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어느 농촌에 노 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공기 좋고, 인심 좋고…
노 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서울 사는
아들 내외 자랑, 공주같이 예쁜
손녀 자랑 하면서 아주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일찍
서울로 유학보내고, 두 부부는
고생 고생하며 학비를 조달하여 대학 졸업시키고……….

지금은 재벌회사 과장까지 승진하여
강남 아파트에서 명문대학 나온
우아한 아내와 잘 살고 있는 아들은,
정말이지 이 부부에겐 크나큰
자랑이었답니다.

아들은 여간 효자가 아니어서
추석이나 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와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곤 했었답니다.

우아한 며느리와 공주같은 손녀 딸을 볼 때마다
노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으쓱대는 기분을 느끼곤 하였지요.
아들 내외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버님 어머님
시골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아니다. 우리같은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서울이 다 무에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고향땅에 묻힐란다"
하고 사양했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부부는 언젠가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 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노 부부중 할멈이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상을 치르는 내내 아들 내외가 어찌나 애통하게 엉엉우는지
동네 사람들도 모두 가슴이 찡하였답니다.
초상을 치르고 나자 아들 내외는
또다시 간곡하게 청하였답니다.

"아버님, 이제 어머님도 가시었으니 어쩌시렵니까?
고향집 정리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저희와 함께 사시도록 하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할멈도 떠나간 이제, 그도 그럴것이다 싶어
노인은 몇날을 생각타가
결심을 하였답니다.
논밭과 야산등…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답니다.
가산을 정리한 돈은 아들 내외에게 주어
32평아파트에서 42평 아파트로
옮기고…, 노인의 서울생활은 처음엔

그런대로 평안하였답니다.

그즈음 아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도 되었고,
회사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였으므로 매일을 새벽에
출근하였다가 밤12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일과가 몇 달이고 계속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집안이
썰렁하니 비어 있더래요. 다들 어디 갔나?
하던 차에 식탁위에 있는
아내의 메모를 보았더래요.

메모에..
- 여보 우린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요.
식사 안하고 퇴근하였다면
전기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뒤져 반찬 찾아 드세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속을 뒤져
맥주를 찾아서 마시고 있자니
현관쪽이 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 그런데 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 왜 둘만이지?
- 둘만이라니? 요기 밍키도 있잖아?
아내는 강아지를 남편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 아니, 아버지는?
- 오잉? 아버님 집에 안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 아버지께서는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나?
남편이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 응, 으응… 아내는 더듬거렸습니다.

사실 아내는 평소에 노인이
몇시에 나가서 몇시에 들어오는지 도통
생각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노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노인이 들어오실 때까지 자지않고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나 봅니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켠에 정성들여
접혀진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듯이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습니다.

…….. - 잘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자정도 넘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노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잠깁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 시간까지
아버지가 귀가 안 하신걸 보면
가출하신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은데...
한데…왜,왜,왜…???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평소에 햇볕이 잘 드는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정 넘은 오밤중이긴
하지만 왠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습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빨랫줄에는 양말 세컬레, 팬티 두장과
런닝셔츠 두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것이겠지요.
방 한켠에는 어린 딸의 옷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이제 그만
지겨워한다고 옷장을 더 예쁜 것으로 바꿔주고 나서
아마 이 헌 옷장을
아버지 몫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옷장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얼굴입니다. 상 치를 때 영정으로 사용하던 사진입니다.

방구석에 소반이 있었습니다.
소반 위에는 멸치 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 김치등 뚜껑있는 보시기가 몇개 있었고 마시다가 반병 정도
남아있는 소주병이 있었습니다.

아아~~, 아버지…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계셨던가요?

아아~~, 아버지…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을 손수빨고 이 방에서 손수 말리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고 싶은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나 노인이 어디선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있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가서는
노인의 가출을 신고하였습니다.
고향의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3번아 잘있거라 6번은 간다….

이 암호를 우선 풀어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아들은
조바심을 쳤습니다.
직장동료, 상사…대학동창 등….
현명하다는 사람은 다 찾아 이 암호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암호를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이제 부장진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없고…
오로지 아버지
생각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술한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 자네 김아무개 영감 자제가 아니던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 아, 예…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 웅, 난 김영감 친굴세…
군데 요즘 왜 김영감이 안뵈네?
그리구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좋은가?

