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김경연
(33, 성남시 거주)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작

“불가에서는
현세에서 옷깃을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서
천 겁의 연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거늘

그렇다면
부모님과의 인연은
전생에 몇억 겁의
인연이
있어서였을까요?

그런데도
내 가슴에 각인된
불효의 죄스러움이
너무 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내 땅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딸로 태어난 제가

남편과의 결혼을
며칠 앞두고
식구들이 모인자리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부모님의 가슴에
처음으로 피멍을 들게
했습니다.

‘엄마, 아빠!
딱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결혼식장에서만큼은
큰아버지 손 잡고
들어가게 해 주세요.’

철썩!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앉아있던 오빠한테
뺨까지
얻어맞았지만
저는 단호할 만큼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잖아도
친정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부유한 시댁에 행여나
흉 잡힐까 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는데
꼽추 등을 하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많은 손님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었습니다.

‘걱정 말래이~~~
요즈음 허리가
하루가 다르게 아파 오니
내~ 그날은 식장에도
못 갈 것 같구나.



그러니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렇게 하그라~’

행여나
시집가는 딸이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까 봐
거짓말까지 하신
아버지!

상앗빛 순결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오신 손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행진하는 순간부터
북받쳐 오르기
시작한 오열로

결혼식 내내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습니다.



덩그러니
골방에 홀로 남아
쓴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실
아버지를 떠올리며

다시는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저는 또다시 용서받지 못할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를 가져
시집가자마자
심한 입덧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어려운 시어머니께는
감히 내색도
제대로 못 하고
늦은 밤 친정집에
전화로 고통을
하소연하곤 했었죠.



잔정 많은
남편이 사다 주는
음식들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고,

친정어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무쳐주시던 겉절이와
텁텁한 청국장이
먹고 싶어
흉내도 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햇볕 따스한 일요일 오후
화사하게 치장한 채
시어른들을 모시고

바깥나들이하기 위해
승용차에 몸을 싣고
골목 어귀를
빠져나갈 무렵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얼굴을
잔뜩 숙인 채 꼽추 등에
보자기를 들고서
건너편 슈퍼에서
두리번거리는 한 노인네는
분명 나의
아버지 같았습니다.

‘아버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으신데 설마~.’하면서
아버지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후
슈퍼로 물건 사러 나갔던
남편이 슈퍼 아줌마가
전해주더라며
조그만 보따리를
내밀었습니다.



‘야야!
너거 어미가
올 라카다가 일 나가서
못 오고
내가 대신 가지고 왔대이.
하나는 청국장이고
하나는
거절이 [겉절이]다.

배 골찌[배곯지] 말고
마싯게[맛있게]
먹그래이.’

맞춤법도 틀리게
어렵사리 쓰셨을
쪽지를 보면서
사돈댁에게 흠 잡힐까 봐
들어오지도 않고
전해만 주고 가실
생각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장인어른도 참!
여기까지 오셔서
왜 그냥 가셨지?’

남편도 미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만
올 수 있는 길을

언젠가 한 번
들린 적이 있는
큰 언니한테 묻고 또
물어서 찾아오셨던
아버지!

딸네 집이
눈앞이면서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 반이나
깨닫는다고 했던가요~

늦게나마 철이 든
저는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저지른 불효는
그 어떤 효도로도

깨끗이 치유될 수
없는지

날이 갈수록
한스러워집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남편 직장 때문에
따로 이사해서
친정과는 3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니 느는 건
눈물뿐이랍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부슬부슬
가랑비라도
내리는 날엔
사진첩을 벗 삼아
뒤적이다가

아버지 없는
결혼사진을 대할 때면
황량한 바람이
몰아칩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날의
불효자식이
이제야 철이 들었나
봅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앞으로 잘할게요~”



김경연(33. 성남시 거주)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



"후기"

서울 출판
문화회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경연 씨
(33, 성남시)
가 그 주인공이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그녀의 눈물!

