자는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이며, 모리스 롤링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관하여 의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두가지 방법으로 죽음에 관해 연구하였습니다.

첫째로, 병원에서 임상적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이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들의 경험이 서로 매우 유사하고 일정한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두세 사람이 유사한 꿈을 꾸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난 많은 환자들이 본질적으로 같고 연속적인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환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로서, 모두가 자신들의 경험을 꿈이 아닌

현실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경험이 꿈이 아니라 실제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세계 여러 종교들의 경전을 구해서 읽고 서로 비교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과 탈무드, 회교도의 경전 코란, 옛 인도의 성전 베다,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브라만, 조로아스터교의 경전과 주석서인 젠드아베스타, 공자의 어록, 자이나교의 아가마,

불교의 불경, 일본의 신도 고지키, 노자가 제창한 도교, 논어를 포함한 많은 종교의 신성한

책들의 많은 이론들을 열심히 비교하고 분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한 책이 죽었다 살아난 환자들의 죽음 후의 경험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기독교의 성경(교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는 연구가 끝난 이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비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트라이언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은 너무 늦게 본 진실이다.

제때에 할 일을 경홀히 여기고 후회하는 곳이다.

러분이여,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모두 다 지옥을 면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모리스 S. 롤링스] 약력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진단센터와 차타누가 지역병원의 심장질환

전문가인 모리스 롤링스 박사는 육군과 해군에 복무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제97종합병원의 심장학과 과장이 되었다.

 

그후 그는 마샬, 부래들리, 패튼,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소속되었던 미국 국방성 합동 참모 본부의 전담 의사로 승격되어 일을 했다.

 

롤링스 박사는 갑작스런 죽음에서 환자를 소생시키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미국 심장 협회의 전국 교수단의 일원이다. 그는 현재 차타누가에 있는 테네시 대학 의과대

임상학부의 조교수이고 세계심장혈관 질환 위원회의 회원이다.

그는 테네시 주의 미국 심장학 대학에서 총장을 지낸바 있으며, 테네시주 다이아그나스틱(Diagnostic)

병원의 내과 특히 심장혈관질환의 전문의이자 응급소생술의 국제적인 권위자로,

그 지역의 지역 긴급 구조 위원회의 창립자이고, 심장 연명 프로그램 강사이면서

또한 미국 외과 의사회, 심장학 협회, 흉곽 전문의사 협회의 회원이다



임종예배 설교(믿지 않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제목: 영원한 장막

찬송: 187, 188

성구: 고후 5:1-5

 

우리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누구든지 이 장막집에서 영원토록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인생들입니다. 자녀들이 휴가를 받아서 텐트를 들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 며칠지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영원토록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장막집은 언젠가는 무너질 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흙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집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우리 인생이 그렇다면 우리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나서는 반드시 선악을 판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의 말씀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그네 인생을 잘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둘러 앉은 유족들에게 저는 목사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남은 날이 얼마일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믿음으로 준비하며, 우리도 우리의 장막집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소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리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

사람의 몸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생명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날이 한 번 불어 흔적도 없어지는 바람 같고 공중에 쏘아서 금방 보이지 않게 되는 살과도 같습니다. 해가 오르면 말라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가야합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같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귀한 유족들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아버지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라건대 사랑하는 유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 위로가 함께하사 과도한 슬픔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신 대신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천국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이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로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돈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힘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은 육체가 죽는 그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돈을 쌓아 놓고 이제 잘 살아보자고 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를 얻어 놓고 그 다음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지은 집은 영원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모든 유족들이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훗날 아버지 집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종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영원한 세계

찬송: 291, 295

성구: 고후 5:8-9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던 고 000(직분)님께서 000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000(직분)님께서 살아 생젼에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는지. 믿음에 있어서 항상 최선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눈물과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00년간 병석에 계시면서도, 자신보다는 늘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000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자녀들이 믿음 위에 서서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이제는 000님의 뜻을 받들어 더욱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유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바울 사도의 소원

사람들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몸을 떠나가서 주님을 만나 뵈옵는 그것이었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입은 000님께서도 바울과 같이 속히 육신을 떠나

주님을 만나 뵈옵기를 소망하셨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몸 안에 거하든지 또는 떠나든지

간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 세상을 떠나, 몸을 떠나 주님을 만나는 것을 고대하였을까요?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이 세상에는 없는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000님께서도 이제는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서,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이 없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는 줄 믿습니다.