그래서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님에게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한 그 암호문을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쪽지를 한동안 보더니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 흐으, 자네 이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다구?
이사람아, 김영감이
늘 얘기하곤 했지….
우리집에서는 며느리가 젤 위고 두번째는 손녀딸이고 3번이
아들이라고 했지 4번은 강아지 밍키고…5번은 가정부라 했네.
그리고 김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 하고는
한숨짓곤 하였지…..
글케 쉬운것도 자네는 풀지 못하나? 에잉…

아흐흐흐흑…아들은 그만 눈물을 주루루룩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6번입니까…. 1번, 아니 0번 이지요…
돌아서는 아들의
등 뒤로 영감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 고향엔 면목없고 창피해서 아니 가셨을 거여….
집 근처에도 없을 거고…
내일부터 서울역 지하철부터 찾아보자구…
내 함께 가줌세.....

어느 며느리의 심경 고백

신랑이 늦둥이라
저와 나이차가 50 년 넘게 나시는 어머님..
저 시집오고 5 년만에 치매에 걸리셔서
저혼자 4 년간 똥오줌 받아내고,잘 씻지도 못하고,
딸내미 얼굴도 못보고, 매일 환자식 먹고,
간이침대에 쪼그려 잠들고,
4 년간 남편품에 단 한번도 잠들지 못했고,
힘이 없으셔서 변을 못누실땐
제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거의 매일이었지만 안힘들다고,
평생 이짓 해도 좋으니 살아만 계시라고
할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이 멀쩡하셨던
그 5년간 베풀어주신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나이 33살 먹도록 그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제가 10살때 집나가서 소식없는 엄마..
상습절도로 경찰서 들락날락 하던 오빠..
그밑에서 매일 맞고..울며 자란 저를
무슨 공주님인줄 착각하는 신랑과
신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 글썽이며 한시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다고
2천만원짜리 통장을 내어주시며,
어디 나라에서는 남의집 귀한딸 데리고 올때
소팔고 집팔아 지참금 주고 데려 온다는데
부족하지만 받으라고...


 
그돈으로 하고싶은 혼수,
사고싶은거 사서 시집오라 하셨던 어머님...
부모 정 모르고 큰 저는 그런 어머님께 반해,
신랑이 독립해 살고있던 아파트 일부러 처분하고
어머님댁 들어가서 셋이 살게 되었습니다.

신랑 10살도 되기 전에 과부 되어,
자식 다섯을 키우시면서도 평생을 자식들에게조차
언성 한번 높이신 적이 없다는 어머님...
50 넘은 아주버님께서
평생 어머니 화내시는걸 본적이 없다 하시네요.



바쁜 명절날 돕진 못할망정
튀김 위에 설탕병을 깨트려 튀김도 다 망치고
병도 깬 저에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아무소리 말고 있거라" 하시고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며
당신이 손에 힘이 없어 놓쳤다고 하시던 어머님...

단거 몸에 안좋다고 초콜렛 쩝쩝 먹고있는
제 등짝을 때리시면서도 나갔다 들어오실땐
군것질거리 꼭 사들고 "공주야~ 엄마 왔다~"
하시던 어머님..



어머님과 신랑과 저. 셋이 삼겹살에 소주 마시다
셋다 술이 과했는지 안하던 속마음 얘기 하다가,
자라온 서러움이 너무 많았던 저는
시어머니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을 했는데,,,

그런 황당한 며느리를 혼내긴 커녕
제 손을 잡으며, 저보다 더 서럽게 우시며,
얼마나 서러웠노,, 얼마나 무서웠노..
처음부터 니가 내딸로 태어났음 오죽 좋았겠나,,
내가 더 잘해줄테니 이제 잊어라..잊어라...
하시던 어머님...



명절이나 손님 맞을때 상차린거 치우려면
"아직 다 안먹었다 방에 가있어라"하시곤
소리 안나게 살금 살금 그릇 치우고
설겆이 하시려다 저에게 들켜 서로 니가 왜 하니,
어머님이 왜 하세요 실랑이 하게 됐었죠...

