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기독영화, 영상

       



예수영화라 하면,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멜 깁슨의 <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던지, 크리스토퍼 스펜서의 <선오브갓>을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신학을 전공을 해서 그런지, '예수영화'라하면 바로 보게 되는데,  위의 두 작품 말고도 다양한 예수 영화가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니코즈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에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상영금지됐던 작품인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혹받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그 마지막 유혹은 신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유혹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의 성관계 묘사가 있는데, 이 부분이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천사의 유혹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장면도 개신교가 갖고 있는 구원관에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에르 파졸브 파졸리니의 <마태복음>



피에르 파졸브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을 촬영할 때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배우로 컨텍한다. 오히려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더욱 마태복음의 느낌을 잘 재현하고 있다. 파졸리니는 호텔에서 교황의 행진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불평이 많았다. 남는 시간에 호텔 서랍에 있는 성경을 우연히 펼치게 됐는데, 마태복음을 읽게 된거다. 그는 마태복음에 감명을 받아 자신이 느낀 그대로 영화에 옮긴다. 성서가 말하는 그대로를 옮겨서 오히려 더욱 성서적인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파졸리니는 동성애자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예수영화들을 열거한 이유는 다른 예수 영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영화 《부활》이 기존의 예수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예수가 브라운계열의 드라이를 한 단발 머리를 하면서

젠틀하고 깔끔한 스웨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첫번째. 더불어 예수의 생애가 중심되지 않고, 로마인이 중심이 되어 로마인의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려나간다는 점이 다른 예수영화와는 다르다. 이러므로 관객은 동시에 외부인이 되어 한 사람의 개종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선 오브 갓 中 내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예수영화


영화 자체는 지루함이 없지 않아 있다. 기존 예수영화와는 다른 예수영화이지만 예수의 생애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 영화가 이해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수를 죽이라는 명령을 한 빌라도의 모습을 자기성찰적인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논란이 많은 각색이랄까?


사회구조상 관료제에 속해 있는 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히만이 수많은 생명을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학살했던 것처럼 말이다.


본 영화는 예수영화에서 제 3자의 관점을 사용한 부분에 있어서 신선하지만,  선교학적 구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좋은 반응은 없을 것 같다.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부활 후 갈릴리에서 한센인을 예수가 고치는 장면인데, 마을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는 한센인 곁으로 예수가 찾아가 먹을 양식과 함께 위로를 한다.


낫기를 원하느냐?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리고 한센인은 떠나는데, 딱! 여기까지만 보여줬으면 보는 이에게 더욱 큰 의미가 됐을 거다. 그러나 한센병이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예수에게만 국한되게 된다. 이 영화는 여기서 한계성과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결국에 영화가 말하는 것은 식상하다. 평화와 안식을 좇아 노력은 끊임없는 불안과 죄악만 들추게 되고, 예수를 좇는 노력은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예수의 모습을 개신교의 선교적 프레임에 가둬놓는 것 같아서 아쉽다.




(이 밑으로는 역사를 재현하려는 시도에 대한 지적입니다.)

 

선교학적 구조와 창녀 막달라 마리아에 관하여


로마의 호문관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조사하다가 부활한 예수를 경험한 뒤, 예수공동체와 함께 머물다가 결국 예수가 승천한 후, 그의 제자가 되어 다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정확히 선교적 목적을 갖고 있는 영화다. 본 영화의 주인공인 호민관 클라비우스도 이런 구조 속에서 개종하게 된다.


 

본 영화는 최대한 역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싶어하는데, 성서에는 예수의 생애를 다룬 네개의 복음서가 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인데, 네 복음서는 각자 다른 관점으로, 다른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쓰여진 책이어서 역사적인 예수의 생애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에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상상의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니까 이 부분은 넘어가자.



그러나 내제가 넘기고 싶지 않은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해 인데, 막달라 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귀신이 들렸다는 이미지로인한 남성편향적 이미지(성적인 죄)를 갖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이미지로 부활을 첫번째로 목격한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보도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막달라가 오해를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편견이다.


부활을 목격했느냐가 초기 그리스도공동체에서는 사도의 권위로 인정받는 조건 중에 하나였다. 초대 교황이라 불리는 베드로는 첫번째로 목격한 사도가 아니다. 첫번째가 무엇이 중요하느냐라는 말이 있을 수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기 때문에 중요했다. 그렇기에 사도의 권위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막달라의 사도적 권위에 따르는 공동체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길 원했고, 막달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던 간에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극상시켜야 했고, 막달라를 낮춰야 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막달라의 자리가 성모 마리아로 종종 교체되었다.

(협성대 양재훈 교수님의 논문을 참고)


이 여파로 인해 막달라 추종자들은 후에 이단으로 몰리게 되고, 마리아는 창녀라는 이미지로 오해되게 된다. 성서에 비중이 없는 성모 마리아가 갑자기 권위있는 자리로 올라오고,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한 여인으로 포장된다.


본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 묘사되고 있고, 심지어 웃음거리로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다. 부활에 눈이 멀어 그리스도의 신부라 불리던 제자를 영화는 창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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