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부활의 은혜를 누리자 (요 11:23-27)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시간 "부활의 은혜를 누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와 영국 시인 칼라일이 어느 날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콩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종교는 기독교가 내세우는 유치한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고 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


듣고 있던 칼라일이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처럼 당신도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종교가 생명 있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콩트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부활 때믄입니다. 이 부활 하나로 모든 종교를 정리하고 또 인생의 모든 고민과 문제까지도 다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모방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 안에서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은혜는 어떻게 누릴까요?


1. 믿는 것입니다.


본문 요11:25-2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에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틀린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르다에게 현재적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현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다음은 재림 시에 우리 육체까지도 영광의 형체로 다시 살아납니다. 십자가 부활의 사건이 귀한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사건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엡2:3-8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권세까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2. 순종하는 것입니다.


빌3:10-12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 생명의 더욱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즉 죽어야 사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도 삶에서 그 진리를 적용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이론에 그칩니다. 그러므로 늘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장사지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죽은 만큼 삶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요12:24-26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은 죽은 자를 귀히 여기십니다.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받아 내가 죽으면 하나님 보실 때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세상에는 온통 제 잘났다고 산 사람들이 많은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죽은 사람을 보신다면 회개할 것 없는 하늘의 의인 아흔아홉보다 이 사람을 더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동네에 소리 잘 지르고 욕 잘하기로 유명한 소몰이 영감님이 있었습니다. 이 영감님은 소 몰고 나갈 때면 어찌나 목소리가 거칠고 큰지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감님이 어느 날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동네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 영감님이 얼마나 달라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감님이 소를 몰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큰 욕설만 들어온 소들이라서 갑자기 달라진 영감님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소들이 말을 잘 듣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달라진 목소리로 “소들아 일어나, 소들아 일어나” 해도 소들은 꿈쩍도 하질 않습니다. 이거 잘못했다가는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영감님은 또 다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런데 기도하던 영감님의 머리에 와 닿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영감님은 회초리를 번쩍 들더니 소의 엉덩이를 내리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뭐라고 질렀을까요? “할렐루야~”였습니다. 그랬더니 꿈쩍도 않던 소들이 후닥닥 일어나고 순종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온전히 순종함으로 죽을 때 우리는 더욱 더욱 부활생명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배 잘 드리고 말씀에 순종함이 잘 죽은 모습입니다. 잘 길들여진 명마처럼 어떤 말씀에도 온유와 충성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벧전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3.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생명이 왕노릇하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5:4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 소망은 주님처럼 영광의 형체를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3:2-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형체는 주를 위해 살다가 고난 받고 핍박 받는 자에게 먼저 영적으로 임합니다. 그래서 벧전4:14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였습니다.


마5:10-12에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던 것처럼 그것이 바로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받는 부활의 은혜입니다. 순교자들의 얼굴에는 영생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외부적인 박해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귀한 일군들은 매일 매일 죽도록 충성하며 순교자적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많은 시간과 힘을 주를 위해 바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부활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통해서 사도행전의 연속으로 놀라운 일을 계속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부활을 내 부활로 믿을 뿐 아니라 온전히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어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므로 부활의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온전히 나타날 수 있는 복된 성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삶/골 3:1-4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오늘 읽어 드린 골로새서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해야 할 이유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통 해 우리도 부활하였음을 뜻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우리의 부활은 이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루어진 일임을 이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로 미루어지고, 단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상태에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부활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던 때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후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체험으로 이루어야 할 부활

우리의 부활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부활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죽지 않았고, 따라서 실제로 다시 살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잘 믿지 않고 이 다음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부활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삶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삶과 그 이후 의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선 막혀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를 무조건 받아 주시고 무조건 그의 자녀로 삼아 주 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편에서도 부활에 따른 변화를 이룩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난날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부활의 은총을 나의 삶으로 경험해야 할 책임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선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은혜로 주셨지만,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계시며,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 생활 40년을 지낸 것은 이집트에서 몸에 밴 노예 근성을 죽여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이 땅에 사는 남은 날들은 바로 광야 40년과 같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부활의 생명 에 합당한 변화를 이룩해야할 기간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이 다음에 악한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회개하면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육체의 죽음 후 에 선한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오늘 내가 다시 사는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오늘 말씀에 보면 위엣 것과 땅엣 것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목표를 과거와 달리 '위엣 것'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엣 것은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뜻합니다. 그 법, 그 질서, 거기에 따른 평화와 기쁨, 사랑과 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3장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위엣 것을 추구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2,14)

