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 바보같이 살앗군요.ㅡ
??가슴아픈 사연!

며칠 전 신문에 90을 넘긴  당대 최고 인기여배우 최은희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옛날 조용한 지적 여인상으로 최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그녀의 인생은 파란 만장한속에
지금은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떠날 날만

기다리시고 있답니다.

입양해서 키워준 자식들도 최은희를 모시지 않구 양로원에 맡겨놓고 있는상황...

친자식도 그런데 키워준 자식은 오죽하겠습니까? 자식들 모두다 소용없습니다.

우리 자신 들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

자신의 장례식엔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장송곡으로 해달라고 했답니다.!~

참말허무하고 아쉬움에
마음이 휑합니다.

아! 김정일이 탐내어 납치까지 한 이런 미모의 배우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화려했던 삶에 무기력한채 빈손으로 저승길에 나서니 돈도 명예도

부도.화려함도 다~헛된 물거품 이란것을 새삼 느끼게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 이란 노래가 더욱 실감나는
한순간입니다.

인생길 황혼속에 즐겁게 살면서 남은인생 친구나 혹은,

연인과 함께 여행다니면서 남은 여생을 재미있게 보내는게 제일 값진

인생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모두 힘냅시다!!!

자식위해 희생하고 고생 하지 맙시다 아이들의 남은세계는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갈 시간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먹은 우리가  급하고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는 속일수 없습니다. 남은인생 즐겁게 재미있게 삽시다 화이팅!~!!!!

파티장에서 한 부인이 잠깐 넘어졌다.
구급차를 부를까요?
라고 했지만 그 부인은 괜찮다며 구두가 새것이라서 잠깐 휘청거렸을 뿐이라고 했다.
여럿이 그 부인 옷에서 흙을 털어주었고 음식도 새것으로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부인은 파티를 즐기고 귀가했다.

다음날 그 부인의 남편이 전화를 했는데,
오후 6시에 그 부인은 사망했다고 했다.
파티에서 부인은 뇌졸중을 당한 것이다.
만일 그때 누가 뇌졸중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기만 했어도

부인은 지금 살아 있을 것이다.

신경과 의사의 말입니다. 뇌졸중 환자를 3시간 이내에 치료하면

뇌졸중에서 오는 결과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답니다.
문제는 뇌졸중이 발병하면 즉시 증세를 인지하고 진단해서 3시간

이내에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지요.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뇌졸중을 영어로 STROKE 라 합니다.
처음 석자 STR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뇌졸중의 징후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습 니다. 그러나 이걸 알지 못하면 비참한 재앙이 발생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뇌졸중의 징후를 알지 못하면 환자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당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함으로써

뇌졸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1. S - Smile 웃어보세요
2. T - Talk 말을 해 보세요.
  (제대로 완전한 문장으로 답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3. R - Raise 두 팔을 올려 보세요.

위의 3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하지 못하면 즉시 구급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구급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세요.
뇌졸중의 새로운 징조 네 번 째,
혀를 내밀어 보세요.
혀를 내밀었는데 혀가 꼬부라졌다든가 이쪽 또는 저쪽으로 굽었다든가 하면

이것이 뇌졸중의 또 다른 징조입니다.

심장내과 의사가 말하기를
이 카톡을 받는 사람이 다시 10명에게 보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저는 제 몫을 했습니다. ?

여덞명의 자식과 한명의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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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57세에 혼자가 되어버렸다.
의 이혼소식에 쓰러진 아버진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렇게 현명 하셨던 엄마는 정신이 반 나간 아줌마가 되어
큰오빠 작은오빠 눈치보기 바빴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큰오빠 말에
그 큰집을 팔아 큰오빠에게 다 맡겼고
나 몰라라 하는 큰오빠때문에
작은 오빠의 모든 원망을 다 감수해야 했다.

사이 좋았던 팔남매가
큰오빠때문에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엄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고
노름하는 아들한테 조차 할말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걸 이해하는 난 엄마가 원하는대로
형제들에게 돈을 풀어주었고
그런 나에게 미안했던 엄마는
가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널 낳지 않았으면 난 어떡할뻔했니'

'괜찮아 엄마, 엄마는 우리 여덞 잘 키웠구
큰오빠가 지금 자리잡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치, 효자잖어
이젠 새끼 걱정 그만하고 애인이나 만들어서 즐기고 살어!'