제가 무슨 그리 귀한 몸이라고..
일 시키기 그저 아까우셔서 벌벌 떠시던 어머님.
치매에 걸려 본인 이름도 나이도 모르시면서도
험한 말씨 한번 안쓰시고
그저 곱고 귀여운 어린 아이가 되신 어머님...




어느날 저에게 " 아이고 이쁘네~
뉘집 딸이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저 웃으면서
"나는 정순X여사님(시어머님 함자십니다)딸이지요~
할머니는 딸 있어요~?" 했더니 "있지~~
서미X(제이름)이 우리 막내딸~ 위로
아들 둘이랑 딸 서이도 있다~"
그때서야 펑펑 울며 깨달았습니다.

이분 마음속엔 제가,
딸같은 며느리가 아니라
막내시누 다음으로 또 하나 낳은 딸이었다는걸...
저에게... "니가 내 제일 아픈 손가락이다"
하시던 말씀이 진짜였다는걸...

 

 
정신 있으실때, 어머님께 저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하고 잘하려 노력은 했지만
제가 정말 이분을 진짜 엄마로 여기고 대했는지...
왜 더 잘하지 못했는지,
왜 사랑하고 고맙단 말을
매일 매일 해드리진 못했는지..
형편 어렵고 애가 셋이라
병원에 얼굴도 안비치던 형님..
형님이 돌보신다 해도 사양하고
제가 했어야 당연한 일인데,
왜 엄한 형님을 미워했는지..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무치고
후회되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밤 11시쯤,,
소변보셨나 확인 하려고 이불속에 손 넣는데
갑자기 제 손에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 주시더군요.
"이게 뭐에요?" 했더니 소근소근 귓속말로
"아침에~ 옆에 할매 가고 침대밑에 있드라~
아무도 몰래 니 맛있는거 사묵어래이~"
하시는데 생각해보니
점심때쯤 큰아주버님도 왔다 가셨고,
첫째, 둘째 시누도 다녀갔고 남편도 퇴근해서
"할머니~ 잘 있으셨어요~?"
(자식들 몰라보셔서 언젠가부터 그리 부릅니다)
인사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침 7시에
퇴원한 할머니가 떨어트린 돈을 주으시곤
당신 자식들에겐 안주시고
갖고 계시다가 저에게 주신거였어요.
그리곤 그날 새벽
화장실 다녀왔다 느낌이 이상해
어머님 코에 손을 대보니 돌아가셨더군요....

장례 치르는 동안 제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제가
울다 울다 졸도를 세번 하고 누워있느라
어머님 가시는 길에도 게으름을 피웠네요...

어머님을 닮아 시집살이가 뭔지
구경도 안시킨 시아주버님과 시누이 셋.
그리고 남편과 저..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 위로하며,
어머님 안슬퍼하시게
우리 우애좋게 잘살자 약속하며
그렇게 어머님 보내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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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꼭 시어머님 가신지 150일 째입니다..
어머님께서 매일 저 좋아하는 초콜렛,
사탕을 사들고 오시던 까만 비닐봉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까만 비닐봉지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이 주신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를
배게 밑에 넣어두고..
매일 어머님 꿈에 나오시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해드리려 준비하며 잠듭니다.

다시 태어나면
처음부터 어머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부디 저희 어머님 좋은곳으로 가시길..
다음 생에는 평생 고생 안하고
평생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살으시길 기도 해주세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글 입니다

 


어느 노부부의 처절한 인생

 

오늘하루도  헹복하세요

*어느 노부부의 처절한 인생*

 

우리 부부는 조그마한 만두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손님 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우리 만두 가게에 나타나는 겁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지만 비가 온다거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 곤 합니다.

 

두 노인은 별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생각난 듯

상대방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슬픈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고이기도 했습니다.

대체 저 두 분은 어떤 사이일까?

나는 만두를 빚고 있는 아내에게 속삭였습니다.

글쎄요. 부부 아닐까?


부부가 뭐 때문에 변두리 만두 가게에서

몰래 만나요?

허긴 부부라면 저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진

않겠지.부부 같진 않아.” 혹시 첫사랑이 아닐까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서로 열렬히 사랑했는데

주위의 반대에 부딪혀 본의 아니게 헤어졌다.

그런데 몇 십 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 서로에 게 가는

마음은 옛날 그대로인데 서로 가정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한단 말이지?