 

2. 성도들의 소원

누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선택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어 사죄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000님은 예수를 믿어 이미 저 영원한 하늘나라 시민권을 받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에 그분이 그렇게 소원하시던 것과 같이 주님과 더불어

이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고 000님의 시신 앞에서 자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계시는

000님을 만날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여러분들의 변치 않는 영원한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00님은 그 동안 많은 어려움과 역경 중에서 고달픈 생활과 무거운

짐을 지고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쉬라 하시매 이 모든 무거운 것과 짐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 안식의 세계에, 행복의 세계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세계, 천군천사들이 찬송을 부르는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유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운명 전 예배 설교(돌아가실 분이 믿음이 없는 경우)

 

제목: 인생의 종말

찬송: 534, 539

성구: 49:28-30

 

인생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시유종(有始有終)한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났다가 때가 이르면 죽고마는 존재가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 지존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주심으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곧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생이 아닌 죽음이 다가옴으로 인해 인생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죽음의 의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도 존재의 사라져버림도 아닌 분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죽음이란 생명의 본체이신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범죄하면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18:4).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것이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둘째, 육체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가 영혼과 분리될 때 육체만 남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부패되고 썩어버립니다. 야고보서 2: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이것은 마지막 대심판대 앞에서 주를 밎지 않던 불신자들이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끝도 없는 세월 동안 단절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 속에서 영육이 다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2. 사후 상태

죽고 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세 가지로 그 상태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첫째, 일반적인 상태인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은 후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죽거나 자는 것이 아니라 멸하지 않는 생을 가지며 죽은 후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둘째, 신자의 상태를 보면 의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립니다(12:23, 고후 5:1,6). 셋째, 불신자의 상태인데 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짐을 받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통과 어두운 가운데서 대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서 능욕을 당하기 위해 부활하게 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좋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나쁜 세계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최후를 장식할 것인가? 이는 대단히 중요한 최종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날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부름을 받는 날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000,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십니다그러면 주님께서는 000님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000

님과 가족 여러분들이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 천국의 소망이 든든한 가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운명 전 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위로와 소망

찬송: 539, 545

성구: 살후 2:16-17

 

1. 이별이 주는 선물

사랑하는 애인과 이별을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일도 하기 싫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삶 자체에 대해 별 의욕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의 아픈 마음을 들어 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에 다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아픈 마음에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말도 해주지를 못했습니다. 세월이 약임을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인간의 헤어짐은 새로운 소망을 향한 출발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아픔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2.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죽음의 문제로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불확실한 성도가 있었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들도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의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처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을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통해 당신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존귀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 당신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근심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하늘로 오르신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상담자, 위로자, 변호자를 의미합니다. 당신을 위로하시고 상담하실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께 당신의 아픔과 슬픔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당신의 생애 속에 아무런 낙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말할 때 주님은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둘째로 당신을 굳게 세워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될 때 당신을 붙잡아 주실 분,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는 당신이 실망될 때 당신을 든든히 지키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당신을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영원한 위로와 소망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감추거나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허전함이 느낍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000님에게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 넘쳐나기를 바라고, 굳게 세움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둔 가족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000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소망의 줄을 잡고 믿음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슬픔 가운데 머리 숙인 우리를 능히 굳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선한 싸움을 위해 질주할 뿐입니다.

 

오늘 임종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십자가 그늘 아래서 위로 받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례/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벧전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세상 영광 지나가니 주의 십자가 자랑해 성경 중의

모든 말씀 거기 중심 되었네” 122장 세상의 영광은 지나가고 맙니다
 지나지 않는 영공은 없는 것입니다.

이를 비하여 풀과 같다고 또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였습니다,

싱싱한  꽃이 필 때에는 언제 그 싱싱한 것이 변할 것 같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니 풀은 언제인가는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 세상을 마치시고 가신 고 조 광섭 선생께서는 거대하신 그 체구,

그 한창 정의를 위하여 일하시던 모습이 가족은 몰론 도든 친구 친지들의 눈에 선할 것입니다.