'난 애인은 안돼 니 아빠같은 남자가 없어'

그러던 엄마가 어느날
나에게 슬그머니 말씀하셨다.

'남자친구가 생겼어.
작년 해운대 바닷가 갔다가 만났는데
괜찮은거 같아서 가끔 같이 등산간단다.'

어쩐지~~자꾸 등산 가더라~


뭐하는 분인데?

'개인병원 의사인데 사별했데.'

'이번 엄마 환갑때 초대해봐.
내가 언니 오빠들한테 말해놓으께.'

우린 엄마 생신때 호텔 연회장을 하나 빌렸고
엄마 지인들과 여고 동창들을 다 초대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도

엄마 남자 친구는 멋졌다.
그리고 어울렸고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 더 좋았다.

'그집 아들들이 재혼을 원한다는데 어쩌지?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좀 그렇다네.'

모두들 찬성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빠가 길길이 뛰기 시작했고

'안돼 엄마 그런게 어딨어
우리 불쌍한 아버진 어쩌라구
이 나이에도 남자가 필요해?

우리 자식 보며 살면 안돼? 창피해!
형은 장남이 돼 가지고
엄마 모시기 싫어서 그래?
내가 모실테니 걱정마
그러면 아버지 제사땐 어쩔껀데, 엄마!
아직 난 엄마가 필요 하다구!!!!'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미친 놈이

보기싫어 형제들은 다 가버렸고
소리지르며 욕을 퍼붓는 나를 엄마가 막으셨다.

"그만해라, 없었던 일로 하마."


그리고 다음 해
어느날 술이 잔뜩취해
올캐와 싸웠다고 작은 오빠가 전화가 오고
가지말라고 말리는 나를 뒤로 하고 간 엄마는
다음날 병원 응급실에서 만났다.
새벽에 얼까봐 수돗물을 틀어 놓으러 나오셨다가
쓰러져 뒤늦게 발견 된 엄마!

우리 자식들은 중환자 실에 누워있는
혼수상태의 엄마를 처음엔 매일 붙어 있었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볼일들을 보기 시작했고
면회시간을 꼭 지켜 기다리고 있는건
병원을 맡기고 온 원장님 뿐이었다
우린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원장님은 엄마를 주무르며 계속 속삭였다

'박여사 일어나요.
우리 전에 시장가서 먹었던 선지국밥
그거 또 먹으러 갑시다.
내가 사준 원피스도 빨리 입어 봐야지!'

병원에서 우리 형제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제 병원에서 해줄것은 없습니다.
퇴원하셔야 됩니다.'

평생 식물인간 이라는 판정과 함께
어디로 모셔갈껀지를 정해줘야
차로 모셔다 준다는 말에 모두들 헉!

큰 올캐가 먼저 말했다.
자신은 환자를 집에 모시는건 못한다고.

둘째 오빠가 말했다.
맞벌이라 안된다고.

장가도 안간 스물 여덞살 막내동생은
울기만 한다.

딸들 표정은 당연히 큰오빠가 해야지
본인들 하곤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오빠들은
'그동안 니가 모셨으니 계속하면 안될까?'
하는 표정으로 날 본다
그냥 누워계시는게 아니라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있어야 하니
모두들 선뜻 대답을 못했다'

난 결국 내 집인줄은 알지만
형제들 꼴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제가 감히 한마디 해도 되나요?'

언제 오셨는지 우리곁으로 오신 원장님.

'제가 그때 박여사와 재혼을 말했을때
박여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직 우리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한가봐요.
자식들이 내가 필요없다하면
그때 갈께요 했어요.
지금도 엄마가 필요하세요?
난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이라도
숨만 쉬고 있는 박여사가 필요합니다.
나한테 맡겨 주세요.
내 병원이 박여사한텐 더 편할껍니다.'