아주 소설을 써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아내의

상상이 맞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따뜻한 눈빛이 두

노인이 아주 특별한 관계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근데, 저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에요?

안색이 지난 번 보다 아주 못하신데요?

아내 역시 두 노인한테 쏠리는 관심이 어쩔 수 없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먹거렸습니다.

두 노인은 만두를 그대로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돈을 지불하고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나갔습니다.


나는 두 노인이 거리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병아리 감싸 듯 감싸 안고 가는 할아버지.

두 노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체 어떤 관계일까?

아내 말대로 첫사랑일까?


사람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니까

그럴 수도있겠지.

어머? 비가 오네. 여보, 빨리 솥뚜껑 닫아요.

그러나 나는 솥뚜껑 닫을 생각보다는

두 노인의 걱정이

앞섰습니다. 우산도 없을 텐데…

다음 주 수요일에 오면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볼 생각이었습니다.

</p>

그런데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 만두 가게에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처음엔 몹시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노인에 대한 생각이 묵은 사진첩에 낡은 사진처럼

빛바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사람인가 봅니다. 자기와 관계없는

일은 금방 잊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수요일 날,

정확히 3시에 할아버지가 나타난 겁니다.

 

좀 마르고 초췌해 보였지만 영락없이

그 할아버지였습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조금 웃어보였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못 와. 하늘나라에 갔어. 하는 겁니다.

나와 아내는 들고 있던 만두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랬습니다.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너무 안타까워서.

두 분은 부부인데 할아버지는 수원의 큰 아들 집에,

할머니는 목동의 작은 아들 집에 사셨답니다.


두 분이 싸우셨나요?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며느리들끼리 싸웠답니다.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나만 부모를 모실 수가 없다”

고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공평하게 양쪽 집에서

할아버지,할머니를 한 분씩 모시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 만난 거랍니다.그러다가 할머니가 먼저 돌아

가셨답니다.이제 나만 죽으면 돼. 우리는

또 다시 천국에선 같이 살 수 있겠지..

할아버지는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습니다.

할아버지 뺨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습니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에 글

 

우리 어머님들은 자식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요???? 

 

우리 어머니는 한쪽 눈이 없다

난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너무 밉고 쪽팔리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시장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셨다.

그냥 나물이나 초나 여러 가지 닥치는 대로 캐서 파셨다.

난 그런 어머니가 너무 창피했다.

초등학교 어느 날이었다.

운동회때 엄마가 학교로 오셨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네에 엄마는 한쪽 눈이 없는 병신이냐고 놀림을 받았다.

놀림거리였던 엄마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엄마는 왜 한쪽 눈이 없어?

진짜 창피해 죽겠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해서인지 속은 후련했다.

엄마가 나를 혼내지 않으셔서 그런지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엄마가 숨을 죽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한그말 때문에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도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나는 커서 성공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한쪽 눈 없는 엄마도 싫고 이렇게 가난한 게 너무도 싫었기 때문에

나는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엄마 곁을 떠나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를 해서 당당히 서울대를 합격했다.

 결혼도 했다. 내 집도 생겼다. 아이도 생겼다.

이제 나는 가정을 꾸며 행복하게 산다.

 여기서는 엄마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좋았다.

이 행복이 깊어 갈 때쯤 이었다.

 누구야; 이런 그건 우리 엄마였다.

여전히 한쪽 눈이 없는 채로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어린 딸아이는 무서워서 도망갔다

그리고 아내는 누구냐고 물었다.

결혼하기전 부인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데 우리 집에 와서 우리아이를 울리냐고 소리를 쳤다.

 

당장 나가요! 꺼지라고요!그러자 엄마는 죄송합니다.

제가 집을 잘못 찾아 왔나봐요

이 말을 하곤 묵묵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역시 날 몰라보시는 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신경 쓰지 말고 살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 젓다.

어느날 동창회 한다는 안내문이 집으로 날아왔다.

그 때문에 회사에 출장을 간다다는 핑계를 대고

부인한테는 거짖말을 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동창회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려는데 궁금한 마음에 집에 가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쓰러저 계셨다 그러나 나는 눈물 한방울 나지 않았다

엄마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건 나에게 주려던 편지였다.

