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어떻게 성지가 되었나?
2023.07.21 / 김용두 기자
예루살렘전경
서쪽벽의 유대인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은 예루살렘이다.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이다.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곳이며 하나님의 도성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장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루살렘은 성지가 되었을까?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성지일까? 아니면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들도 예루살렘을 성지로서 여길까? 여기에 대한 답은 모든 종교는 아니지만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성지가 예루살렘이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해가 가지만 왜 이슬람은 이곳을 성지로 삼고 있을까? 세 개의 종교가 성지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은 복잡하고 얽혀 있는 역사가 존재한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한번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이르(도시)와 살렘(평화)이 합쳐진 말이다. 즉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이 최초로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4장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높은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를 살렘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살렘이라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여부스 성읍이다. 기브아 땅의 성읍 중 가장 큰 성이었다. 이 성읍은 이후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된다. 사무엘하 5장에는 다윗이 시온산성, 여부스 사람들의 성을 탈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은 이 성읍을 탈취한 후에 다윗의 도시라 칭하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면서 하나님의 도성으로 불린다. 다윗은 실로의 성막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솔로몬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 도시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읍은 폐허가 되었다. 누구도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B.C.5세기경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귀환하여 작게나마 성읍을 보수하였고 성전도 작게 다시 지었다. 

 이후 수많은 제국들이 지나쳐 가며 예루살렘을 거쳐 갔지만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헤롯대왕을 통해서 예루살렘은 다시금 그 영광을 보이는 듯 했다. 헤롯이 지은 커다란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되고 로마의 통치로 인해서 이곳은 평화의 도시로서 되돌아 간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워 진다. A.D.70년 예루살렘 성은 불타게 되고 성전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구시가지 다메섹문앞
 

그 후 A.D.132년에 일어난 바르코크바 유대 항쟁으로 인해서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A.D.136년 모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이름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뀌게 되면서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이후에 다시금 등장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된 4세기 경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인 아브드 알마리크는 유대인들의 성전 자리에 지금의 바위의 돔(황금돔사원)을 세우게 된다. 이 자리는 무하마드 선지자가 승천한 자리라고 한다. 14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황제인 술레이만 대제는 꿈을 꾸게 되고 지금의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읍을 완성한다. 이후 이 성읍 안은 19세기 초반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아르메니안의 4개 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대인들은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예루살렘으로 이주가 허락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4번의 전쟁 가운데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을 통해서 온전히 예루살렘 탈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그리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이슬람 종교의 중심으로서 굳건히 서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으로 알려진 시온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로서 지금도 굳건히 서 있다. 

 평화의 성읍이라는 이 성읍이 그 평화로움을 가져본 적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미디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시위와 테러 이야기를 한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이지만 평화로움은 코로나 때만 잠깐이었던 것 같다.

 감람산 자락에 올라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곳에서 그의 왕 되심이 선포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김요셉 목사
김명준 선교사(말레이시아)

정글 속 원주민(오랑 아슬리)을 향한 복음 열정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에서 주의 역사 기대
순복음의 중보 기억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찬양

샬롬! 말레이시아의 샤론순복음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명준 선교사입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대략 6시간에서 7시간 거리에 있는 나라입니다. 최근 한국에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말레이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 반도와 동쪽에 위치한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크게 이루어져 있고 한반도의 1.8배의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는 동남아 특유의 고온 다습한 기후에 건기 우기로 나누어집니다. 고무 원목 주석 석유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만 상대적으로 인구는 3200만 명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 속도는 빨라 지난 20년간 4배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또 해상교통의 요지인 말라카 해역을 끼고 있는 지리학적 특성 때문에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구 구성이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오랑 아슬리로 통칭되는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입니다.