수기를 읽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깊은 사랑 때문에 모두
말을 잃었다.



그녀는
‘몸이 편찮으셔서
아버지가
올라오시지 못했다.’라고
시댁에 둘러댄
핑계 때문에 지난 7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김 씨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었다.

딸의 수기 당선
소식을 모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김춘생 씨 (60세)
(경북 성주군 성주읍)는



‘아비의
마음 아픔은 말로는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시집간 딸자식이
행복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며

혹 이 일로
딸의 시댁에

누를 끼칠까 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아버지는
태어나실 때부터
꼽추는 아니셨어요.

제가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로 자주 뵙지
못하던
85년경 허리에

물이 차는 늑막염과
심한 열병을 앓아 등이
굽어버렸지요.’



김 씨는
‘어버이날’을
전후해 틈 나는 대로
남편과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면서
눈물을 훔쳤다.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김주영 씨는
‘딸의 수기는

골방 한 구석 편에
누워있던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그 위대한 부성애에
정당한 이름표를
달아준 것’이라며

‘우리들의
모든 아버지가
이와 같지 않더냐’라고
반문했다.



먼저 김경연 씨의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 입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제 자신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자식들이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께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다해
드리고 싶지만

이런저런
주변 제반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해
마음 한 편으로는

늘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비단 저뿐의 생각은
아니 겠지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날에

오늘 이 글을 잃으면서
시골에 계신
우리 어머님
만수무강 하시라고
전화 한 번 해 드려야
겠습니다.

 

효성 깊은 며느리

옛날 충남 공주 땅 팔봉산 자락에 효심이 지극한 청상과부가 병든 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본래 밭고랑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그나마 시집온 지 삼 년 만에

들일을 나갔던 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는 바람에 졸지에 죽고 기력 없는 시아버지만 떠안고

말았다.

말 잘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과연 몇 해나 버틸 거냐고 허구한 날 수군거렸지만

청상과부의 효성은 벌써 일곱 해를 하루같이 변할 줄 몰랐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은 변함없이 지극 정성이었으며

봄이면 날품팔이, 여름이면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팔아 힘든 생계를 이어갔다.

"아가야,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이제 좋은 상처 자리라도 만나 배나 곯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세상천지에 널 탓하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병든 시아비는 틈만 나면 며느리의 손을 잡고 통사정을 하며 울었다.

"아버님, 제 집이 여기인데 왜 저를 자꾸만 내치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살아도 이 집 며느리요, 죽어도 이 집 귀신인 제가 가기는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십시오.

아버님!”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이 돌아왔다.

그나마 받은 품삯을 시아버지 약값으로 다 쓰고 보니 정작 차례를 지낼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틀 후면 한가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상에 냉수만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병든 시아버지의 낙심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며느리는 방문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저 읍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며느리가 쪽마루를 내려서는데 시아버지는 그날따라 안간힘을 써가며 문구멍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나서는 며느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시아비는 피를 토하며 울고 있었다.

며느리는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했다.

걷다 힘이 부치면 냇가 미루나무 아래서 쉬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벼이삭을 주우며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더없이 야속하기만 한 서방의 얼굴이 어른거려 쉴 새 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걷고 또 걷고,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새 해는 한나절이 지나고 서쪽 하늘이 봉선화 꽃잎을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큰 재를 넘으니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버지, 어머니...”

딸은 실로 몇 해만에 보았을 친정을 내려다보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며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

얼마 후 딸은 친정 집 광속에서 제법 묵직한 자루하나를 들고 나와 미친 듯이 재를 넘고 있었다.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딸은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오던 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뭄이 들었다지만 요행히도 친정 집은 아직까지 보릿가루며 보리기울이 넉넉한지라 이고

갈 만큼은 퍼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곡식 자루를 이고 뒷동산을 넘고 있을 때 말없이 툇마루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동산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찌 이다지도 박복하더란 말이냐,

오죽이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 한가위에 친정 울타리를 다 넘었겠느냐,

아이고 불쌍한 내 딸아!”