 

사랑하는 내 아들 보아라! 엄마는 이제 살만큼 산것 같구나

그리고 이제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을게

그러니 네가 가끔씩 찾아와 주면 안되겠니?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엄마는 동창회 때문에 니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기뻤단다.

 하지만 학교에찾아 가지 않기로 했어 너를 생각해서

그리고 한쪽 눈이 없어서 정말로 너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렸을 때 네가 교통사고가 나서 한쪽눈을 잃엇단다

 나는 너를 그냥 볼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눈을 주었단다.

그 눈으로 엄마대신 세상을 하나더...봐주는 거가 너무 기특 했단다

 난 너를 한번도 미워한 적이 없단다.

 

니가 나에게 가끔씩 짜증 냈던건 날 사랑해서 그런 기라 엄마는 생각 했단다

 아들아 내 아들아 어미가 먼저 갔다고 울면 안된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갑자기 할수 없는게 내마음 한쪽을 조여 왔다

 어머니가 주신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엄마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못해드리고

 좋은 음식 못 사 드리고 좋은 옷 입혀 드리지 못했는데

 어머니께선 날 !! 죄송합니다!

엄마가 눈 병신이 아닌 제 눈이

이제야 모른 사실을 안 이 못난놈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껏 한 번도 들려 드리지 못한 말...........


어느 노인의 유언장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힘써 일하였지만,
이제는 자기 몸조차 가누기가 힘든 노인이었다.
그런데도 장성한 두아들은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노인은 목수를 찾아가 나무 궤짝 하나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가져와 
그 안에 유리 조각을 가득 채우고 튼실한 자물쇠를 채웠다.
그 후 아들들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버지의침상 밑에 못 보던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이 그것이 무어냐고물으면 노인은 별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궁금해진 아들들은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그것을 조사해보려 하였지만,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은 그 안에서 금속들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는것이었다.
아들들은 생각하였다.
'그래! 이건 아버지가평생 모아 놓은 금은보화일거야.'
아들들은 그때부터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노인은 죽었고, 아들들은 드디어 그 궤짝을 열어 보았다.
깨진 유리 조각만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아들은 화를 내었다.
".. 당했군!" 
그리고궤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 쳤다.
"왜? 궤짝이 탐나냐?  그럼, 네가 가져라!" 
막내아들은 형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적막한 시간이 흘렀다.
1분, 2분, 3분.
 아들의 눈에 맺힌 이슬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막내아들은 그 궤짝을 집으로 옮겨왔다.

나뭇가지가 조용하려 해도 바람이 쉬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옛글을 생각하며, 아버지가 남긴 유품 하나만이라도
간직하는것이 그나마 마지막 효도라 생각한 것이다.
아내는 구질구질한 물건을 왜 집에 들이느냐며,짜증을 냈다.
그는아내와 타협을 했다.
유리 조각은 버리고 궤짝만 갖고있기로.. 
궤짝을 비우고 나니, 밑바닥에 편지지한 장이 들어 있었다.
막내아들은 그것을 읽다가  꺼억꺼억 소리내어 울기시작했다.
나이 마흔을 넘긴 사나이의 통곡 소리에 그의 아내가 달려왔다.
아들딸도 달려왔다. 그글은 이러하였다.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기뻐서 울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좋아서 웃었다.
그때부터, 삼십여 년 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나를 울게 하였고, 또웃게 하였다.
이제 나는 늙었다. 그리고 그들은 달라졌다.
나를 기뻐서 울게 하지도 않고, 
좋아서 웃게 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처음엔 진주같았던 기억.중간엔 내 등뼈를 휘게 한기억.
지금은 사금파리 유리 조각 같은 기억.
아아, 
내 아들들만은..  나 같지 않기를..
그들의 늘그막이 나 같지 않기를..  
아내와 아들딸도 그 글을 읽었다.
"아버지!"하고 소리치며 아들딸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내도그의 손을 잡았다. 네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들 집안에서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한다.
 

밝은 웃음소리와 사랑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행복한 가정...