지리적인 장점과 다양한 인구 구성으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국가 중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슬람을 국교로 삼고 있는 선교 제한 국가입니다. 인구의 70% 이상이 무슬림으로 태어나 무슬림으로 살다가 죽으며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마이카드’(Mykad)에 이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바꿀 수가 없습니다. 경제 성장을 이룬 덕택에 보이는 환경은 좋지만 보이지 않은 영적인 환경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주민 선교에 대한 사명을 주셔서 정글에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말레이시아 원주민(오랑 아슬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토착민이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향한 복음의 길을 열어주셔서 제게 주신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역하는 가운데 권총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교회에 들어온 강도가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던 때도 있었으며 정글 한가운데서 폭우를 만나 휩쓸릴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말레이시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3월부터 정부의 강력한 전면 통제가 시행되면서 사람들이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주셨고 교회를 가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아멘’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모두가 어렵지만 예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선교지의 필요한 부분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원주민 마을마다 구호품을 전달할 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원주민들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세상은 뉴노멀 시대의 도래를 외치고 현지에서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의 예배와 모임에 외국인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고 법적인 제재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오늘도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무엇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이 모든 것을 홀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멀리 한국에 있는 조용기 원로목사님, 이영훈 담임목사님 그리고 순복음 성도님의 중보 기도와 후원의 동역을 알기에 매순간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사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더욱 주만 의지하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중보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복이 날마다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22. 요나의 예언과 니느웨 멸망-­I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 말씀 선포한 유일한 예언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 3:10~4:1)

요나는 전통적인 개념의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았고(호 1:2~3), 이사야는 3년 동안 맨발과 벗은 몸으로 이스라엘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사 20:2~3). 그러나 요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났다.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선포했으나 재앙이 내리지 않자 하나님께 화를 내기도 했다(욘 4:1).

요나는 특별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유일한 예언자이며 바울의 선교가 시작되기 무려 800여 년 전에 선교 여행을 떠났던 구약시대에 활동한 선교사였다.

 

1. 요나와 앗시리아

 

여로보암 2세는 41년 동안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앗시리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왕이었고 요나는 이 시기에 활동한 북왕국 예언자이다(왕하 14:23~25).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했는데 여로보암 2세의 재임 기간을 B.C. 793~753년으로 본다면 북왕국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기 30~50년 전에 요나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했다고 볼 수 있다.

여로보암 2세 때 앗시리아가 잠시 근동에서의 세력이 약해졌던 틈을 타 북왕국의 영토 일부를 회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앗시리아는 북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예후 왕 때부터 조공을 바쳐야 했던 최대의 적군이었다. 북왕국은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요나에게 앗시리아는 마치 구한말 우리나라를 서서히 침탈하다 결국 식민지화한 일제와 같았을 것이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씀은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1) 욥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바에서 배를 탔다(욘1:3). 욥바의 현재 지명은 텔아비브(Tel Aviv)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유엔의 허가를 받아 독립을 했을 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토에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텔아비브를 수도로 정했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1967년 3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고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나 아직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헌법상의 수도일 뿐 국제법상의 수도가 아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55㎞ 정도 떨어져 있는 고대 근동에서부터 발달해 온 역사적 장소이다. 성경에서도 욥바는 다양한 시대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욥바는 솔로몬의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고 특별히 성전 건축의 주재료가 된 백향목이 운송되어 오던 곳이다(대하 2:16).

솔로몬이 두로 왕 후람에게 받은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백향목을 옮기는 짐꾼만 7만 명에 이르렀고, 8만 명은 산에서 벌목을 했으며 3600명에게 일을 감독하게 했다(대하 2:18). 물론 이렇게 많은 백향목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만 쓰인 것은 아니다. 13년 동안 솔로몬 성을 건축할 때 들어간 재료도 포함되어 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스룹바벨의 제2성전이 건축될 때 다시 한 번 욥바 항구를 통해 운반되어 왔다(스 3:7). 그러나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신약시대에 욥바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닥친 박해를 피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8:1).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교 거점들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이다. 안디옥교회는 초대 교회의 선교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욥바가 사마리아 지역과 함께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병에 걸려 죽었던 여(女)제자 다비다(도르가)를 살리기도 했다(행 9:36~40).

또한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환상을 보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성령을 받게 했다(행 10:6~45).

 

2) 다시스(Tarshish)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욘 1:2) 욥바에서 니느웨가 아닌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Tarshish)를 향하는 배를 탔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을 말하는데 유대 성서학자들은 스페인 남부 타르테소스(Tartessos)를 성경에서 말하는 다시스로 보고 있다. B.C. 700년 이전부터 아프리카 대륙과 근접해 있는 스페인 남부에는 켈트(Celtic), 이베로(Ibero) 등과 같은 다양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타르테소스는 스페인의 고대 원주민이 살던 지역들 중의 하나였지만 주석 은 동 철과 같은 광물이 풍부했고 고대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과 관계 무역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최초로 배에 돛을 달아 항해를 한 것은 B.C. 35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나 원시적인 모습이었고 요나의 시대만 해도 완전한 범선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풍력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노예들이 노를 저어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시스는 그 당시 조선술과 항해술로 이스라엘에서 갈 수 있는 최장 거리의 상징이었다.