며느리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온 몸이 땀에 절어 돌아왔다.

그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그녀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하나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한가윗날 아침에 산나물 반찬에 밀가루 전을 부쳐 흰쌀밥을 올리고 조상은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서방님께 제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 며칠이 되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사립문 밖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 밖을 나가보니 서너 말이 됨직한 좁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 흉년에 누가 이 귀한 낱알을 두고 갔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갈만한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남의 곡식을 덥석 축낼 수가 없어 며칠을 새벽잠을 설치며 전전 긍긍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던 터라 며느리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사이, 등에 지게를 걸머진 남자가 번개같이 담을 돌아 논둑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보셔요, 잠시만 저를 보셔요"

어느새 남자의 등 뒤까지 따라간 며느리는 그만 낚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멋쩍은 듯 웃으며 돌아선 이는 다름 아닌 친정아버지였다.

"이것아 집에 왔으면 어미나 보고 갈 일이지.

고구마다, 허기질 땐 꽤나 양식이 되고...

정 힘들면 대낮에 다녀가거라.

네 어미에게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아버지,

절 보셨으면 왜 한 번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딸은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들어가거라, 어서.

동네사람 볼까 무섭다. 어서!"

돌아서는 아버지의 볼에서도 어느새

하염없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카톡에서 받은글-

 

 

*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 글을 통하여 자식을 더 사랑하며 더 강한 엄마가 되고 부모님을 더 공경하고 사랑을 드리는 자식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

*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 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이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리며 '엄마~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동생인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 있었던 형의 뺨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 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 하시고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닌데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 거리다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 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 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 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꿈을 그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시 보고 보아도 또 다시 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아~~~ㅠ 네번째 본 오늘도 쏟아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습니다.

위의 글은 10 년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로서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 모 기업에서 뒷바라지를 하는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에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합니다.

이글은 한번만 읽기보다는 두서너 번 읽을수록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흐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적에 올라가던 암벽에서 생명의 밧줄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사랑과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 하고 노력도 해보기 전에 너무도 쉽게 포기하려 한다.

*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글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걸인과, 창녀와의 만남,

태어 날 때 부터 선천성 뇌성마비로 30여 년을 길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걸인 총각은,

이제 삼십 중반이 되었다. 찌지리도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애초부터 부모를 잘못 만났다.
태어난지 몇년이 지나도 걷지를 못하자, 도저히 부양할 능력이 없는 부모는, 걷지도 못하는 그 어린 것을

서울 어느 고삿길에 내다 버렸다.
신약성경에 태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바디메오 처럼, 태생적으로 걷기 조차 힘든 몸을 힘겹게 이끌고,

세상거리에 내 동댕이 쳐져, 그 몸으로 생명을 이어 와, 성년이 된 선천성 뇌성마비 청년은,

남의 말을 정확히 듣고 판단하기는 해도,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구걸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 길목에 진 종일 주저 앉자, 하루동안 구걸한 돈이 4~5만 원은 되지만,

그 돈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간혹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곧 바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수였다.
구걸하는 동냥치가 아니라,
당당한 손님으로 돈을 내고 먹겠다 해도 모든 식당들은 그에게 음식을 팔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후와는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뒤틀려서,
수저를 손에 쥐면, 손이 떨려 음식을 먹어도,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밥이 더 많아, 식탁 주위를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어, 손님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해 서럽고 배고픈 세월을 보내야했던 그는, 그래도 주일이면, 교회앞에서 두손 벌려 구걸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주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앉은뱅이 바디메오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는 성경 한 권을 다 외웠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저저로 외워진거란다.
30년 세월동안, 자기가 다닌 교회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을만큼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 신구약을 전부 암송할 만큼,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상히 그의 상전이었다.
식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데, 교회 식당 이라고 뉘라서 밥 떠 먹여줄이 있을까?
교회에서도 짐덩이 이고 애물단지일 뿐,
그를 진정 형제애로 대해주는 이는 없었다.
진정성이 결여된 피상적인 친절로는, 사랑에 주린 상한 심령을 쌔매주진 못한다.
몸은 지체부자유자여도 몸과 맘은 젊기에, 허리의 갈비뼈가 시려질 때면, 자기를 온몸으로