이 외에도 평화와 감사와 찬양이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위에 있는 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찾아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 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 리는 땅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이런 위에 있 는 이상들은 너무 멀고 너무 이상적이며 너무 힘든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습니 다.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율법이 요구하는 생활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그들이 지키기에 는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속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율법을 따라 살도록 몰아 부치셨던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은 진실해야 하며, 거룩해야 하며, 성결해야 하며, 섬길 줄 알아야 하며,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비록 우리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것들을 생각하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은총으로 주어진 부활의 삶을 충실하게 채워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해서도 안되 며,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다시 현실 즉 땅엣 것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한 일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려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철저하게 금하신 사항이었습니다. 아무리 부활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죽음의 지배 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앞으로 나갈 길만이 허락된 것입니다. 되든지 안 되든지 부지런히 위에 있는 영적인 덕목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길만이 우리가 갈 길인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라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변화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에 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 속에는 아직 죄의 잔재(殘在)들이 그대 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받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청소해 내야 할 더러운 것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는 이런 것들을 다음 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3:8)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고 부끄러운 말을 버리는 일이 바로 우리가 죽음을 경 험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은 거의 본능적인 것으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버리는 일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우리의 죄가 소멸되었고, 그의 부활과 함께 우리가 살아났지만, 이제 실제로 자기의 삶 속에서 그 죽음을 체험하고 그 부활에 이르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활의 생명에 실제로 일치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죽기 이전에 가졌던 탐욕과 온갖 거짓들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청 소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한옥에 살던 사람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갈 때 대부분 옛날 것은 다 버리고 새 것들을 모두 장만합니다. 장도 책상도 바꾸고 응접 세트도 바꿉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은 새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과 같아서 옛 것들을 다시 끌고 새집으로 가서는 안 되고 그것들은 다 버리고 새 집에 맞는 새로운 것들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특히 우리가 버려야 할 옛것은 바로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만 족과 욕심을 위해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위한 삶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결국 그 사람은 마침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이 결국은 자기를 파멸에 빠지게 만들고 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음을 받아서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피조세계와 함께, 그리고 모든 사람과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인 삶에 빠져 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피조세계와 단절되며,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기심은 큰 죄악입니다. 분열을 조장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이념을 내세워 민족을 분열시키는 일들은 모두 죄 악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주책없이 나다니며, 지역 감정이나 부추기고 있는 것은 규탄 받아 마땅한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삶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 즉 공동체 중심의 생각과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말은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우리의 생명이 신비스럽게 하나님의 생명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건강한 삶을 이루게 되며, 동시에 공동체적인 삶의 행복을 맛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 (마 16:25)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중심의 삶, 공동체 중심의 삶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며, 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3: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곧 하나님과 만물이 통일이 되어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를 뜻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 나님 중심적인 삶, 공동체 중심의 삶으로 부활한 사람들만이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땅엣 것 즉 자기 중심적인 탐욕을 버리고, 위엣 것 즉 하나님 중심의 삶을 찾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민족과 사회를 볼 때, 우리는 아직도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삶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지역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들은 교파 분쟁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 각 계층간에 조화와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게 되면, 우리는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나타나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앞에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부활의 복음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 정치인, 경제인, 학자, 종교인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저들 속에 자리 잡았던 이기적인 탐욕이 죽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도록 이 부활 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말이 아닌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이 땅에 부활 의 푸는 계절이 오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은총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욕심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위에 있는 영적인 덕목들로 여러분의 생명을 풍성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마침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있던 자기 중심적 욕심들을 다 버리고 이 제는 섬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중심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가시 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아름다운 공동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 그리고 세계 교회와의 연대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끌어 내며, 피조세계 전 체와의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부활한 그리스도인으로 그 부활의 삶에 합당한 생각과 삶을 위해 노력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목회정보

 


부활절 달걀장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막 16:1-6)

   