이사야 66장 19절, 시편 72편 10절에서 다시스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서쪽 끝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다시스와 이스라엘의 관계 무역은 솔로몬 왕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열왕기상 10장 22절에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한 번씩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스와의 무역은 분열 왕국 시대에도 이어졌다. 여호사밧은 오빌의 금을 취하기 위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새롭게 만들어 출항했으나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한 사건도 있었다(왕상 22:48). 요나가 욥바에 정박해 있던 여러 배들 중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감)

박종화 선교사(대만)

대만 선교 통해 '선교 대만' 이루는 게 비전

 

복음화율 점차 높아지지만 아직 우상숭배 강해
순복음의 영성으로 건강한 교회 세우도록 간구


할렐루야! 순복음가족신문을 통해 선교지 소식을 나누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대만 타이난에서 타이난순복음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종화 선교사입니다. 대만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남한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섬나라로 이전에 사역했던 해발 3000m 이상 되는 중국 내지의 티베트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만은 포모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이 '아름다운 섬'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하지만 50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이 아름다운 섬에 '구이다오'(귀신의 섬)란 오명이 더해졌습니다. 낮은 임금과 높은 집값, 비합리적인 정치 사회 문화를 빗댄 말이며 종교적으로 많은 우상이 있음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대만은 한국교회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님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영향과 해외 유학파 중 예수님을 믿은 이들로 인해 복음화율(5%)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신앙이 미지근하고 주일에만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우상숭배와 가정파탄, 경제 불안 등의 영향으로 우울증환자 동성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만 복음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불교, 도교 같은 전통 종교뿐만 아니라 조상의 위패, 재물신 등의 사당을 차려놓고 복을 구하는 다신교적 사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신론의 특징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며 타인에 대하여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고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만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믿는 자가 적은 이유는 종교의 흔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다수의 대만인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많은 신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만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지극히 불편한 종교입니다. 사원은 아무 때나 갈 수 있지만 교회는 정한 시간을 맞추어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역을 뒤로 하고 대만에 온지 11개월, 사역 초기이다 보니 사실 열매라고 하기 보다는 대만을 알아가고 이곳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은혜와 도전이 있었습니다.

전도를 위해 몇 번 만난 가정에 작년 12월 오토바이 사고가 났는데 병원으로 급히 달려가 보니 엄마는 뇌를 크게 다쳤고 앞에 타고 있던 딸은 얼굴의 3분의 1이 찢어졌으며 뒤에 타고 있던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은 현장에서 사망한 큰 사고였습니다. 엄마는 뇌수술 후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했지만 중보자들과 성도들의 기도로 4일 만에 의식이 돌아와 지금은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회복 중입니다. 이 일로 남편과 함께 예수님을 믿고 신앙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대만에서 어떠한 자세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성도 중 우울증으로 오랜 고통 가운데 있었던 한 자매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었던 자매는 주일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많아진 모기를 잡기 위해 전기용품을 사러 갔다가 한 가정을 전도하고 모기도 없어지는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회와 주일예배,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말씀에 뿌리를 내려 믿음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타이난순복음교회의 비전은 건강한 교회를 세워 이 땅의 젊은이들, 특히 헌신자들을 양육해 '대만 선교(대만 복음화)를 통해 선교 대만(대만이 선교하는 나라가 되도록)'을 이루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써 성령이 충만해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가 일어나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말과 지혜로 전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자가 낫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랫동안 영적인 눈이 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우상을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4차원의 영성으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능력 있게 전하도록 함께 손 모아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7. 바울의 유언 : 마가와 바울 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바나바와 함께한 마가, 실라와 동행한 바울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1. 버가에서의 뒷걸음

버가는 소아시아 남쪽에 위치한 밤빌리아 지역의 고대 도시 중 하나이다. 버가의 현재 지명은 터키 남부지역에 위치한 무르타나(Murtana)이다. 버가에 대한 잘못 알려진 것중 하나는 항구도시라는 오해이다.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지나 도착한 첫 소아시아 도시라는 것 때문에 항구도시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버가는 해안에서 약 17㎞ 정도 떨어진 내륙 도시이다. 1차 선교 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곳을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다(행 13:13~14). 그리고 선교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도 버가를 거쳐서 돌아갔다(행 14:25).