작은 오빠가 통곡을 했다.
다른 형제들이 울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는 퇴원을 못하고 돌아가셨다.
모두 저 마다 믿는 신에게 기도했겠지만
난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마!
엄마의 이뻤던 모습만 보고 먼저간 아버지는 잊고
엄마의 추한 병든 모습까지도 사랑한
이 원장님만 기억하고 가, 엄마!
엄마는 팔남매 키운 공은 못보고 가셨지만
여자로 사랑만큼은 멋있었어'

67세에 우리 엄마는
그 가슴 졸이며 평생 키운 팔남매 가 아닌
몇년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자식이 식물인간이 돼 있다면
부모는 무엇을 이유로 댈까.
우리 팔남매는 엄마를 모셔가지 못할
이유가 다 있었다.
더 끔찍한 것은 나도 그 입장이라면
그런 핑계를 대지 않았을까?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한테 묻고싶다

'엄마~
또 다시 새 인생을 준다면
팔남매 낳을꺼야?

이눔의 새끼들을 기냥
신나게 패야 되는데~~'

엄마~~~죄송해요.......

못난 이딸은 가슴으로 웁니다.

?  기막힌  개같은 세상  ?

?개 팔자 (犬 八字)
                               
한적한 산골마을 마산댁 앞마당에 한가히 졸고 있는 개를 바라보며

증산댁은 지난 여름을 떠올린다.

머지않아 아들로부터 서울집으로 올라오라는 연락이 올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않다.

동네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내가 아들 집에 다녀오면 큰 호강이라도 받다가 내려온 줄로 알고있다.

어제도 윗집 마산댁이 놀러와 서울 아들집에 가서 어떻게 지내다 왔냐는 말에
아들집에 개 봐주러 갔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다.

평소에는 전화도 없던 아들내외는 휴가를
간다거나 해외여행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증산댁 전화는 조석도 잊고 울려댄다. 


아들집에 도착하면 며느리는 시어미에게 개 돌보기 교육을 시킨다.

해피는 매일 목욕을 시켜야 하고,
해피식사는 노화 방지에 면역력 향상을 위해
아침에는 유기농 오리고기에
저녁에는 럭셔리 닭고기를 먹이라고
메모를 시어머니에게 전해주며

“어머니! 이 해피는 보통 개가 아니에요,
치와와라고 삼백오십만원 주고 데려왔어요,

저보다 동호씨가 해피를 더 사랑해요,

우리 없는동안 신경 좀 써주세요,

저녁에는 공원에 나가 산책을 꼭  시켜야 해요“


허, 어쩌다 어미에게 용돈 십만원 보내주는 것은 벌벌 떨면서

개새끼가 뭐라고 쇠고기에 오리고기냐며
증산댁은 못 마땅해 한다.

아들 내외는 결혼 한지 팔 년이 지나도록 손주도 낳지 않고

개새끼를 제 새끼 돌보듯이 온갖 정성을 들인다.

아파트 현관 앞에 개를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를 보면서
증산 댁은 다시는 아들 집에 오지않겠다고 다짐을 한 것은 여러 해 전이다.

해질녘에 공원 넓은 잔디밭은 개들의 운동장으로 변한다.

개들은 뛰어놀고 젊은 여인들은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자기집 개를

자랑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떤 젊은 부부는 즈네 개를 펫 호텔(Pet Hotel)에 맡기고 휴가를 떠날 예정이라며

개가 눈치도 빠르고 너무너무 영특하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공원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여인네를 바라보던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며 푸념 섞인 목소리로 증산댁에게 말을 건다.


“저 여자들이 부모보다 개한테 더 잘하는 이유가 뭐여?
나는 무슨 팔자가 개만도 못 헌 겨?”

“ 요즘, 개 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셔유?”

"비싼들 부모보다 비싼 겨? “

”제 부모는 자장면에 여인숙에서 잠재우고 개새끼는 유기농 오리고기나

쇠고기에 호텔에서 잠재우는 세상이구먼유“

“제 놈들 이만치 살게 해 놓은게,
나이 든 어미 아비를 개만도 못하게 대하구.”

“시방은 부모는 개만도 못 하대유~
부모는 식구 중에 순번이 맨 꼴찌라고 하 잔유~”

농촌에서 보신용으로 기르던 개들이 서울에서는 상전 대접을 받는 세상이라며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는 애환이 서린다.

