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예배~추모예배

   

추도예배

[교회용어 바로 알기] 추도예배 기사의 사진
기독교는 각 나라의 전통, 문화, 관습, 토착 종교 등과 충돌하기도 하고 융화되기도 했다. 이를 토착화 과정이라고 한다. 비기독교 문화권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거부감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훼손되기도 했다. 양날의 검과 같은 토착화의 영향은 한국 기독교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른 종교와의 충돌이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효를 바탕으로 한 조상숭배 사상이었다.

어떤 것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과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제사문제의 충돌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던 참혹했던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기ㅁ독교는 토착화의 문제로 제사나 장례문화와 끝나지 않은 갈등을 빚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입관·하관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통령을 지냈던 장로님이 돌아가신 후 49일째 되던 날에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는 49재 추도예배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온 어두운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49재(齋)’라는 말을 쓸 때 제사(祭祀) 의미인 ‘49제(祭)’를 쓰지 않고 ‘49재(齋)’라고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불교에서 제사는 죽은 사람의 넋이나 영적인 존재에게 음식을 바치는 행위이지만, 재(齋)는 공양을 드리는 종교의식이다. 이 의식을 49일째 되는 날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이 다음 생을 받기까지 49일이 걸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배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만약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49재 추도예배나 돌아가신 성도들을 위해 1년마다 가정에서 드리는 추도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추도예배 대신 쓸 수 있는 말은 ‘추모예식(追慕禮式)’이다. 추도(追悼)는 돌아가신 분을 사모하고 애도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추모(追慕)는 돌아가신 분, 혹은 멀리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추모예식 또는 추모식(追慕式)은 돌아가신 분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는 개식사와 함께 신앙고백, 찬송, 성경 말씀을 읽는 것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어 돌아가신 분의 믿음을 이어받아 믿음의 가정을 이뤄나가겠다고 다짐하는 폐식사로 추모예식을 마칠 수 있다.





 

{장례설교}나그네 인생 (히 11:13-16)


출처/한성진목사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시간에 “인생은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라 하니까 옛날 한 동안 유행했던 노래가 생각이 나지요? 최희준의 나그네라는 노래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란 두지 말라.” 잘 아시는 노래죠? 이 노래는 유행가이면서도 찬송가 같은 유행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도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즉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고, 대단히 중요한 것을 지적해 주는데요. 그것은 사람들이 나그네 인생이면서도 나그네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 인생이니까 나그네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나그네와 같이 삽니까?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땅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13절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그 땅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묘지로 쓸 막벨라 굴 말고는 사놓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세상에 너무 미련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욕심, 세상 집착, 세상을 너무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기 힘들어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믿음도 이 땅, 소망도 이 땅, 사랑도 이 땅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크게 실망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늘 본향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였을까요? 유프라테스 강 건너 갈데아 우르,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본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갈데아 우르 역시 나그네길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참된 본향,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항상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고 말씀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연어가 필사적으로 폭포를 타고 올라가듯 그런 천국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은 천국에 보물을 쌓았습니다.


16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구절 속에 천국에 쌓았다는 말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성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에서 그가 천국에 쌓았다는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얼마나 부자입니까? 이것이 신기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천국에다 쌓으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물론 이 땅에서 백 배 천 배로 거두게 하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살면서 너무 쥐지만 말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늘 투자하세요. 그것이 땅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마6:19-20에 예수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나그네로 사는 것이 인생을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에 집착하지 마시고 항상 천국의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해서 아브라함처럼 하늘의 부자도 되시고 땅의 부자도 되시기 바랍니다.




   
         

추도식 순서

 

 

 지금으로부터 고 000님의 00주기 추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신앙고백         --------------------------------------         다  같  이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음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겠습니다.


찬    송           -----   230 장(저 뵈는 본향집)    ----------          다  같  이


기    도           --------------------------------------          인  도  자 


성경봉독         --------      히브리서11:13-16      --------          다  같  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말   씀          ------------  우리의 본향은   --------------         인  도  자