바울의 선교는 로마 빌립보 에베소 등과 같이 대도시 중심의 선교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정뿐만 아니라 교통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고고학자들에게 버가는 유적들로 가득한 행복한 보물찾기 장소이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보존이 잘 된 방사형 노천극장 아스펜도스(Aspendos)와 투기장이 있다. 아스펜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A.D. 161~180) 때 지어진 것으로 부분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여 질만큼 잘 보존이 되어 있다. 그 외 1만 2000명의 관객을 수용하고 길이 234m 너비 34m의 경기장에서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던 안틱스 스타디온(Antikes Stadion)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가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두 번이나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지만 로마인들을 위한 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온 몸을 찢기며 믿음을 지켰던 초대 교인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또 다른 오해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계 1:11; 2:12) 버가모교회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중 버가에서 세운 교회라는 오해이다. 버가모의 현재명은 베르가마(Bergama/Pergamon)이다. 버가와는 약 620㎞ 정도 떨어져 있다. 버가모는 해발 3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버가모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사탄의 권좌'를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이로 인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순교를 감당해야 했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순교자 안디바의 순교가 이곳에서 일어났다(계 2:13). 요한계시록 2장 14~15절은 버가모교회의 책망으로 교회 내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킨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한 부류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황제숭배 등과 같은 방만한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로마인들 사이의 인사말은 '황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였다. 상대방에게 이 말을 들으면 똑같은 말로 화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초대교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니골라 당은 이들에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쳤다. 그 중 핵심 내용은 육체로 짓는 모든 죄는 구원의 문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니골라 당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나 성적인 타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교회 내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찍어 내지 못해 책망 받은 두 교회가 있는데 에베소교회(계 2:1~6)와 버가모교회(계 2:12~16)이다.

2.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어떤 이유에서 마가가 버가에서 선교여행을 중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행 13:13). 그러나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보면 이 결정은 지극히 마가의 개인적인 이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떠나…돌아가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코레사스'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리를 버리고 떠나다'의 의미인 '아포코레오'라는 단어에서 왔다. 누군가에게 자기의 일을 맡기고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던져버리고 떠났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은 이런 마가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마가의 행위를 배신행위로 간주했던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가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행 15:38). 바나바는 이 일로 바울과 심하게 다투었다(행 15:39).

바나바의 인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며 많은 무리가 바나바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었다(행 11:24). 바나바는 레위족속 사람이었고 유대식 이름은 요셉이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행 4:36).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돌봤고 구제와 헌신에 앞장섰던 사람이다(행 4:37). 또한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사람이다(행 9:27). 심지어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가 부흥하자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사역을 했다(행 11:24~26). 그랬던 그가 바울과 심한 논쟁을 하고 결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이다(행 15:39~40).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을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록쉬스모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 15장 39절과 히브리서 10장 24절에 두 번만 등장한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격려'로 번역되었지만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신랄한 반대, 말다툼'(sharp disagreement / sharp contention)으로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행 15:37~41). 이후 바나바의 이름과 행적은 더 이상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바나바를 언급하며 사역자로서의 바나바를 인정하며 서로 교제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 9:6; 갈 2:1,9,13; 골 4:10).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오재웅 선교사(필리핀)

급속 성장한 앙헬레스 복음화 위해 복음의 씨 뿌려

 

 

찾아가는 예배로 절대긍정 절대신앙 강조
앙겔레스(순)교회 전도 및 구제 사역 최선

할렐루야! 사랑하는 순복음 모든 성도님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저는 필리핀 앙헬레스에서 선교하고 있는 오재웅 선교사입니다. 제가 필리핀 앙헬레스로 파송 받은 것은 지난 2008년 5월이었습니다. '선교사'라는 단어는 저를 설레게 함과 동시에 언제나 저를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합니다.