이해해줄 이가 그리워졌다.
사춘기가 삼십이 지나서야 찾아 온 거다.
허나 몸과 맘이 본능적으로 이성을 갈망한들, 그것은 한낮 헛된 망상에 불과 할 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문을 꼭꼭 닫은 이 땅에서,
그가 동냥을 나섰다가 우연히 찾아 든 곳이, 엉뚱하게도 서울의 유명한 588 창녀촌이었다.
그곳은 돈만 내면, 누구든지 문전박대를 하지 않는 신기한 곳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창녀촌에 들어가서,
매춘녀가 시키는대로 비싼 음식을 주문 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주문 한 가지를 더 첨가했다. 먹여 달라고…,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났다.
그 창녀가 음식상을 차려 들고 쪽방으로 들어와서, 세상이 내팽개쳐버린 뇌성마비 거지 청년에게,

음식을 떠서 먹여주기 시작했다.
걸인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인간다운 대접에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람들은, 588 이 창녀촌을 가장 더러운곳으로 알지만, 지체부자인 거지 청년에겐,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로 보였다.
그리고 밥값을 주겠다고해도 나를 내 쫒은 식당과 달리, 나를 내 쫒지 않고 맞아 준
저 여인이야 말로, 진정한 천사로 보였다.
드디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당신이 바…바로 이땅에서 첨으로 날. 인간으로 대해준 처…천사야.”
창녀는 깜짝 놀랐다.
뭇 남성들의 천대와 사회의 냉대만을 받아 오던 창녀인 자신을 향하여,
“당신이야 말로 천사”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태어나 이때 껏 처음 듣는 이 감격스런 말에, 창녀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 감격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창녀는 거지 청년에게 말했다.
“창녀를 천사라고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천사입니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고백하였다.
“나의 천사…”
드디어 두 사람은, 목사님께 둘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된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은 흔쾌히 주례를

서 주시고, 이 사연을 들은 교회성도들의 진정어린
축복속에서, 교회에서 성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아끼는 이들의 성원으로, 교회앞에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열어,
지금 그곳에서 내외가 장사를 하고 있다.
이제 청년은 항상 문전박대속에, 비럭질하는 걸인이 아닌 떳떳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게다가 매일 밥을 먹여주는 아내가 있기에. 그는 이 세상은 에덴동산 이라고 찬양한다.
창녀였던 아내도, 이제는 갖은 수모를 당하지 않고도 살수 있고,
남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진심으로 한 남성을 사랑할 수 있어서, 매일 매일을
“축복으로 살아간다.” 고 기뻐했다.
그들을 이토록 새롭게 한 것은 누구일까?
걸인을 구한 것은 사회복지 정책도 아니고, 자선도 아니고, 물론 교회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창녀'였다.
창녀를 구한 것은 윤락 방지법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인생 상담자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걸인'이었다.
누가 '창녀'고 누가 '걸인'인가?
성경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주는 것들을 더 사랑하는 것을 '창녀'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에게 빌어먹고 사는 것만 걸인으로 아는데, 우리가 어렸을때 엄마 젖을 빨고 자랐고,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거저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내가 수고해서 먹고 사는 걸로 아는 우리는 과연 누구에 의해 생명을 부여 받았는가?
당신은 자신의 몸을 자기 것으로 아는가?
참으로 어리석구나!
과연 당신의 몸에 대해 어느만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서로 돕고 살면 그게 바로 천국이고, 그 반대이면 지옥인 것이다.
상생(相生)이란 바로 이를 이름이다.
오늘이란 하루는 내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 땅에서 오늘은 내 남은 삶의 첫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보다 더 소중한 날은 없다.
주어진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옮겨 보낸이 報恩 김병기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 자녀의 운동화도 사줄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고 세탁기를 판다는 광고를 보고 
판다는 집을 찾아 갔습니다.   
 