      인간은 이 땅 위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피 있다. 하지만 나그네라도
    앞으로 돌아갈 본항이 있을 때 고 나그네는 미미 나그네가 아닌 것이다.
1 . 나그네 인생 .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실아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아무 미련없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갔다. 우리 역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도 신앙의 선진들과
   같이 예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거리낌없이 갈 수 있어야 겠다.
2,  본향을 사모하는 이 .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돌아갈 고창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을 향괘 나아갔다. 성도들의 본향은 어디인가?
   그곳은 하나님께서  우리를위하여 예비하시고 축복하시고 약속하신 신령한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이다.  그곳은 이 땅에서 간절히 사모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곳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이 성을 사모했기 때문에 비록 그들 앞에 고난이라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그것을 과감히 감내하고 전진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가 사모하는 그곳은 하늘 나라이다. 그곳은 눈물, 사망. 고통이 없는 사랑과
   회락과 화평이 언제나 넘치는 곳이다.하나님의 백성은 약속된 천국이 있으므로
   그곳을 사모하여 충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

 

찬    송           --------  293 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        다  같  이


주기도문         -----------------------------------------        다  같  이
                          주기도문을 드리므로 추도식을 마치겠습니다.


수고의 집을 벗고 /김병화목사                           

** 입관예배 설교

제목: 수고의 집을 벗고

성구: 마 11:28

1.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짐을 지고 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짐을 지고 어떤 사람은 작은 짐을 지지만 누구나 짐을 지는 수고로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도, 태생이 출중하고 천성이 훌륭해도 어쩔 수 없는 수고로움의 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각자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그 무게를 버거워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든 발걸음을 옳기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짐을 지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이 무거운 짐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느냐가 그 사람의 품격과 지위를 나타냅니다. 이웃집이나 친척들의 초대를 받으면 편한 옷차림에 과일이나 한 바구니 준비해 가면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옷차림부터 달라집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나, 맘에 드는 옷이 없다면 당장 백화점으로 달려가 멋진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단장하고 초청받은 장소로 들어가세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대통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초대한 자리에는 멋진 옷도 필요 없습니다.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그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믿음의 초대장을 준비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초대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세상은 그 어느 곳도 쉴만한 것이 없습니다. 휴가가 되고 방학이 되어 산으로 들로 가보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고로운 일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으나 벗어놓고 쉴만한 곳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6:33을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은 어려움과 수고로움으로 우리에게 참 쉼을 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신 곳에는 참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에서 비로소 우리는 수고의 짐을 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 000성도께서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 더 이상은 수고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초대되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관에 누인 시신과 소의를 걸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영혼은 믿음의 초대장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거기서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우리고 계실 것입니다.

이 입관식이 끝나면 더 이상 고 000성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 기쁨의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고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입관예배의 시간은 육체의 이별이 아쉬운 슬픔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의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시는 유족과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모/새 하늘과땅에서 만나는 날까지 21:1~4

 

찬송: 새찬송가 491저높은(543), 488이몸에(539)

추도식사: 오늘은 어머니의 5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어머니를 추모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묵도: 고린도전서15:12~14 신앙도백: 사도신경

찬송: 301 지금까지(460) 기도: 가족

성경봉독: 계시록21:1~4(다같이)

제목: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나는 날까지

 

오늘우리는 어머님이신 고 양순덕 집사님의 5주기 추모의 날을 맞이하여

고인을 추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바쁜 생활가운데도 이렇게 함께해준 가족 모두에게

먼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머님은 우리 곁에 계셨을 때,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 사람으로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살아생전에 고인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살고자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그가 얼마 동안 예수를 믿었느냐?

그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느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고인은 지금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땅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예비하신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사랑하는 고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의 믿음의 열심과 중심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고난과 염려근심,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족들을 위하여 참고 견뎌야만 했던 인내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도

고인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기 전까지도 몸이 불편하여도 병원에 입원한번 하지 않으시고,

어머님을 붙잡아주시는 하나님, 어머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도했고, 하늘나라를 열망했습니다.

불편하신 몸으로도 육신의 아픔이나 고통쯤은 기도로 견디시며 자녀들을 생각하시고

당신이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다 해주지 못한 가슴에 응어리져있는 한을 주님께 기도로 부탁하시는

기도를 하시며 불편하시고 연로하신 가운데서도 매 주말이면 성전을 찾아 강대상청소를 하시며

주님께 헌신의 본을 보이시고 당신의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남들에게 추한모습 보이지 않게 해주시라는, 기도를 하시며 육신의 고통이 찾아와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어머님이 끝까지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어머님을 붙잡아 주셨고

어머님은 당신과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어머님 역시 믿음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님을 추모하며 함께한 이 자리에서 우리 모든 사람은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은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오래 살고 싶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합니다.

