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 우리나라 조상들의 삶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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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1894)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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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기차(1910) 기차를 타보기 위해 승객들이
객차에 오르느라 소란을 빚고 있다.
기차를 처음타본 승객들은 기차가 정지하기
전 뛰어내려 사고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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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대 발족(1920) 왼쪽 높은 망루에 서울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긴급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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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중기 도구(1900) 무거운 물체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성벽을 쌓는 돌 운반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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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가리개(1900) 여인이 왕골로 짠
가리개를 쓰고 나들이하다가 양손으로
가리개를 받쳐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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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길(1890년) 방금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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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장승(1900) 장승은 2개 세우는 법인데
마을 입구에 장승하나가 외로이 서있고
마을로 통과하는 전신주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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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일어학교(1894) 한국인 교사와 도포입은
학생중앙에 일본인 교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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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릿꾼(1900년) 지금의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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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 나들이 (1903년) 전속 가마꾼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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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들의 야외학습(1904) 서당밖에 나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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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매(1900) 연자매는 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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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1904) 콩이나 메밀등을 넣어 갈아주는
수동식 믹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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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짜는 노인(1900) 돗자리 짜기란 많은
고르랫돌을 매달아 한 가닥씩 엮어 나가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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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위문(1905) 노일전쟁 당시 기녀들이
일본군 막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쪽 천막에 일장기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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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쌓기(1905)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혼합해서
쌓고,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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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개화기의 졸업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훈장(선생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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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여객선(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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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풍경(1909) 훈장이 회초리를 들고 청마루에서 붓글씨를 감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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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전차 대기소(1919) 서울에 전차가 들어오
면서 단발령 시행에 실패한 일본은 전차회사 직
원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했다
서양식 모자를 쓰게 하므로서 전차가 몰고 온 개
혁 바람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꾸어 놓고,
운전수는 강제로 일본식 제복을 입혔다. 백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헌(엄비)왕비 국상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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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궁도대회(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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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서당(1905) 어두운 방에서 플레쉬 없이
촬영한 것이 신기하고
모두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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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의 상면(1903) 신랑의 가족들이 호기심
으로 신부를 보고 있으나
신부의 가족들은 근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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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으로 가는 신부(1903) 가마를 탄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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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전차(1903)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전기궤도 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준공 직후 소아 사고로 전차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지만
각지로부터 전차를 타보기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정원은 40명이고, 중앙에는 양반이 이용하던
특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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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1920)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을 할
때에는 널을 뛰어 담장밖 세상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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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1903년) 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놓고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
또한 장승 앞에서 병의 치유를 빌던 풍습이
있었다.
장승이 7개 사람도 7명으로 각자 기원하고 있다.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얻기 위해선 굽어진
소나무로 된 것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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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결혼식(1903) 떠구지머리를 얹고 큰머리
를 튼 후,
떠구지 댕기를 드리우고 큰 비녀를 꽂은 다음,
원삼을 받쳐 입고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을 낳은 후 미국 선교사에 의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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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나들이(1907) 가마꾼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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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1890) 어린 소년처럼 보이나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이미 장가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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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질(1900) 다리미질하는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내놓고 있다.
이는 아들을 낳은 것을 자랑하기 위한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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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질 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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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터(1910) 많은 새우젖 장수가 있고
상권이 모여있는 선착장 주변이다.
서울도성까지 얼마 안떨어져 항상 많은
물량이 거래되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산-인천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며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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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1910) 이화학당을 설립한 '서클랜드
부인'은 오른쪽에서 가사실습을 감독하고 있다.
앞줄에 신발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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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과 체질(1890) 우리여인들의 생활은
노동에 시달렸으며
곡식을 찧고 키로 까부리며 체질하여 밥과
죽을 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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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 실습(1910) 대구동산언덕에 있는
선교사 저택에서 실습 나온 신명여학생들이
소년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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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운동부(1930) 대구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식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 촬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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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풍경(1900) 장죽(긴 담뱃대)을 문 근엄한
훈장이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공부를 못해 광에 갇힌 한 학생을
친구가 돌아앉아 위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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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산하, 구한말 평양의 풍경 >

구한말 평양의 풍경이다. 당시 평양의 인구는 6만 명 정도였고 개성은 3만 명쯤 되었다고 한다.

 

 




























옛 마포나루 주변풍경           

            
노변 음식점


연모를 파는 좌판 상인 연모를 파는 좌판 상인

댕기 등 다양한 물품을 파는 노점상

장날 잡화상과 노점

도기시장

1900년 마포나루

만물상

밤이섬이 보이는 마포나루

구한말 5일장

건어물과 건과실을 파는 건물상

노점


그때 그시절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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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을 아세요?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관문인 서대문

<돈의문>으로 알려진 서대문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전차도 다니는 한양의 관문 중의 하나였답니다.