 

경산에서 올라왔다는 노인은 자식이 고생접고 농토를 정리하여 서울로 와서

편히 지내라는 유혹에 논밭을 모두 팔아 아파트 마련해주고 아들네 집으로

 들어와 살아보니, 일상은 개돌붐이로 변했고,
조석으로 얻어먹는 밥맛은 소태를 씹는 맛이란다.

고향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는 경산댁은 증산댁 손을 잡고는 절대로

고향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일 봐 유,
저두 우리집 개 목욕시킬 시간이구먼 유”

집에 도착하니 전화벨이 요동을 친다,

 "엄마! 여기 하와이야! 엄마! 엄마! 해피 산책하고 목욕시켰어?

밥도 잘 먹고, 잘 놀아? 오늘 아침에는 유기농 오리고기 먹였지?

엄마! 엄마! 내 말 잘들리지?
요즘 해피가 컨디션이 안좋니까 해피 방에 에어컨은 26도로 맞춰서 꼭 켜줘,
해피는 큰소리치면 경기해”

어미의 안부는 묻지도 않고 해피를 먼저 찾는 아들의 음성이 타인처럼 들려온다.


지난 여름 기억이 떠오른다. 
해피가 몸살이라며 오밤중에 며느리는 잠든 아들을 깨워 허둥지둥 해피를

차에 태워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와서는 하는 말이,
해피가 영양실조에 운동부족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어미가 속이 불편하다는 말을 했을 때,

엄마는 과식을 해서 그렇다고 핀잔을 주고는 
날이 밝으면 동네 병원에 가보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동차를 타고 출근 하는 아들 내외를 바라보며 증산댁은 소리친다.

"뭘, 과식을 하니~? 먹은 건 찬 밥에 김치밖에 없다.

개팔자가 상팔자라 증산댁은 푸념을 늘어 놓는다.

     -----  -----    ------

 “?휴~ 내가 노년에
이 꼴 보려고 힘들게 흙파서 자식을 키운 겨??”
요즘  공원이나 산책 길을  걸어 가면서  보면  가슴을 친다

뭔  세상이 사람이 귀한게 아니라ㅡ

개가 상위 대우를 받는것을  본다 

동네 젊은 여인네들이 개를 보며 지가 엄마란다.

개가 지 새끼란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언제부터 사람이 개 애미가 되어버렸나~~? 

? 어버이 마음 ?

(어버이날이 다가오네요 ~ 조용한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어머님이 물었어요.
" 그래 낮엔 어딜 갔다 온거유? "
" 가긴 어딜가? 그냥 바람이나 쐬고 왔지! "
아버님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어요
" 그래 내일은 무얼 할꺼유? "
" 하긴 무얼해? 고추모나 심어야지~ "
" 내일이 무슨날인지나 아시우? "
" 날은 무신날 ! 맨날 그날이 그날이지~ "
" 어버이날이라고 옆집 창식이 창길이는 벌써 왔습디다."
아버님은 아무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당겼지요.
" 다른 집 자식들은 철되고 때되면 다들 찾아 오는데, 우리 집 자식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원~"
어머님은 긴 한숨을 몰아쉬며 푸념을 하셨지요.
" 오지도 않는 자식놈들 얘긴 왜 해? "
" 왜 하긴?

하도 서운해서 그러지요. 서운하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유? "
" 어험~ " 아버님는 할말이 없으니 헛기침만 하셨지요.
" 세상일을 모두 우리 자식들만 하는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식 잘못기른 내죄지 내죄야! "
어머님은 밥상을 치우시며 푸념아닌 푸념을 하였지요"
"어험 !! 안오는 자식 기다리면 뭘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아버님은 어머님의 푸념이 듣기 싫은지 휭하니 밖으로 나가셨어요.

다음 날, 어버이 날이 밝았지요.
조용하던 마을에 아침부터 이집저집 승용차가 들락거렸어요.
" 아니 이 양반이 아침 밥도 안 드시고 어딜 가셨나?