소중하게 되돌아보는 하루가 되시길요~ 사랑합니다~^&^

 

 


눈물바다가된 결혼반지                             

           
  
♣ 눈물바다가된 결혼반지 ♣ 

나는 아버지가 쉰 되던 해 태어났습니다.
말 그대로 늦둥이인 나를 부모님은 
끔찍히도 아끼셨습니다.
"어이구 이놈 커서 장가갈 때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하지만 다 늙어 얻은 아들 업어주랴 안아주랴, 
논밭에 엎드려 허리 휘도록 일하랴, 
늘 허덕이던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차례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때부터 늦둥이 뒷바라지는 큰형님 
내외의 차지가 되버렸습니다.
큰형 내외는 시장모퉁이에 있는 손바닥만한 
가게에서 야채를 팔고 꽁보리밥과 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나를 대학공부까지 시키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징교로 입대한 나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함께 큰형님 내외를 찾아갔습니다.
"나한테는 부모님 같은 분들이야. 
인사 드려" 어렵게 공부를 시켰으니 
이제 조카들 등록금쯤은 책임져야 
마땅할 동생이 결혼을 하겠다니 
실망이 크셨을 테지만, 두 분은 사랑에 
눈이 먼 동생의 앞길을 그저 축하해 주셨습니다.
전방근무중이라 이런저런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맞이한 결혼식날.
큰형님 내외와 전투복을 입은 채 
달려온 전우들의 축복 속에 식이 시작되고 
굳은 서약의 징표로 반지를 나눠 낀 뒤, 
주례사가 이어졌습니다.
"예, 방금 신랑신부가 나눠 낀 사랑의 반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동생을 훌륭하게 키워낸 
큰형님 부부의 결혼반지를 녹여서 만든 것입니다"
가난한 시동생을 위해 어버이보다 더 깊은 
사랑을 베푼 형과 형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동안,
결혼식장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눈물을 삼키며 결심했습니다.
결혼반지를 녹여 다시 굳혀낸 
형님과 형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죽어도 죽어도 잊지 않겠다고말입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중에서-
<html 제작 김현피터>
움직이는 아이콘 예쁜라인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Richard Clayderman-가을의 속삭임  ♬ 
 


               

 

시련을 겪지 않고는 고통을 모른다 



시련을 겪지 않고는 고통을 모른다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고
기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때,
너무 암담해서 차라리 삶을 외면하고 싶던 순간들...
이 모든 일들이 이젠 
우리의 추억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나간 과거속에서의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들이
지금도 여전히 아프고 힘들고 괴롭습니까?
 
그 아픔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 삶이 더욱 소중하고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예방주사는 더 나은 건강을 위해 일시적인 고통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지나간 흔적이 비록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의 향기는 아마 덜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혹독한 주변 환경과 추위의 시련을 견뎌낸 꽃만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것처럼 비록 삐뚤삐뚤 그려진 내 인생의 흔적이지만 그 질곡진 경험으로 인해 삶의 폭넓은 이해와 나만의 인생관과 삶의 바탕을 이루지 않았을까요? 내가 힘든 시기를 겪어 봤기 때문에 남이 힘든것도 이해하게 되고 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병상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함께 느낄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모릅니다
평탄한 삶만을 살아 왔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굴곡없는 삶이 차라리 후회되지 않을까 싶네요 누가 뭐라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탄하고 행복한 삶도 우리가 바라는 삶중의 하나겠지만 시련도 겪고 아픔도 겪어 한층 성숙해진 사람만이 인생의 짙은 향기를 발할수 있다구요 인생의 진정한 승자는 보란듯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니고 성공해서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니까요 <좋은 글 중에서>


어느며느리의 사모곡                            

           


     어느 며느리 사모곡

      

    어버이날
    5월 8일이 일요일이었지요
    시어머니 떠나신후 첫 어버이날 입니다


    어머님!
    목메이게 불러봐도 대답은 없으시지만

    저희는 어머님 어버이날을 기다렸답니다
    동서 조카 그리고 우리아이 아범 모두가

    어버이날이 모처럼 일요일이라 어머님을 찾았답니다
    어머님 묘역엔 파란 잔듸가 푸르르게 덮혀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생전에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생크림과자

    과일 그리고 카네이션 한다발을 안고 이렇게 묘역을
    찾아와서 큰절 올립니다

    그리고 생전에 좋아하시던 어버이 은혜노래를 모두
    몇번이고 합창해 불렀습니다


    어머님!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하시던대로

    "어서 가거라 안와도 되는데 무었하러왔느냐?"
    "나 괜찮다 나 잘있어 바쁜데 어서 가거라"