성도님들과 교회로부터 선교사로서의 수고와 칭찬을 받지만 이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선교'라는 말이 언제나 저를 낮아지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을 경험하고 또 기대하게 합니다.

제가 사역하는 앙헬레스는 점점 성장 발전해 가는 도시입니다. 마닐라 북쪽으로 약 1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의 작은 도시로 2007년에 제가 처음 필리핀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이곳은 참 소박하고 순박한 이들이 이웃으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의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앙헬레스에 인접한 '클락' 지역이 개발되면서 이곳도 점점 빠르게 변화하는 중입니다. 갑작스러운 부동산 개발과 또 넘쳐나는 외국인 투자자들로 동네는 어느새 도시가 되었고 골목은 도로가 되어 차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9년 필리핀의 경제성장률은 약 6.7%라고 합니다.

그러나 앙헬레스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도시(Sin City), 앙헬레스'입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술집이 집결해 있고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곳 그리고 이를 쫓아 세상적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 바로 앙헬레스입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범죄의 유혹과 피해는 고스란히 이곳 주민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2016년에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선포한 범죄, 특히 마약과의 전쟁으로 현재 필리핀은 많은 마약 사범이 체포 혹은 사살되었지만 여전히 앙헬레스는 유혹이 많은 도시이기에 범죄의 소식이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앞에서 한국인이 괴한의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또 빌리지에서 경비를 하던 우리 교회 성도가 중국인 갱단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우리 교회는 더는 수요예배도 저녁 금요기도회도 하지 못하게 되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그러나 앙겔레스순복음교회는 이때부터 지·구역예배와 심방을 강화하면서 모이지 못하는 성도들을 찾아가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영훈 위임목사님의 말씀대로 위기 가운데서도 더욱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는 '절대긍정'과 '절대믿음'으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며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로 성장해 가는 중입니다.

앙겔레스순복음교회는 또 갑작스러운 도시 성장으로 갈 곳을 잃은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집을 잃은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는 등 이웃에게 꿈과 희망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유익에 따라 교회에 나오는 이들 때문에 아픔을 경험할 때도 있지만 선교사는 힘든 일과 버거운 사명일지라도 순종과 믿음으로 걸어가면 결국 일은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필리핀은 인구의 약 85%가 가톨릭 신자이며 개신교가 약 8% 그리고 무슬림과 기타 종교가 약 7%를 차지합니다. 기독교가 8%라고 해도 그 안에는 이단이 포함돼 있어 순수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1억 명이 넘는 전체 인구 중에 3%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때 필리핀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이 넘쳐날 것을 믿습니다.

앙겔레스순복음교회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또 절대긍정과 절대믿음의 신앙으로 필리핀을 변화시켜 나갈 것을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순종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순복음의 성도들이 되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김성국 선교사(레바논)

 

시리아 난민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키웁니다

인구 5백만 명의 경기도 크기의 작은 나라
‘중동의 파리’ 불렸지만 지금은 경제 위기로 최악
센터 사역으로 시리아 난민에게 복음전파 자립 도와


할렐루야! 레바논에서 인사드립니다. 레바논은 지중해변에 위치해 있고 북과 동으로는 시리아와 남쪽으로는 이스라엘과 경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기도만한 크기에 약 500만 명이 살고 있는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레바논은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하고 겨울에 눈 덮인 산이 있어서 ‘중동의 알프스’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나라는 많이 피폐해졌고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대량 유입과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경제위기로 나라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이 발생한 지 벌써 만 9년이 지났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이제는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정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2015년 복음주의문화센터를 만들어 지금까지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센터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을 제공합니다.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을 유치반 초등반 청소년반으로 나눠 기본적인 교과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은 금요성경학교로 신앙교육을 실시하고 아이들은 찬양을 하고 성경을 배웁니다.

또한 청소년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각종 은사와 재능을 개발하고 여성들은 성경공부와 천연비누 만드는 법을 배웁니다. 자칫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는 이들이지만 이러한 수업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청년들과 아버지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시작해 이들이 복음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활동이 적어진 것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주 2회 드리던 예배를 온라인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수업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매주 하루씩 돌아가면서 센터에 나오고 있습니다. 센터에 속한 가족들을 모두 7개 소그룹(구역)으로 나눠 SNS상에서 매일 아침 2시간씩 묵상을 나눕니다.