그 집은 
크고 좋은 집이었는데 집안에 있는 최고급 가구와 
주방 시설들을 보면서 그는 마음이 무척 울적했습니다.  
 
그는 
세탁기를 내어 나오면서 주인 내외와 
짧은 얘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이렇게 중고 세탁기를 구입하게 되었으며,
두 아들이 얼마나 개구장이인지 신발이 남아나질 않고 금방 닳아 
걱정이라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부인이 고개를 숙이면서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았나 몹시 당황했고 
그 때 그 부인의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딸 하나가 있지요.   
 
그런데 딸은 이 세상에 태어나 12년이 지난 지금껏 
단 한발자국도 걸어 본적이 없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신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제 아내가 저렇게 슬픔에 못 이겨 울고 있네요.”  
 
집에 돌아온 그는 현관에 놓여있는 아이들의 
낡은 운동화를 물끄러미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꿇고 자신이 불평했던 것에 대한  
 회개와 아이들의 건강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달팽이는 
빨리 달리는 노루를 부러워하지 않고,
바다에서 느긋하게 유영하는 해파리는 하늘에서 빠르게 비상하는

종달새의 날갯짓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도 않고, 미래에 있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훔쳐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설 수만 있다면,
들을 수만 있다면, 
말할 수만 있다면, 
볼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일은 5 월 5 일  어린이 날입니다

우리들의 날이라고  두주먹 불끈쥐고  소리지르며  외치든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제  그때가 그립습니다

오늘 하루도 아무일 없음에  감사하게생각  하면서  남은시간도  좋은시간 되시길  ~

~ 귀여운 판다 드림 ~

 가슴울리는 감동인 글이 있어 살포시 놓고갑니다.


29살 총각인 나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난 그 날도 평소처럼 집 앞 횡단보도를 걷고 있었는데
그만 시속 80km로 달리는 차를 못보고 차와 부딪혀 중상을 입었다.

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적적으로 생명만은 건졌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는 동시에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시력을 잃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절망했고,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면서 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아홉살 밖에 안 되는 소녀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여긴 왜 왔어?" "야! 꼬마야!
아저씨 귀찮으니까  저리 가서 놀아."

"아.. 아저씨!
왜 그렇게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  꼭 미이라 같다."

"야! 이 꼬마가..   정말 너 저리 가서 안 놀래.."

그녀와 나는 같은 301호를 쓰고 있는 병실환자였다.

" 아저씨... 근데... 아저씨 화내지 말아.... 여기 아픈 사람 많어~
아저씨만 아픈거 아니쟎아요. 그러지 말고 ~ 나랑 친구해 ...네?.. 알았죠?"

"꼬마야.... 아저씨 혼자 있게 좀 내버려 둘래.."

"그래... 아저씨... 난 정혜야... 오정혜!
여긴 친구가 없어서 심심해.  아저씨 나보고 귀찮다구?"

그러면서 그녀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 날

" 아저씨... 그런데 아저씬.... 왜 이렇게 한숨만 푹 푹 셔~...."

" 정혜라고 했니?
너도 하루 아침에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생각해봐라.  생각만 해도 무섭지...
그래서 아저씬 너무 무서워서 이렇게 숨을 크게 내쉬는 거란다....."

"근데 울 엄마가 그랬어. 병도 이쁜 맘 먹으면 낫는데.
내가 환자라고 생각하면 환자지만 환자라고 생각 안 하면  환자가 아니라고."

며칠 전에 그 침대 쓰던 언니가 하늘나라에 갔어.
엄마는 그 언니는 착한 아이라서 하늘에 별이 된다고 했어.
별이 되어서 어두운 밤에도 사람들을 무섭지 않게 환하게 해준다고..."