그리스도 교회에는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성령 강림절입니다. 만약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탄생이나 십자가의 죽으심이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다른 성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아무리 훌륭한 성자라 할지라도 다 죽어 백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이 부활이라는 큰 사실에 기초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주 만물의 최대 사건이며 전 인류에 대한 최대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와 우주 간의 만물들이다[할렐루야]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인을 구속하는 사죄의 은총을 베풀심이고 3일만에 부활하심은 인생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이 없었다면 그 구속사업은 허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신령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인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심령에 신생을 주십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이 그 보혈로 씻음을 받고 그 생명으로 다시 새 생명을 받게된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새 출발의 힘을 주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연구 세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습의 때가 끼고 심령의 해타함과 부패의 동록이 쓸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써 새 출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엄동에 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갈보리 산으로 끌려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님은 여지없는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한 지 3일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 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의 종된 인생이여, 사망의 폭군에 의해 떨면서 무덤을 향해 끌려 가고 있는 인생이여,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나오세요 믿고 앙망하세요 그에게는 자유가 있을 것이요 평화가 있을 것이요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인생은 두가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람은 해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해돋는 동천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해를 따라가는 인생은 지는 해와 함께 죽음으로 끝장을 맺는 사람이니 땅의 영화와 향락, 안일과 만족을 추구하다가 서산의 해와 같이지고 맙니다.

그러나 동천의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사는 인생은 날마다 새 아침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입니까? 물론 이러한 사람에게도 한밤의 어둠과 온갖 위험, 슬픔과 고통과 고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동천에 솟는 아침해의 힘찬 빛이 점점 닥아오고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한밤을 지나면서도 동녁의 새아침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바라보는 생활이며 새 생명이 넘치는 은총의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3:16)


결론적으로, "그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막 16:6)

그가 살아 나셨다! 이 한마디로 인류 역사의 신 기원이 시작되었고 새 생명은 흘렀고 하늘의 영광은 넘쳤으며 영생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절 계란장식

   


 


부활절 달걀 꾸미기 작품 콘테스트

   
     

 성도님들의 온갖 정성들여 만든 부활절 계란은 그리스도교 교회력의 주요축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부활절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달걀’이다.

 

부활절에 달걀을 먹는 풍습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예쁘게 꾸며진 달걀을 나눠먹는 것은 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하나의 관심거리 이며...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까지 갈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계란장수 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계란이 모두 무지개 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후로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본 교회 각 구역별 달걀 꾸미기에 출품한 작품들을 감상해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참뜻을 새겨보자.

 

 

 

 

 

 

 

 

 

 

 

 

 

 

 

 

 

 

 

  

 

 




부활 파포이미지

     


 

 

 

 

 

 

 

 

 

 

 

 

 

 

 

 

 

 

 

 



스크랩 / 부활절 영상자료 - 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

   

게시글 본문내용

 



 

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 _ JIN

 

십자가 나 그곳을 보네
십자가 그 보혈이 흘러 나를 감싸네
나의 슬픔도 나의 고통도 사라지네
예수님 내 영혼의 주인
예수님 그 사랑의 완성 이루기 위해
죽음까지도 내어주신 분 완전한 사랑
그가 찔리어 내가 평화 누리었고
그가 상함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죽음 이기신 영광의 부활, 인류에 전한 영원한 희망

오늘은 부활절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이름 찬양’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십자가 고난과 죽음 묵상

오늘은 기독교의 최대 절기 중 하나인 부활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역사 이래 최대 기적이며 죄의 권세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이요 희망이 됐다.

 이 은혜를 되새기기 위해 우리 교회는 오늘(21일) 1부 예배부터 7부 예배까지 주일 전체예배를 기쁨과 영광의 부활절 예배로 드린다. 교회학교 및 청년들도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부활의 기쁜소식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노방전도를 실시한다.

 우리 교회는 부활절을 앞두고 15∼20일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한 주간 겪으신 고난의 행적에 동참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새벽기도회는 지·직할성전 및 지교회 성도들도 위성중계로 동참했다.

 오전 5시 대성전(토요일은 오전 6시)에서 열린 특별새벽기도회는 절대희망의 본체가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기 위한 성도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기도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영훈 위임목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7가지의 말씀을 토대로 ‘십자가상의 칠언’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17∼20일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칠언은 용서 구원 사랑 고난 승리 안식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며 “죄 사함의 은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다. 진정한 회개가 용서를 완성시키기 때문에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는 “희망의 부재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마음의 참 평안을 선물로 주셨다. 구원의 유일한 길 되신 예수를 믿어 예수의 사랑이 이 땅 가운데 임하길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영적 성장의 과정임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만 바라보는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을 회복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케 되는 삼중축복의 은혜를 누리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이와 함께 성도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평화의 일꾼이 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이장균 부목사(교무개척담당)는 15∼16일 ‘고난의 유익’(시 119:71)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슥 10:11∼12)를 주제로 설교했다. 이장균 목사는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라며 “고난을 통해 용서 구원 치료의 은혜를 기억하고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우리를 더욱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했다. 

 


부활절기독교 이미지       7      

             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