여성들은 비누와 면마스크를 만들어 주변 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외부 기관의 협력으로 100개 가정의 시리아 난민들에게 긴급 식량도 나눠주고 있습니다. 센터가 시리아 난민들에게 복음과 떡을 나눠주는 통로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계십니다.

레바논은 최근 더욱 깊은 암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코로나19와 경제악화에 이어 환율의 급등으로 공식 환율은 5배로 뛰어 올라 금융위기까지 겹쳤고 현지인들의 월급은 기존의 5분의 1이 줄었습니다. 대신 물가는 2~3배가 뛰었습니다. 정부와 정치인들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면서 도로를 강제로 막고 타이어를 태우고 있습니다. 이제 휘발유와 밀가루(빵)의 가격을 잡지 못하면 언제 서민들이 도로에 뛰쳐나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염려되는 것은 시리아 난민들입니다. 코로나19의 위협적 상황에서 사회경제적인 혼란이 겹치면 어쨌든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가난한 난민들입니다.

저희 센터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이 주님을 영접한 후 경제 자립 공동체로 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에게는 집과 땅과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이들과 같이 살다보니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비전과 약속이 필요합니다.

전쟁으로 모든 소유를 잃고 실향민이 됐지만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오히려 더 큰 축복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중동지역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발판으로 사용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새로운 땅을 보여주시고 안정적으로 주를 예배할 공간과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 및 건물이 생겨나길 기도합니다. 레바논의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만이 반석되심을 믿고 믿음의 가족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보해 주십시오.

청소년, 청년 제자훈련을 통해 난민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또한 난민들에게 전하는 복음방송을 직접 제작하고 송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5.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 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과 다윗의 축복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야훼께 복을 받을지어다"(삼하 2:5)

세찬 바람에 곧 쓰러질 듯 몸을 숙이던 갈대는 잔잔해진 바람에 사군자 마냥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어느 방향인지 묻지도 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떨군다. 권력 앞에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요동친다.

사울의 죽음 이후 대세는 이미 다윗에게 기울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다투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죽임을 당한 아말렉 청년도 있었다(삼하 1:10~15). 그러나 사울의 처참했던 시체를 수습하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장 5절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울의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사울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칭찬과 축복의 말이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에게 괜한 오해와 미움을 살 수 있었음에도 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 끔찍했던 사울의 죽음

사울 왕의 등극은 이스라엘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뜻을 따라 나라의 대소사들을 결정하던 신권정치제(神權政治制, theocracy)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에 입각한 원시 군주제(君主制, monarchy)로 전환된 것이다. 사울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지냈다. 불안한 왕권을 가지고 시작했지만(삼상 10:26~27)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삼상 11:11~15).

사울은 자기의 고향인 기브아(Gibeah)를 이스라엘의 초대 수도로 정하고 모압 암몬 에돔 블레셋 아말렉 등과 같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국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물론, 사울 왕이 이방 민족들을 다 섬멸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사울 왕은 그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군사력을 동원해 다윗을 제거하고자 쫓아다니는 데 허비했다.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죽음 또한 비참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울의 죽음은 단순히 전쟁 중에 자살로 끝난 것은 아니다.

사무엘상 31장 9절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튿날 전리품을 취하려 전장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삼상 31:8~9) 죽은 사울의 목을 잘라 블레셋 여러 지방으로 보냈다. 사울의 머리는 조롱거리와 승전의 상징으로 블레셋 여러 지방을 떠돌다 돌아와 다곤 신전에 매달렸다(대상 10:10). 그의 갑옷은 블레셋의 다산과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의 집(신당)에 진열되었다(삼상 31:10). 그의 시체는 목이 없는 채로 벧산 성벽에 그의 세 아들 시신과 함께 못 박혀 걸려 있었다(삼상 31:10~12).