조선시대 일상생활 풍속사진들


 
  

 

1800년대 후반으로 생각되는 조선시대의 생활상.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일제시대와 6.25동란이란 비운을 겪으면서

[하얀 색, 깨끗한 대한민국]이 산산 조각나 버렸습니다.

이렇게요.

그 후 국가 재건이라는

피눈물 나는 운명의 대가를 치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대한민국입니다.

[파이팅]이란 말은

이런 때 써먹는 말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한양 골목 안 평화로운 풍경


골목 안 풍경


가을걷이 풍경


가족 나들이


마나님의 행차


시골 골목 풍경


농가 풍경


시골동네 어귀 다리


여인의 행차


마을 골목


여인의 기다림


가난해도 여유와 평화가 엿보이는 농가


마을 풍경


물 길러 가는 아낙과 농가 앞


바다 위의 돛단배


빨래터


빨래터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낙네


소달구지를 끌고 개울을 건너는 농부


소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시골 초가


시골 초가


시골집 앞 풍경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농부의 뒷모습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정답기만


시골 장터의 깨끗한 옷 차림이 인상적


여름 냇가


나들이


나들이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할아버지 댁으로(?)


공동 우물


말 대신 당나귀


농사일을 마치고


나룻배


마을 사람들


시골마을 풍경


조선시대 여인


운송 목선


마을 나들이


조선여인


조선여인의 망중한


조선시대 산골 마을


조선시대 아낙네들

좀 쉬어가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보이는 농부의 모습.

그러나 천천히 꾸준히 하리라는 여유가 보인다.


보기힘든 귀한 사진자료


보기 힘든 귀한 자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2-01-21)




공산권·중립국가 휴전선 감시위원단 탈퇴요구 시위(1955-08-13)




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광경(1957-05-14)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아기들(1957-05-15 )




성형수술 장면(1957-08-27)




약현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사절 환영 플래카드(1959-03-09)




인기 영화배우 최은희씨(1959-08-19)




4.19혁명 희생자 49제(1960-06-05)




펄벅여사를 접견중인 윤보선 대통령 내외(1960-11-02)




김영복씨 귀국 의상 발표회(1960-12-18)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1960-10-01)




경복궁서 군인위문공연(1961- 5-29)




수영복입은 박정희(61-09-11)




대학생 농촌문맹퇴치계몽 활동(1962-01-11 )




KBS의 전신인 서울방송국 위문단 제주도 위문공연(1962-03-24 )




화폐교환 및 극빈자 쌀 배급(1962-06-10 )




화폐교환하는 시민(1962-06-10)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낙선재 입궁(1962-06-14 )




한산모시 직포 광경(1962-07-23)




대한항공사 취항식(1962-12-01 )




이화여자대학교 77주년 기념 5월의 여왕 대관식(1963-05-31)




육영수 여사 사진(1963-07-27 )




제5대 대통령 취임식(1963-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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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도 상항                   

            

1953년 10월15일 독도의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시마네현의 고지(告知)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1905년) 2월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3월19일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2월23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가 외신과의 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런 가운데 6·25전쟁(1950) 직후 한국 사회가 독도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사진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 사진은 1953년 10월15일과 16일에 김한용(金漢鏞·81)씨가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과 함께 해군 905정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찍은 것. 김씨는 오랫동안 광고사진 작가로 활동해왔고 최근까지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사진 기술을 강의해온 원로다. 독도 탐사 직후 발간된 당시의 한국산악회 회보에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렸고, 이를 복사한 사진이 지금까지 유통돼 왔다.
그러나 김씨가 갖고 있던 원판 사진은 단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다. 김씨는 지난해 3월26일부터 4월4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80세 기념 작품전을 열며 이 원판 사진을 공개했으나, 어떤 언론도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간동아와 접촉해 이를 최초로 공개했다. 김씨 사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자로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쓰인 2m가 넘어 보이는 나무 말뚝을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뽑아내는 장면(사진 맨 위). 기록에 따르면 이 나무 말뚝은 6·25전쟁 발발 2년째인 1952년 6월25일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의 수산시험선을 타고 독도에 상륙한 9명이 박았다고 한다(김씨는 “이 말뚝이 나무로 제작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치군은 69년 지금의 오키군 隱岐郡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면에 ‘독도’ ‘獨島’‘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표석을 설치하는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홍 회장은 ‘이 표석은 넓이가 두 자가량, 높이는 자가웃, 부피는 한 자 조금 못 된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한 자는 약 30.3cm이다) 한국산악회는 이 말뚝을 뽑아낸 다음 위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도와 獨島’를, 아래에는 국제 해도에서 독도를 지칭하는 LIANCOURT(리앙쿠르)란 프랑스어를 파넣은 화강석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에 설치하려다 못한 것이라 뒷면에는 1952년 8월15일을 뜻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 한국산악회는 표석 옆면에 표석을 실제 세운 날인 53년 10월15일을 추가로 새겨넣었다.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 8월15일 설치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 뒷면에는 ‘15th AUG 1952’(1952년 8월15일)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김씨는 ‘국제보도’란 이름의 월간지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보도사 사장인 송정훈씨가 한국산악회 회장이었던 홍종인(1903~98)씨와 막역한 사이였다. 때문에 송 사장은 한국산악회가 행사를 열 때마다 김씨를 보내 사진을 찍게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김씨는 한국산악회의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기자가 되었다.