고추모를 심겠다더니 비닐하우스에 고추모도 안뽑고.."
어머님은 이곳 저곳 아버님을 찾아봐도 간곳이 없었지요.
" 혹시 광에서 무얼하고 계시나? "
광문을 열고 들어 갔어요.
거기엔 바리바리 싸 놓은 낯설은 봇다리가 2개 있었어요.

봇다리를 풀어보니 참기름 한병에 고추가루 1봉지, 또 엄나무 껍질이 가득 담겨 있었지요.

큰아들이 늘 관절염 신경통에 고생하는걸 알고 준비해 두었던 것이지요.
또 다른 봇다리를 풀자.. 거기에도 참기름 한병에 고추가루 1봉지, 민들래 뿌리가 가득 담겨 있었지요.

작은 아들이 늘 간이 안 좋아 고생하는 걸 알고 미리 준비해 두셨나 봐요.
어머님은 그걸 보시고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언제 이렇게 준비해 두셨는지.. 엄나무 껍질을 구하려면 높은산엘 가야 하는데,

언제 높은 산을 다녀 왔는지.. 요즘엔 민들레도 구하기 힘들어
몇일을 캐야 저 만치 되는데.. 어젠 하루종일 안 보이시더니, 읍내에 나가 참기름을 짜 오셨던 거지요.
자식 놈들이 이 마음을 알려는지.. 어머님은 천천히 발을 옮겼어요.

동네 어귀 장승백이에 아버님이 홀로 앉아 있었지요.

구부러진 허리에 초췌한 모습으로 저 멀리 동네 입구만 바라보고 계셨어요.
어머님은 아버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시치미를 뚝 떼고,
" 아니 여기서 뭘 하시우? 고추모는 안 뽑구? "
" ......... "
" 청승 떨지말구 어서 갑시다. 작년에도 안오던 자식놈들이 금년이라구 오겠수? "
어머님이 손을 잡고 이끌자, 그제서야 아버님은 못이기는척 일어 났지요.
" 오늘 날씨 왜 이리 좋은기여? 어서 가서 아침먹고 고추모나 심읍시다 "
" ..... "
아버님은 아무 말없이 따라 오면서도 자꾸 동네어귀만 처다 보셨지요.
" 없는 자식복이 어디서 갑자기 생긴다우? 그냥 없는듯 잊고 삽시다 "
" 험험 ... "
헛기침을 하며 따라오는 아버님이 애처로워 보였지요.

집에 돌아와 아들오면 잡아주려고 애지중지 길러왔던 씨암탉을 보고..
"오늘은 어버이 날이니 우리 둘이 씨암탉이나 잡아 먹읍시다.

까짓거 아끼면 무얼하겠수? 자식 복두 없는데.. "
" ...... ",  아침 밥상을 차리면서
" 오늘은 고추모고 뭐고 그냥 하루 편히 쉽시다.

괜히 마음도 안 좋은데 억지로 일하다 병나면 큰일 아니우?

다른 집들은 아들 딸들이 와서 좋은 음식점에 외식이다 뭐다 하는데..

우린 씨암닭 잡아 술이나 한잔 합시다 "
" 험험 ... ",  그때였어요.


아침상을 마주하고 한술 뜨려 하는데,
" 아브이 어므이~ " 하면서 재너머 막내 딸과 사위가 들이 닥쳤지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심하게 저는 딸이라 늘 구박만 주었던 딸인데,

사위랑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들어 왔어요. 깜짝 놀라며~!
" 아니 니가 어떻게.. 제 몸 하나 잘 가누지 못하는 니가 어떻게 왔니? "
" 어므이 아브이 !! 오늘 어브이날 이라 왔어. 아브이 좋아하는 쑥 버므리떡 해가지고 왔어. "
그러면서 아직 따끈따끈한 쑥 버므리떡을 내 놓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이 아침에 어떻게 이 떡을 만들었니? "
" 저이하고 나하구 오늘 새벽부터 만들었어 맛이 있을런지 몰라 히히 "
" 이보게! 박서방 !! 어떻게 된건가? "
" 네 ! 장모님 저사람이 어제부터 난리를 첬어요. 장인 어른께서 쑥버므리떡 좋아하신다고