가족 중에 어떤 이가 먼저 갈 수도 있고 나중에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가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실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머님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당신이 남기고간 후손들 모두가

후일에 하늘나라,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위해 우리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고인이 우리의 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도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한 시 동안도 우리의 신앙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인이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했듯이 가족들 역시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함으로 인해 가정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인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고인의 몫까지 서로를 위해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고인의 자리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소중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고인의 말없는 교훈은 더욱 우리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가문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붙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머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신 후, 가족들의 마음에도 허전함과 초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이 있었던 자리가 얼마나 크게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었는지를 점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죽음 이후, 장례식과 여러 가지 일로 인한 경황없었던 순간들이 지나고,

차츰 모든 일이 정리되었을 때 찾아오는 허전함과 내일에 대한 불안, 초조감 등이 현실이 되어 찾아왔을 것입니다.

나 또한, 연세가 있으시니까 우리 곁에 오래 계시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야 늘 했지만

경황 중에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비어있는 방을 보며, 마루를 청소하면서, 시시 때때로 찾아오는

 어머님생각에 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나뿐아니라 만은 사람들에게 가슴 아리로 불리워지는 가장 사랑스러운 단어가 이닌가 합니다.

어머님이 떠나신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설교준비를 하면서 어머님생각에 가슴이 메여오고 눈물이 났습니다.

어머님이 떠나신 후 언젠가 선교회원들과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 어떤 사람들이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관광 온것을 보고 많은 후회를 했습니다.

돌아다니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몸이 불편하니까 어딜 가고 싶어도 못가시고, 가자고해도 자식들

불편할까봐 반대하셨던 분을 생각하니까 왜? 저렇게 휠체어라도 태워서 외국은 아니라도 제주도라도

올 생각조차 못했을까하는 때늦은 후회가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곁을 떠나신지5년 생활에 매이다보니 차츰 뇌리에서 멀어지는 어머니생각을

아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야하니까요.

오늘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사연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여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흔들리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사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다시 한 번 힘주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7.10.6(8.17) 5주기추모예배 에서

 


제목 : 하늘 가는 밝은 길/김병화목사 (장례)

성경 : 엡 2:4-10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생을 살아가기도 힘에 겹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난 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몸들인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도 살고 또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다는 귀한 사실을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떻게 저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곳을 떠나는 형제(자매)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떠나셨는데 누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죄인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길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마련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구원의 길, 하늘 가는 밝은 길은 4절에 있는 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이 길을 준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이나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기인 선악과를 따먹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그 피를받은 후손들, 곧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나 판단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주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RP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은혜로써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전혀 소망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우리들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 주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귀한 보좌를 떠나서 이 땅과 역사 속에 오셨고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죽음의 원인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으며 우리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원히 밝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길이 하늘 가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이 길을 갔으니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믿고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길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하늘 가는 밝은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8절)라고 하며 믿음으로 얻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가고 싶은 저 하나님 나라는 믿음 없이는 못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아들 예수를 우리 모두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갈 수 있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우리 형제(자매)가 떠난 것입니다.

막막한 길, 외로이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주님 손 붙잡고 믿음으로 가신 것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남기신 유업과 유훈, 맡기고 가신 일, 마음으로 부탁하고 가신 모든 일들 잘 이루기로 다짐하며 전송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와 고향 (히 11:13~16)|추모

                 


찬송: 새찬송가 249장(249), 486장(474)
성경말씀: 히 11:13~16

성경은, 인생은 나그네요 외국인과 같다고 합니다.

나그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고 외국인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성도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씀함으로(빌 3:20) 성도들의 본향이

천국임을 확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또 다른 고향이 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4:1~3).

오늘 추모일을 맞이하여 나그네 인생 같은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리며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고향 갈 날을 생각하며 미리 준비하는 삶
성도는 본향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고향 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오갈 수

있지만 인생의 영원한 고향은 오직 한 번으로 끝날 뿐 아니라, 다시 와서 준비하여 갈 수 있는

고향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적어도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믿음의 차표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늘 고향 길은 자가용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라는 대중교통입니다.

예수라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예수 믿습니다”라는 차표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예수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둘째, 천국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갈 때 입는 옷은 수의가 아니라 세상에서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영적인 옷을 입고 가야 합니다.

이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값없이 입혀 주십니다.

2. 고향은 온 가족이 함께 가야 좋은 곳
우리가 영원히 살 천국 고향에는 부모형체뿐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가 같이 모이는 고향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내는 왔는데 남편이 오지 않았거나 부모는 왔는데 자녀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다 같이 가는 고향길이 되어야 기쁘고 즐거운 고향길이 되는 것입니다.