"음....... 그래.  넌 무슨 병 때문에 왔는데? "
"음.....    그건 비밀.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곧 나을 거라고 했어.
이젠 한 달 뒤면 더 이상 병원 올 필요 없다고.."

"그래? 다행이구나..."

"아저씨... 그러니까... 한 달 뒤면 나 보고 싶어도 못보니까
이렇게 한숨만 쉬고 있지 말고 나랑 놀아줘.. 응... 아저씨..."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한마디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치 밝은 태양이 음지를 비추듯 말이다.

그 후로 난 그녀와 단짝친구가 되었다. 
"자! 정혜야 주사 맞을 시간이다.
"언니... 그 주사 30분만 있다가 맞으면 안돼...
잉~ 나 지금 안 맞을래!!!..."

"그럼...
아저씨랑 친구 못하지... 주사를 맞아야...빨리 커서 아저씨랑 결혼한단다..."

"칫"
그리곤 그녀는 엉덩이를 들이대었다.

그렇다. 어느 새 그녀와 나는 병원에서 소문난 커플이 되었다.
그녀는 나의 눈이 되어 저녁마다 산책을 했고, 아홉살 꼬마아이가 쓴다고 믿기에는

놀라운 어휘로 주위 사람, 풍경 얘기 등을 들려 주었다.

"근데 정혜는 꿈이 뭐야?" "음.....나 아저씨랑 결혼하는 거.."

"에이..... 정혜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
응....그렇게 잘생겼어?" "음...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디게 못생겼다... 꼭 괴물 같애.."

그러나 그녀와의 헤어짐은 빨리 찾아 왔다.
2주후 나는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녀는 울면서..."아저씨.... 나 퇴원 할 때 되면 꼭 와야 돼 알겠지??

응...... 약속" "그래 약속..."

우는 그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가녀린 새끼 손가락에 고리를 걸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2주일이 지났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최호섭씨?" "예!
제가 최호섭입니다."

"축하합니다.  안구 기증이 들어 왔어요."

"진... 진짜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난 이식수술을 받고, 3일 후에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난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병원측에 감사편지를 썼다.
그리고 나아가서  기증자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던 중 난 그만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기증자는 다름 아닌 정혜였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바로 내가 퇴원하고 일주일 뒤가
정혜의 수술일이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백혈병 말기환자였던 것이다.
난 그녀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그녀가 건강하다고 믿었는데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난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부모님이라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많이 좋아했어요.

" 예..... "

"아이가 수술하는 날 많이 찾았는데...." 정혜의 어머니는 차마 말을 이어가질 못했다.

"정혜가 자기가 저 세상에 가면 꼭 눈을 아저씨께 주고 싶다고.
그리고 꼭 이 편지 아저씨에게 전해 달라고..."

그 또박 또박 적은 편지에는 아홉살짜리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 아저씨!
나 정혜야.
음~ 이제 저기 수술실에 들어간다.
옛날에 옆 침대 언니도 거기에서 하늘로 갔는데...
정혜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저씨 내가 만일 하늘로 가면
나 아저씨 눈 할게. 그래서 영원히 아저씨랑 같이 살게.
아저씨랑 결혼은 못 하니까.

나의 눈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윗글은 실화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지만
꼭 눈으로 보아야 믿는
우리들의 현실에 진실로 기도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기를...

사람들은 대부분 절망의 끝에 서 봐야지만
지금 현재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지요?
이 글처럼...오늘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제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껴 봅니다.

✔아무런 일 없이 눈을 떠 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음에 감사를...

✔두 팔, 두 다리 멀쩡하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제 팔과 제 다리에 감사를...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이 두 눈이 있음에 감사를...

✔감동 글을 읽고, 제가 반응할 수 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를...

✔이른 아침 향긋한 모닝커피 한잔을 음미할 수 있는 미각이 있음에 감사를...

누군가에게 이런 글을 전할 수 있는 이 시간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 봅니다.