수고도 물론 많이 하셨으나 영광도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나라 일을 위해서 한창의 기백을 발하시던 분인데 풀의 꽃과 같이 인생은 갑니다
 인생의 청춘은 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의 의기로 보나 정신으로 보나 더 씩씩하게 일하실 수 있으시나 이 몇 해 어간

중한 병으로 아프시어 건강도 시들고 하셔서 기력이 없으시게도 출입을 하신 것을

엊그제 보였는데 오늘은 그 길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옛날 이사야 선지께서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에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하였으니 조 선생께서 비록 큰 체구를 가지시고 게시며

그 정신력이 왕성하신 분이 뉘게 비길 데 없으신지라 풀과 같이 쇠하여졌습니다
  그의 영광도 한창 때에야 노동 대중을 움직이는 그런 영광을 가지시기도 하였으나

그 영광도 풀의 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풀도 마르고 꽃은 떨어짐 같이 되었습니다

다만 영원한 것이 여기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사상이나 정신이 떨어지던지는 안 하겠으나 세상의 것은 아 그렇다고도 못합니다

그로되 주님의 말씀을 주님과 관계를 맺은 것은 세세토록 남아 있습니다
조 선생께서 거구를 가지시고 교회를 찾고 하심을 때로 보고하였거니와

병상에 계실 때에도 때로 방문하면 이에 대한 실감 있는 말씀을 하곤 하였습니다

남은 것은 믿는 믿음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옛날의  자신의 그 활발한 활동이 옛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가신 분도 이를 절실히 느끼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과거와 현실을 잘 대조하여 보면서 일시적인 것에 도취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향하여 영원한 것을 위하여 일고 매진하여야 합니다
  더욱 여러분은 이를 더욱 명심하셔서 영원한  것을 우선적으로 사모하고 

살아야 된다는 이 말씀을 깊이 기억 할 것입니다

추모예빼.11 - 부모의 자식을 향한 뜻(왕상2:1~4)


찬송: 304(404), 235(222), 545(344),

이제 천국에 가신 어머님의 4주년 기일을 맞아 추모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묵도: 계시록14:13 신앙고백: 사도신경

기도: 가족중 성경봉독: 열왕기상2:1~4

설교: 부모의 자식을 향한 뜻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살았던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주는 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는 솔로몬에게 대장부가 되라고 조언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강조합니다.

바라기는 다윗의 유언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뜻깊은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고인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더욱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1.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이스라엘 왕 중의 왕으로 기억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받은 다윗도 예외 없이 죽을 날이

 임박함을 깨닫고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간 죽음의 길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먼저가신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께서 생명 허락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사는데 힘써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누구도 죽음에서 예외일순 없는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자손이 영생 얻을 것을 원하실 겁니다. 자손이 천국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께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도록 몸을 통하여 물려준 건강을 잘 지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귀한 도구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주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 믿음의 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24;15절에 여호수아가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날 택하라. 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열조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신함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가문과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복된 자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느껴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문제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지옥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구원과 영생과 천국시민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2.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지키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 솔로몬에게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 하나님을 잘 믿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유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깨닫고 체험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다윗왕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명하여 가로되 이 명령에는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의 축복을 알기에 꼭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서도 지금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갈망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손자들아 반드시 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라.” 그리하면 세상에서 잘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둡고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할 때 우리가 붙잡고 의지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 누리게 하기 때문이며, 믿음의 기도가 응답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란 말씀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3. 그리하면 형통할지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7,9)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면 형통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이렇게 산 사람들이 형통하게 되었음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은 스스로 그 원인을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던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였을 때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형통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언급됩니다.

네 자손들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무슨 뜻입니까?

솔로몬아 너도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해서 자자손손 왕이 이어지는 복을 받도록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 대에서 끊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손들도 믿음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온 가족들은 이 다윗왕의 유언을 가슴에 새겨,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형통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를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서도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고인의 뜻을 따라 믿음의 대장부로 사는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305주기도문

2016.9.17. 4주기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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