쑥 뜯으러 가자고 난리를 치고, 또 밤새 울거내고 새벽부터 만들었어요. "
" 그랬구나 ! 그런데 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왔어? 천천히 오지? "
" 저 사람이 쑥 버므리떡은 따끈할 때 먹어야 맛있다고 식기전에 아버님께 드려야 한다고

뛰다시피해서 가지고 왔어유~ "
" 에이구 몸도 성치않은 자식인데.. "
소아마비로 인해 딸이 몸이 성치 않아 몇 년전 한쪽 다리가 불구인 사위를 얻어

시집을 보냈던 딸이었지요.
언제나 어머니 마음 한구석에 아픔으로 자리했던딸이었기에

그저 두내외 잘 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어느 사이 어머님의 눈가엔 눈물이 배어 나왔어요.
" 참! 아브이 어므이 이거!! " 하면서 카네이션 두송이를 꺼내어 내미는 거였지요.
" 저이가 어제 장터에 가서 사왔어! 이쁘지? 히히 "
" 내가 달아 드릴께 !! " 하면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주었지요.
" 아브이 어므이 오래오래 살아야돼 !! 알았지? 히히 "
" 그래 알았다 오래 살으마 !! 너희들도 행복하게 잘 살아라 !! 박서방 정말 고맙네 !! "
" 아니에요 장모님 !! 두 분 정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유 "
" 그려 그려 정말 고맙네 !! "
" 아브이 어므이 어서 이 쑥떡 먹어봐 !! 맛이 어떨런지 몰라 히히 "
" 그래 알았다 "
아버님과 어머님은 쑥 버므리떡을 입에 넣으며
목젖이 울컥하는것을 느꼈지요.
눈가엔 눈시울이 붉어 졌지만 애써 참으며..
" 그래 참 맛있구나 !! 이렇게 맛있는 쑥떡은 처음 먹어 보는구나~ 당신도 그렇지요? "
" 흠흠 으응.. "
아버님은 목이 메어 더이 상 말을 하지 못하셨지요.
" 참 !! 술 술.. "
사위가 잊었다는듯 보따리에서 술병을 꺼냈어요.
" 이거 아브이 어므이 드린다구 박서방이 산에서 캔 산삼주야.

작년에 산에 갔다 캤는데, 팔자구 해두 장인어른 드린다고 안팔구 술 담은거야 "
" 박서방이 산삼을 캤구먼 "
" 네! 작년에 매봉산에서 한뿌리 캤시유 "
" 에구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
산삼주를 받아든 아버님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요.
" 평생 홀아비로 늙어갈 몸인데, 저렇게 이쁜 색시를 주셔서 넘 고마워유 "
" 무슨 소린가? 몸도 성치않는 자식을 받아 준 자네가 고맙지!! "
" 아녀유?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색시구먼유 "
" 그려 그려 앞으로도 못난 자식 잘 부탁하네 !! "
" 장인장모 어르신 오래오래 사세유~ "
아버님은 눈시울이 뜨거워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하고 슬며시 일어나 나가셨지요.
병신 자식이라 불쌍하게만 여겼지, 아들처럼 공부도 안 시키고 결혼식도 안 올리고,

그냥 시집을 보낸 딸 자식이었는데..
그저 시집보냈으니 있는듯 없는듯 신경 안쓰던 그 자식이 어버이 날이라고 이렇게 불쑥

찾아 올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쑥 버므리떡을 밤을 새워가며 해가지고 올 줄이야..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떡을 먹어 본적이 있었던가?
무엇이든 아들 형제만 주려고 생각했지, 병신 딸은 언제나 안중에 없었지요.

행여 병신 자식이라고 업신 여겼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어요.
불구의 몸이지만, 딸의 마음이 저렇게 깊은줄 이제서야 알았지요.

아들들 때문에 서운했던 마음이 딸로 인해 풀어졌어요.
먼 아들보다 가까이 있는 못난 딸과 사위가 어버이날을 맞아

우울해있는 부모에게 효도를하네요

어머니도 여자란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어 육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젊어서부터 고생을 해서 얼굴에는
주름이 깊고 아픈 곳도 많으시지요.