돈이 많다고 하여
하루 밥 네끼 먹지 않듯이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화려한 집에서 몸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 입고서 격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드라마속의
삶 보다는 소박하지만 편안한 티셔츠 한장 걸치고서 양은 냄비에 대충
라면 한그릇 끓여 먹을 수 있는 나의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감사해야 할것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찾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소박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좋은 글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옮겨봅니다.^^

아내의 도시락 편지

   
     



아내의 도시락 편지


불우한 환경 때문에

끝내 배움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해 말단 직공으로

있던 한 청년이 있었다.

.

그는 늘 흉하게 기름 때 묻은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다가

끝모를 열등감으로 매일 술만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

그러던 중 마음 착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가 하는 일이 비록

보잘 것 없는 일이었지만,

유난히 정이 많은 남편의

사람 됨됨이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챡한 아내에게

적은 월급과 기름 때에 찌든

작업복을 내놓을때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아내는 마음이 많이 아펐다.

아내는 매일 아침 남편의 가방에

도시락과 함께 편지를 써보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아내로부터 매일같이 이렇게

쓰여진 편지를 받은 남편은,

처음 얼마간은 아내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려고 보낸 편지라고

생각해 그저 고맙기만 했다.

.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아내의

편지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정말로 아내가 자기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는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공장에 출근해서

미처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두운 창고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일부러

이른 시간을 선택했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모든 일을 보이지

않게 끝마쳤다.

 .

그는 아내에게 이런 사실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일이 아내와

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기쁨으로 남아있기를 바랬다.

.

이렇게 매일 아침 청소를 하며

보람있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날 아침도 역시 아내가 싸준

도시락에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는 서둘러 공장으로 가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쁜 마음으로 공장 청소를 했다.

바로 그날 아내의 편지를 읽고

점심 도시락을 먹고나니,

사장실로부터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무슨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장님이 왜 나를  

부르는 것일까?"

그는 영문도 모른채 서둘러

사장실로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사장님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이십년 전부터 자네를

지켜보아왔네.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자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묵묵히 해온

자네에게 온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네." "그렇지만 사장님!"

", 자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 자네도

그만 나가보게." ".... "

 .

그 다음날로 그는

부장으로 승진되었다.

부장이 되어서도 공장 청소만큼은

 변함없이 자신이 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

20년을 말해 준 아내의

이 말은 무력감과 열등감으로

지쳐 있는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세워놓은 힘이 되었다.

  

  

자칫 무시당하기 쉬운 남편의

무능함에 그토록 오랫동안

한결같이 따뜻한 시선을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적어준 도시락 편지는

진정한 사랑이었다.

또한, 아내가 해준 격려는

그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긴 시간을

오직 한마음으로

기나긴 꿈을 꾸게 했던 것이다.


     -옮긴 글 입니다.-


 



어느 버려진 어머니의 일기            



★ 어느 버려진 어머니의 일기 ★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인데.
모진 목숨 병든 몸으로 살아 네게 짐이 되는구나.

여기(요양원) 사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렇게 일찍 네 애비만 여의지 않았더라도
땅 한평 남겨 줄 형편은 되었을 터인데...

못나고 못 배운 주변머리로
짐같은 가난만 물려 주었구나.

내 한입 덜어 네 짐이 가벼울 수 있다면
어지러운 아파트 꼭대기에서 새처럼 갇혀 사느니
친구도 있고 흙도 있는 여기가 그래도 나는 족하단다.

내 평생 네 행복 하나만을 바라고 살았거늘
말라 비틀어진 젖꼭지 파고 들던
손주 녀석 보고픈 것쯤이야 마음 한번 삭혀 참고 말지..

혹여 에미 혼자 버려 두었다고
고우디고운 마음 다치지 말거라.

네 녀석 착하디 착한 심사로
에미 걱정에 마음 다칠까 걱정이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
에미 걱정일랑은 아예 말고 네몸 건사 잘 하거라.

살아 생전에 네가 가난 떨치고 살아 보는 것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네 곁에 남아서 짐이 되느니
너 하나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라도 나는 족하구나.
사랑한다 아들아..!!