3. 환영받는 고향길
이왕 가는 고향이라면 반기고 환영하는 사람이 있어야 좋습니다.

올림픽 때 마라톤 선수가 1등으로 운동장에 들어서면 모든 관중이 일어나서 환영합니다.

천국 고향에서 환영받는 선수가 누구입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천국 고향길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향 갈 날과 입고 갈 옷을 준비함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가고 또 우리의

천국길이 환영받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생활을 잘 해야 됩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 (엡 2:4-10) |장례 (발인)김병화목사      

                

** 발인예배

제목: 하늘 가는 밝은 길

성구: 엡 2:4-10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생을 살아가기도 힘에 겹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난 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몸들인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도 살고 또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다는 귀한 사실을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떻게 저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곳을 떠나는 형제(자매)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떠나셨는데 누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죄인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길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마련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구원의 길, 하늘 가는 밝은 길은 4절에 있는 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이 길을 준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이나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기인 선악과를 따먹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그 피를받은 후손들, 곧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나 판단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주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RP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은혜로써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전혀 소망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우리들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 주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귀한 보좌를 떠나서 이 땅과 역사 속에 오셨고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죽음의 원인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으며 우리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원히 밝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길이 하늘 가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이 길을 갔으니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믿고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길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하늘 가는 밝은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8절)라고 하며 믿음으로 얻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가고 싶은 저 하나님 나라는 믿음 없이는 못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아들 예수를 우리 모두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갈 수 있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우리 형제(자매)가 떠난 것입니다.

막막한 길, 외로이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주님 손 붙잡고 믿음으로 가신 것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남기신 유업과 유훈, 맡기고 가신 일, 마음으로 부탁하고 가신 모든 일들 잘 이루기로 다짐하며 전송하시기 바랍니다.



임종예배 설교(믿지 않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제목: 영원한 장막

찬송: 187, 188

성구: 고후 5:1-5

 

우리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누구든지 이 장막집에서 영원토록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인생들입니다. 자녀들이 휴가를 받아서 텐트를 들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 며칠지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영원토록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장막집은 언젠가는 무너질 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흙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집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우리 인생이 그렇다면 우리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나서는 반드시 선악을 판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의 말씀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그네 인생을 잘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둘러 앉은 유족들에게 저는 목사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남은 날이 얼마일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믿음으로 준비하며, 우리도 우리의 장막집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소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리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

사람의 몸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생명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날이 한 번 불어 흔적도 없어지는 바람 같고 공중에 쏘아서 금방 보이지 않게 되는 살과도 같습니다. 해가 오르면 말라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가야합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같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귀한 유족들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아버지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라건대 사랑하는 유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 위로가 함께하사 과도한 슬픔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신 대신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천국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이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로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돈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힘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은 육체가 죽는 그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돈을 쌓아 놓고 이제 잘 살아보자고 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를 얻어 놓고 그 다음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지은 집은 영원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모든 유족들이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훗날 아버지 집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종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영원한 세계

찬송: 291, 295

성구: 고후 5:8-9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던 고 000(직분)님께서 000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000(직분)님께서 살아 생젼에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는지. 믿음에 있어서 항상 최선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눈물과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00년간 병석에 계시면서도, 자신보다는 늘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000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자녀들이 믿음 위에 서서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이제는 000님의 뜻을 받들어 더욱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유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바울 사도의 소원

사람들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몸을 떠나가서 주님을 만나 뵈옵는 그것이었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입은 000님께서도 바울과 같이 속히 육신을 떠나 주님을 만나 뵈옵기를 소망하셨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몸 안에 거하든지 또는 떠나든지 간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 세상을 떠나, 몸을 떠나 주님을 만나는 것을 고대하였을까요?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이 세상에는 없는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000님께서도 이제는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서,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이 없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는 줄 믿습니다.

 

2. 성도들의 소원

누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선택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어 사죄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000님은 예수를 믿어 이미 저 영원한 하늘나라 시민권을 받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에 그분이 그렇게 소원하시던 것과 같이 주님과 더불어 이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고 000님의 시신 앞에서 자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계시는 고 000님을 만날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여러분들의 변치 않는 영원한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00님은 그 동안 많은 어려움과 역경 중에서 고달픈 생활과 무거운 짐을 지고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쉬라 하시매 이 모든 무거운 것과 짐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 안식의 세계에, 행복의 세계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세계, 천군천사들이 찬송을 부르는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유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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