15년전에 자궁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지난해 또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전날,
담당의사를 만나 수술 동의서를
서명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자국을 봉합할 때,
실로 꿰매는 방법과 흉터가 덜 남는
인체용 접착제로 붙이는 방법 중에
처방은 제일 좋은 것으로 해 달라고 했지만
수술 자국 봉합하는거야 별 차이가
있겠나 싶어 가격이 싼 실을 선택했습니다.


수술비를 책임지는 오빠의 부담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지요.

절차를 마친 뒤 오빠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수술은 이렇게 진행되고,
약 처방은 좋은 것으로 하기로 했으며
실로 꿰매기로 했다고요.

그러자 묵묵히 제 말을 듣고 있던
오빠가 말했습니다.

"현경아~!
아무리 늙고 병드신 몸이지만
엄마도 여자란다.
자궁 수술 받으신 흉터도 남았는데
이번에 또 상처가 생기면...
나 너무 속상할 것 같다.
돈이 더 들더라도 자국이 덜 남는
방법으로 하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같은 여자인 딸조차 늙으신 엄마가
여자라는 걸 잊어 버렸는데,
오빠는 거기까지 마음이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회복실에서,
오빠는 붕대가 친친 감긴 어머니의
배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이세상 떠나실 때까지 몸에 아픈 상처
없이 살게 해드리고 싶다는
오빠...

아마도 엄마는 당신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오빠가 있어
그 동안 고생이 하나도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ㅡ 가정의 달에 펜더가 드리는 글 ㅡ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19526. 25 전쟁이 끝나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 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 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어 머 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을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19526. 25 전쟁이 끝나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어 머 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을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어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사랑하는 어 머 니~~~~~~~~~.......

 


33세 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저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 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적에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 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 있었는데, 지나 가던 트럭에 (큰트럭 말고 중간 크기트럭) 받힐 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막노동) 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 하고도 26살때 쯤 까지

놀고 먹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가 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 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서 괴로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 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 할때

집 장만 해 주신다고 파시고 지금 전세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 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서 버는데 한달에 150만원 정도 벌어 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 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 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 하는데... 그래서 넉달 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을 모셔 왔습니다..

첨에 아버님은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 하시더라구요..

늙은이가 가 봐야 짐만 되고 눈치 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 왔습니다..

모셔온 첫 날부터 여러 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 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 반찬이나 맛있는 거 해서 드리면 안 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를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를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 하시면 바로 들고 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마시라고 몇번 말씀 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이 못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 쓰고 모아 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 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 쯤 들어 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 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 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 그래요..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 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시면서 돈 버셨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녀도 안 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 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 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러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 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며칠 전 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 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 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 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 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 웃으실 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 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 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 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 하다며 손 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 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 하시는 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아버님 손을 첨 만져 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박힌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 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 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 낸 후

세 명이 모여서 조촐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는 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 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 들어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 하실 까봐 케이블 TV도 신청했구요 ...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 하시는 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 드리는데... 보기 보다 정말 왜소 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 질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 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 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을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 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 처럼 생각 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제 눈치 안 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 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 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 다시 그렇게 일 안 하셔도 되요...

저 허리띠 쫄라 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

이 글은 민락동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년에 한바퀴 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 당신이 옮겨가시면 이 글을 수일 안에 다른사람들이 볼수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신 후

다섯 살이던 저와 세 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봄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지금까지도 제 가슴속에 아픈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도시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와 친척들 간에  언성을 높이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친척들은 사는게 힘들어서 도와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새 신을 신겨주며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친척들 누구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 없는 집에도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푼 도와 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친척들께 약속하신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 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 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소풍에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 이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애미 없다고 손가락 질 받는 손자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 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더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앉았다 하면 신세 한탄이 먼저 나오고

불쌍한 손자들 얘기를 풀어 놓으며 

눈물을 훔치시기 바빴지만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1주일에 한번 장으로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순대를 한 봉지씩 사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치셨지만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 다 장에 내다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 집에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 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스물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워서 버릇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춘기의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우리 남매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할머니가 

손자들을 떠맡은 죄로 불쌍하게 사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 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왜 이걸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느 놨는디,