2. 길르앗 거민과 사울의 인연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 주민과의 관계는 사울의 재임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갖지 못했다. 여러 명의 사사에 의해 국지적으로 다스려졌고 대부분 지파의 장들이 책임을 지는 지방분권적 체제였다. 길르앗 야베스는 갈렙 자손들이 점령한 땅이었다(대상 2:50~55).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지만 아직 중앙집권적 통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은 암몬 족속의 왕인 나하스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그를 섬기고자 했다(삼상 11:1). 하지만 나하스는 화친의 조건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는 것을 제시했다(삼상 11:2).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협박에 그치지 않고 종종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런 암몬 족속의 위협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선택은 궁색함 그 자체였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나하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삼상 11:3).이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들었던 시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삼상 11:5). 이미 사무엘상 10장에서 왕으로 공포되었던(삼상 10:24) 사울이 소를 몰고 있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정체제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아가 암몬 족속들을 전멸시켰다(삼상 11:11). 이것이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입었던 은혜였다.

 

 

3.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의로운 선택

40년 후 블레셋 진영의 벧산 성벽에 사울의 시신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수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가지고 왔다(삼상 31:12).

'밤새도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벧산은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약 20㎞ 떨어진 지역으로 밤길을 아주 빠르게 5시간 이상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밤을 선택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은 매장이었다. 율법은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화장(火葬, cremation)을 허용하고 있었다(레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화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삼상 31:12) 그만큼 시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의 장막 밖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가져다가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사울에 대한 예를 다했다(삼상 31:13).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사울의 죽음에 대해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의로운 선택이었다.

다윗은 이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유골을 사울의 가족묘가 있던 베냐민 땅 셀라에 이장함으로써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장례를 완성했다(삼하 21:12~14).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3. 고스비 사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영적·육체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8)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도 발굴 중인 여리고성은 그 규모와 구조에서 철옹성(鐵甕城)이라고 할만하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리고성은 인간적으로 볼 때 좌절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리고성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사의 첫 패배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도 만만해 보였던 아이성 전투에서 일어났다(수 7:2~7).

여리고성을 빼앗았던 환희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큰 슬픔으로 바뀌었다.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언약을 지키지 않았던 유다지파 갈미의 아들 아간 때문에 일어났다(수 7:1).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민족 전체가 위험에 빠진 사건은 광야 생활 중에도 여러 번 발생했다. 그중에 한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민 25:18).


1. 고스비 사건의 배경

고스비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 싯딤은 '아카시아 언덕'이라는 뜻으로 요단강에서 동편으로 11㎞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족장시대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을 무찌르고 재물을 약탈했던 곳이다. 이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갔던 곳이기도 하다(창 14:8~12).

가나안의 문턱이었기에 모세가 마지막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며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민 27:12~22).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과 매우 근접해 있었기에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던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자 이것을 막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영적 타락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자멸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


2. 고스비 사건과 이스라엘의 영적인 자멸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가데스바네아의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40여 년 전에 했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정탐꾼을 보내기도 했고 이것저것 재보고 미루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싯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 '음행하다'의 히브리어 '리즈노트'는 '창기같이 행동하다'(신 22:21),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창 38:24) 등으로 쓰였지만 단순히 육체적인 간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세속에 물들어가는 영적인 간음을 내포한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압 외에도 미디안 족속과의 음행으로 이어졌다.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스비 사건의 고스비는 모압 족속이 아닌 미디안 족속의 여자였다(민 25:15).

 

3. 바알브올의 집단적 타락과 영적 각성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알브올은 '바알을 섬기는 브올'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 모두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바알 신당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이곳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제의 중의 하나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음행이 이루어졌다.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알브올에서 음행을 행했던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가담했다'로 번역된 '차마드'는 재귀형(Niphal)으로 쓰여 '자기 스스로 묶다' '스스로를 연결하다'(KJV, joined himself)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거하면서 스스로 바알브올로 찾아가 음란에 빠지고 바알을 섬겼다는 의미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명령하신다(민 25:4). 이스라엘 백성의 수장들도 바알브올에서 행했던 음란과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민수기 25장 15절은 고스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고스비는 바알성전에서 음란을 행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미디안 가문 중의 수령의 딸이었다. 바알브올의 음행이 미디안 귀족들에게도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의 장들은 미디안의 귀족들과 어울려 음란과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다. 이런 바알브올의 우상숭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염병으로 2만 4000명이 죽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민 25:9).

그런데 어느 날 시므온 지파의 수장이었던 시므리(민 25:14)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고스비를 이스라엘 회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민 25:6).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시므리의 막사로 들어가 한 번에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 죽였다(민 25:7~8).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고 있던 염병이 그쳤다(민 25:8). 이 일로 미디안 족속과 이스라엘은 화합할 수 없는 숙적 관계가 되었다.