 
 
 
표석을 설치한 뒤 독도에 상륙한 16명의 대원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의 모자를 쓰고 사진기를 멘 이가 김한용씨. 한국산악회는 조선산악회란 이름을 쓸 때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미군정 시절인 47년 8월, 홍 회장을 중심으로 한 조선산악회 대원들은 미군정 한국과도정부 소속의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신석호, 이봉수씨와 함께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의 ‘대전환(大田丸·당시는 일본식이 짙게 남아 있어 함정을 환이라 했다.
지금 표현으로는 대전정이나 대전함이 된다)’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조사를 하고,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 명의로 푯말을 세웠다(1차 조사).

 
산악회 조사대는 측지반, 기록반, 보도반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측지반이 동도 정상으로 올라가며 측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6·25전쟁 중이던 52년 5월28일, 일본 시마네현 어업시험장 소속의 시험선 ‘시마네마루(島根丸)’가 독도 주변의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있었고, 한 달 뒤인 6월25일에는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9명을 상륙시켜 문제의 나무 말뚝을 박았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광복 이후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기록에 따르면, 독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51년 6월, 경상북도 지사가 48년 6월8일 일어난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 14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설치한 ‘독도어민조난자위령비’를 때려 부쉈다고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일을 이용해 하강하는 산악회원. 한국산악회는 이 위령비 가까운 곳에 독도와 LIANCOURT란 문자를 새긴 화강석을 세웠다고 분명히 밝혔고, 김씨가 찍은 사진에서도 이 위령비가 서 있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47년 조선산악회가 세웠다는 푯말이 이때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철거한 것은 47년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푯말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쟁 중임에도 한국 사회는 크게 들끓었다.
그리하여 한국산악회가 광복절인 8월15일 독도에 들어가 다시 조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화강석으로 된 표석을 준비해 울릉도까지 갔다. 그런데 마침 독도 인근에서 미군기들이 폭격 연습을 하고 있어 독도 상륙을 포기하고 울릉경찰서에 표석을 맡겨놓고 돌아왔다(실패한 2차 조사).

 
 
 
한국산악회는 독도의 동도로 상륙해 해변에 텐트를 치고 하루 야영을 했다. 그리고 1년 2개월 뒤인 53년 10월11일, 부산에서 해군의 905정(정장 서덕균 대위)을 타고 출항해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상륙하였다(3차 조사). 10월13일 이 조사대는 독도에 접안하는 데 성공했으나 악천후 때문에 바로 철수했다(그리고 15일 다시 도전해 상륙에 성공한 것이다).

 
산악회원들은 서덕균 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의 905정을 타고 독도에 들어갔다. 조사대가 접안만 하고 돌아선 13일, 905정 근처로 레이더 장비까지 갖춘 ‘나가라(250t)’라는 이름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나타났다.
나가라는 ‘겁도 없이’ 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을 침범한 것이다. 이에 905정장 서 대위가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리고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나가라는 뱃머리를 돌려 동남쪽으로 빠져나갔다.
 다음날 조사대는 일본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가라에는 독도 조사에 나선 한국 측과 해상회담을 하기 위해 일본 중의원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군함이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고 위협하고 날씨마저 매우 나빠 나가라는 뱃머리를 돌렸다”고 보도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세 시간 후 이 방송이 “한국 군함이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에 우리는 평화선을 인정치 않는다며 한국 측 요구를 거부했다”고 전혀 다른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독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는 산악회원. 15일 독도에 상륙한 조사대는 텐트를 친 후 야영에 들어갔는데 이때 물오리 한 마리가 제 발로 야영지로 들어와 생경한 풍경 속에 젖어 있던 조사대를 기쁘게 했다.
이날 조사대는 무전기를 통해 905정과 교신을 했다. 조사대 인원 중 유일의 언론인이었던 홍 회장은 “15일 우리 라디오 방송은 부산에서 10여만명의 어민이 모여 해양주권선(평화선)을 지키자는 대회를 연 것을 생중계했는데, 이 방송을 잡은 905정은 무전기를 통해 독도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생중계 해주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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