~어느 버려진 어머님의 일기 중에서~

…─◈받은 글 再編輯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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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안타깝고 슬픈
현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현대판 고려장인 요양원에 버려진
어느 어머니의 일기입니다.
저역시 접하고 있는 현실에
어머님께 한없이 죄스럽습니다.


여기 이 어머니는
우리보다 더욱 열악한 여건에서
살아가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요
나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니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일 수 도 있습니다.


이 어머니 또한 우리와 같은 시절이 있었고
아름다운 청춘과 사랑의 시간이 있었던
한 사람이란 걸 우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웠던 세월을
한 번 즐기지도 못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빼앗긴
모진 삶의 주인공이란 걸..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가능하단 걸
우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것 입니다.
낯설고 귀찮은 늙은이가 아니라는
세상에 단 한분 뿐인 우리 어머니 입니다
 


 



오뎅 열개가 만든 인연

막노동으로 생활비와 검정고시 학원비를 벌던 시절.

밥값이 없어 저녁을 거의 굶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 저녁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주머니에 400원 밖에 없었다.

매일 집으로가는 길목에 포장마차에 들려

오뎅 한 개 사 먹고, 국물만 열번 떠 먹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지..

아주머니가 오뎅을 열 개나 주었다.

"어차피 퉁퉁 불어서 팔지도 못하니까 그냥 먹어요."

허겁지겁 먹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그 후(後)에도 퉁퉁 불어버린 오뎅을 거저 얻어 먹곤 했다.

그때 저는 아주머니께 나중에 능력이 생기면

갚아드린다고 말했다.


이후 군대(軍隊)를 제대하고 대학교도 졸업하고,

운 좋게도 대기업(大企業) 인사과에 취직이 되었다.

아직도 그 포장마차가 그 곳에 있을까 싶어 찾아가 보았다.

6년 만이었다.

여전히 장사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아주머니 옆에 아들이 함께 있었는데,

다리를 심하게 저는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이라 마땅한 취직(就職) 자리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아주머니가 안쓰러웠다.

우리 회사(會社)는 장애인을 전문으로 채용하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58세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학자금도 보장되는 회사다.

당장 회사 부장님께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부장님은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아들이 채용되자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 하셨다.

"이 은혜(恩惠)를 어떻게 갚죠?

나는 대답했다.

"제가 먼저  빚 졌잖아요.
그걸 갚았을 뿐인 걸요."

나에게는 어렵지 않는 일이 그 분에게는 절실한 일이었고,

나에게는 꼭 필요한 게 그 분이 필요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찮은 당신의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몇 백배의
가치를 가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뎅국물 한컵이 큰 고마움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꽃 한 송이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따스한 사랑의 눈으로 따스한
마음의 눈으로, 작은일에  감동 할줄 알고

작은일에 감사와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금년에도 마음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감사와 소중함을 생각하시고 행복한 저녁 시간 되세요

이렇게 블로그로 나마 주고 받을 수 있는 인연에

늘~ 감사합니다.^^

감동의 서울대 생활수기 당선작 

*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 글을 통하여 자식을 더 사랑하며, 더 강한 엄마가 되고

부모님을 더 공경하고 사랑을 드리는 자식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

*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

내가 가진 것 중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이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리며

'엄마~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동생인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 있었던 형의 뺨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 받치셨는지 국밥 한그릇을 다 들지 못하시고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닌데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 거리다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꿈을 그리는 사람이 될것이다!!!

★다시 읽어 보고 보아도 또 다시 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아~~~
네번째 본 오늘도 쏟아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습니다.

위의 글은 10 년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로서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 모기업에서 뒷바라지를 하는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에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합니다.

이글은 한번만 읽기보다는 두서너번 읽을수록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흐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적에 올라가던 암벽에서 생명의 밧줄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사랑과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 하고 노력도 해보기 전에 너무도 쉽게 포기하려 한다.

*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글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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