가나안 입성 후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확할 때가 되면 아말렉 족속과 연합해 모든 곡식을 약탈해 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동굴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런 약탈이 7년 동안 이어졌으며(삿 6:1) 미디안 족속으로 인한 궁핍함이 극에 달했다(삿 6:7). 하지만 미디안의 압제는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로 일단락됐으며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장명준 선교사(파라과이)

“성령과 동행하는 교회와 예배가 사역 핵심입니다”
교민 및 현지인 교회 등 5개 교회 통해 전도 구제 헌신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리며 중남미에 위치한 파라과이의 델 에스떼 소식을 전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파라과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19로 인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모든 모임(교회 예배 포함)과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했고 국경도 봉쇄했습니다.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서는 한인 및 제자교회 현지인 모든 성도들이 새벽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가정에서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라과이는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실시간 방송이 어렵고 또 인터넷 영상매체 사용이 어려운 성도들이 많아 교회에서는 주보와 설교문을 문서와 녹음파일로 만들어 각 가정에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남미순복음델에스떼교회의 사역을 지면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파라과이 델 에스떼는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접한 지역으로 인근에 세계적인 관광지 이과수폭포가 있습니다. 델 에스떼는 상권 특화지역으로 브라질 상인들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쇼핑센터와 각종 도매업체들이 즐비합니다.

 특히 브라질과는 특별한 제재 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며 ‘우정의 다리’를 통해 수많은 브라질과 파라과이 사람들이 오고가는데 코로나로 이 다리가 처음으로 폐쇄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무역이 활발해 파라과이의 경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델 에스떼에서 우리는 한인 교회와 3개의 파라과이 현지인 교회 그리고 1개의 인디헤나 교회 등 총 5개 교회와 브라질 인디헤나 공동체 마을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 기본은 ‘성령을 의지하는 교회와 예배’로 한인을 비롯해 현지인 부교역자들과 교회 리더들은 모두 예배 중심의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인교회의 열심을 본받아 현지인 제자교회도 새벽 예배를 열심히 드리며 섬김 구제 선교 가르침 등을 쉼 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남미순복음델에스떼교회 성도들은 금식과 기도로 한해를 시작합니다. 한인 성도들은 교회에서 신년 금식 축복성회를 드리고 현지인들은 수양관에서 지교회 청소년 연합 집회를 개최합니다. 이어 고난주간에는 모든 성도들이 전체 연합 수련회를 갖는데 이때는 저녁마다 성령대망회를 열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합니다. 부활절에는 약 500여 명의 성도들이 연합예배로 모여 사명을 재확인하고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파라과이는 6, 7월이 겨울로 최저 기온이 섭씨 2~3℃까지 내려갑니다. 평균 30℃, 한여름에는 40℃를 웃도는 파라과이에서는 겨울을 대비한 난방 시설이 전혀 없어 겨울이 되면 가끔씩 얼어 죽는 노숙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겨울이 되면 구제금을 모아 델 에스떼 지역의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 행사를 진행하는데 해마다 600여 가정에 옷 신발 이불 그리고 식료품을 나누어 줍니다.

지난해 10월에는 교회 비전센터 체육관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동시에 수익금의 전액을 선교와 구제금으로 사용하기 위한 코리안 페스티벌을 진행했습니다. 교회에 인접한 브라질의 포스 두 이과수(Foz do Iguacu), 파라과이의 시우다드 델 에스떼(Ciudad del Este) 지역 1000여 명의 한인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한국의 문화 음식 그리고 케이팝(K-pop)댄스 경연대회로 교제를 나눴는데 이 때 참석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은 한인 및 현지인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축된 교회 부설기관 비전센터를 통해 다양한 사역을 진행하거나 예정하고 있습니다. 한인 장년층을 위한 치매 교육과 뜨개질, 취미활동, 운동 그리고 한인 학생들을 위한 예체능 수업을 개설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현지인들을 위해서는 직업 훈련학교를 진행하며 현지인 교회학교 부흥을 위해 교육 및 자료 제공, 구제와 선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사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계획하는 학교 보건소 직업학교 사역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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