날짜 지나서 못 먹으먼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할머니를 가엾다고안쓰럽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에 가득하던 빵과 우유를 내다 버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제가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자취하는 제게 김치와 쌀을 갖다 주시겠다고 올라오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할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아침 7시 차 타구 나왔더만

10시두 안돼 도착허더라

3시간은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그릇 먹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 한 구석이 아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게 내가 아침 드시고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안 했어

할머니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할머니는 화가 난 손녀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통 두 개가

들어 있었고가방 안은 김치 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 국물로 한 가득이었습니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미치겠네

김치만 비닐봉지에 꼭 싸서 가져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 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할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워쩌까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겄다

내가 언능 수퍼가서 봉다리 얻어 올팅께 지달려라?”

 

할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 통을 봉지 안에 넣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짐치 안 먹구 사나

노인네가 버스 안에서 김치 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안절부절 하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할머니는

김치 전해줬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시며

들고 오신 가방 안쪽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 꼬깃 접은 1만 원 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1만 원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저는 

얼른 매표소로 뛰어가 할머니 차표를 

끊어다 드리고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습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 안에서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1만 원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와 장으로 구경도 나가고명절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도 사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사이다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런 것이먼 몇 접시라두 먹겄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 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날 하얗게 서리 내린 할머니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 거, 맛있다고 하는 거

한 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손녀딸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고 죽으먼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디.”

 

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로 팔순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우리 남매를 길러 내셨던 할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 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예전처럼 맛있는 문주를 부쳐 주시지도

못하고, 개떡을 쪄 주지도 못하고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밥에 올려 먹던 할머니의 얼짠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지도 못합니다

같이 봄나물을 뜯으러 다닐 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하면,

낡고 닳아 헤진 

고무신 한 짝이 떠오릅니다

헌 고무신처럼 평생을 마음껏 가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꽃으로 태어났으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이제부터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꽃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오래 전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유년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웃어 보고 싶습니다.

 

-펌 글-


가슴을 울린 편지 한통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8년입니다.
신혼 때부터 남편은 밖으로만 돌았고
툭하면 온몸에 멍이 들도록 나를 두들겨 팼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던 남편은 언제부턴가
자꾸 숟가락을 놓치고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정도가 심해져 진찰해 보니
"소뇌 위축 증" 으로 운동능력 상실,
시력 장애에 이어 끝내 사망에 이른다는
불치병 이었습니다.

병수발을 하면서 생계를 잇기 위하여
방이 딸린 가게를 얻었습니다.

남편의 몸은 쇠약해지고 점점 굳어만 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남편에게 좋다는 약과 건강식품,
갖고싶은 물건을 사오라고 고집을 부려 내속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8년을 앓다 "미안하다’는 “수고했다”는
“잘 살아라”는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큰애가 군에 가던 날은 남편이 더 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가게 된 군 입대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건강할 때는 술만 먹고, 아파서는 약 값과 병원비에,
죽어서는 아플 때 진 빚 갚느라 아들 등록금도
못내고 평생 짐만 주고 간 남편과 "영혼 이혼"
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작은아이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집을 팔고 청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짐을 싸고 덜챙긴 물건이 없나 살피다가 버리려고
모아둔 책을 뒤적였습니다.

그 사이에 눈물 인지 침인지 얼룩진 누런 종이에
쓰인 글을 발견했습니다.


“애들 엄마에게,..."

당신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남편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를 보살펴 주어 고맙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날마다 하고 싶었지만
당신이 나를 용서 할까 봐서 말을 못 했다오.
난 당신에게 미움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 같구려.

“여보, 사랑하오!”

“날 끝까지 용서하지 마오.”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때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겠소.”
“여보...!! 정 말 정 말 사랑하오.”

손에 힘이 없어 삐뚤빼뚤 하게 쓴 남편의 편지를
보는 내 얼굴에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여태껏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슴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창밖을 보니 어느 듯
어두운 밤 귀뚜라미 처량하게 우는소리....먼 곳에서
개 짓는 소리만 간간히 들여옵니다.

“여보...!! 보고 싶군요...”

 

- 풍차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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