    며느리 손주놈들을 오래오래 잡고싶은 어머니 마음이실텐데

    그 마음 접어두시고 "어서가거라!" 하셨을텐데---
    어머님곁에 오면 저희들은 이승에서 생전에 주신 따뜻하신
    사랑을 지금도 뼈속깊이 느낀답니다


    어머님!
    이제 봄도 지나 여름 문턱 입니다

    이번 여름 가고 날씨 선선한 가을에
    국화꽃을 한아름 안고 오겠습니다

    다음에 올땐 식구 모두 군대간 손자놈이랑 찾아와서
    하루내 어머님과 놀다가 가겠습니다


    어머님!
    지금 우리가 돌아가면

    자식들 뒷모습이 안보일때까지 배웅하고 계실
    어머님 모습이 선합니다
    어머님 다시 올때까지 평안히 계십시오

    어머님 안녕히 계십시요


    2016년 5월8일 어버이날에 며느리 올립니다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중에서>



저는 33살 먹은 주부에요..

 

♣33세 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저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 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적에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 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 있었는데, 
지나 가던 트럭에 (큰트럭 말고 중간 크기트럭) 
받힐 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막노동) 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 하고도 26살때 쯤 까지 놀고

먹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가 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 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서 괴로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 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 할때 집 장만 해 주신다고 
파시고 지금 전세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 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서 버는데
한달에 150만원 정도 벌어 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 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 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 하는데... 
그래서 넉달 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을 모셔 왔습니다..

첨에 아버님은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 하시더라구요..
늙은이가 가 봐야 짐만 되고
눈치 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 왔습니다..
모셔온 첫 날부터 여러 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 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 반찬이나 맛있는 거 해서 
드리면 안 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를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를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 하시면 바로 들고 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마시라고 몇번 말씀 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이 못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 쓰고 모아 
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 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 쯤 들어 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 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나가시면서 다녀 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 그래요..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 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시면서 돈 버셨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녀도 
안 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없더군요..
저녁 5시 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 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러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며칠 전 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 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 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 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 
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 웃으실 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 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 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 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 하다며
손 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 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 
하시는 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을 첨 만져 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박힌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 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 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 낸 후

세 명이 모여서 조촐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는 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 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 들어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
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 하실 까봐

케이블 TV도 신청했구요 ...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 하시는 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 드리는데...

보기 보다 정말 왜소 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 질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 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 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을 정말

친아버지 처럼 생각하고 모신 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 처럼 생각 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제 눈치 안 보셔도 돼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 잖아요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 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 다시 그렇게 일 안 하셔도 되요...
저 허리띠 쫄라 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와 대통령 이야기           

※ 언제나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와 대통령 이야기

 

에이브라함 링컨이야기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고 있는

에이브라함 링컨(1809~1865)은 미국의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종종 부상 당한 병사

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한 번은 의사들이 심한 부상을 입고 거의

죽음 직전에 한 젊은 병사들에게

링컨을 안내했습니다 링컨은 병사의

침상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겠소?
그 병사는

링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께 편지 한 통만 써 주시겠어요?

펜과 종이가 준비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정성스럽게 젊은이가 말하는

내용을 적어 내려 갔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던

중에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회복되지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을 맞춰 주시구요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기를 빌겠어요

병사는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젊은이 대신 편지 말미에

서명을 하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 에이브라함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젊은 병사는 그 편지를 자기에게

좀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편지를 대신 써 준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병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이신가요?
링컨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내가 대통령이오
그런 다음 링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는가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병사가 말했습니다

제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실내에서 키가 크고 수척한

링컨 대통령은 청년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둘 때까지 그에게 따뜻한

용기의 말들을 나지막이 들려 주었습니다
이 일화는

더 베스트 오브 비츠 앤 피이시즈에

소개된 내용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가져다 주는

동시에 훈훈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부상당한 병사들이 입원한  병원을 자주 방문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기다가

대통령이 직접 환자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도와주편안히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최후의 순간까지 손을 잡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인간적인 모습은

정말 훌륭한 일이며 부럽기까지 합니다
지도자의 인간적인

훌륭함에 존경심을 갖게합니다
링컨 대통령의 훌륭함을

가슴깊이 다시한번 깨우치게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언제나 함께하는 모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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