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옛 골목길의 추억사진

       

서울 옛 골목길의 추억사진

 

'서울 행촌동 1972' '집이 좁아 손님을 변변히 초대할 길이 없을 때 평상

하나 놓으면 그걸로 온 골목이 내 집 마당이고 거실이 되었다.

골목은 좁은 집을 열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마술의 공간이었다.

 


 '서울 중림동 1984' '강아지를 한 팔로 안은 소녀가 카메라가

신기한 듯 말똥말똥 바라본다.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졌어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가득한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서울 문래동 1975' '한겨울,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니 물을 끓여 세수를 한다.


 

'서울 아현동 1974'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아이를 어떻게 할까.

아저씨는 고민 끝에 리어카에 함께 태운다. 행여 아이가 떨어질까,

고무끈으로 임시 안전벨트까지 채우고 리어카를 몬다.



 '서울 중림동 1973' '아이들은 경계심이 없다.

골목 어귀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에게도 눈부신 웃음을 선물할 줄 안다.



 '서울 수색 1979' '온 동네 개들 다 집합해

꼬리 살랑대며 밥을 기다린다. 


 

'서울 중림동 1991' '골목 어귀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할아버지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서울 행촌동 1976' '보자기 하나 몸에 두르고

잔뜩 얼굴을 찌푸린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이발을 당하고 있다.


 

'서울 중림동 1983' '갑작스레 눈이 내린다.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소녀는 지붕 아래로 용케

눈을 피해 골목 사이를 쌩쌩 내달린다.

 

'서울 행촌동 1974' '선풍기도 변변히 없는 집에서

더위를 피하려니 자연스레 러닝셔츠 차림이 된다. 

 더위를 먹었는지 기운 없는 강아지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아주머니 얼굴이 인자하다.

 

'서울 천호동 1969' '골목 어귀에 천막 영화관이 들어서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각다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비록 영화를 볼 순 없어도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으니까.



 


호롱불에 얽힌 사연들                             

            

남포등

 

 

 

호롱불

법정스님의 글 한귀절에 ,아궁이에서 군불이 타는 동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램프의 등피를 닦아 둔다.

이제는 밤으로 등불이 정답게 여겨지는 계절.
등잔의 심지를 손질하다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 소리를 들었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맘때가 되면
감성의 줄이 팽팽하게 조여지고
귀가 아주 밝아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등불은 밝기보다 감정적으로 가슴에 닿는 단어이다.
석유가 들어오기 이전, 그리고 전등이 없었던 시절에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쓴 것이 등잔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등잔에 콩기름?피마자 기름 등의
식물성 기름을 부어 어둠을 밝혔다.
등잔의 종류도 다양하여 흙으로 만든 것과
유기(놋쇠)로 만든 것, 도자기 유형 등이 있다.

등잔 이외에 초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초는 상류층 양반가정에서 주로 사용하였으며,
예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초를 꼽는 촛대는 보통 30 - 70㎝ 정도로,
그 모양도 박쥐형?나비형?원형 등 다양하였다.

개방 이후 1880년대에 석유가 들어오고,
남포등이 소개되면서 일부에서는 기름등잔을 석유 남포등으로 바꾸었고,
초도 밀납 대신 양초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등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전통적인 기름등잔을 사용하고 있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 절반이 넘었다.
그 때의 학생들은 호롱불을 밝히고 공부했는데
좀 열심히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콧구멍이 검게 그을려 있곤 했다.

그러나 더욱 옛날에는 그것조차 없어
공부하는데에 애로가 많았다
등잔의 발달사는 이렇다.

등잔 -> 호롱불 ->
남포등(램프 호야) ->백열전구 -> 형광등->삼파장 전구

양초는 옛날부터 쓰였는데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 화촉이란 말은
물들인 초를 말한다 .

화촉은 빛깔들인 밀초로,
혼례 때 신랑신부가 함께 자는 방을 화촉동방(華燭洞房),
혼례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구를
화촉지구(華燭之具)라고 하는 등,
화촉은 일반적으로 혼례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특히 여러 문양과 다양한 색상이 가미된 밀초는
혼례의 즐거운 분위기와 잘 맞아들었다.
궁중에서는 용이 양각된 용초와 모란꽃이 장식된
화초(畵燭)를 사용하였다




인간이 불을 이용한 이래 불은
음식을 익히는 조리용과 주거를 데우는 난방용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조명용의 세 가지로 발전했다.

모든 물체는 빛으로 말미암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진실을 알 수가 없다.

등은 어둠을 밝히는 광명의 상징이요 믿음이며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가치이다.
어둠은 죽음이요 빛은 생명이고 희망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내어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며
우리의 단군신화에서는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불을 발명하였다.

세상에 맹수와 독충이 생기고
돌림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자
부소가 부싯돌을 만들어 불을 일으켜
해로운 것들을 물리쳤는데
부싯돌은 부소의 돌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산간지방의 흙벽 한 귀퉁이에
제비집 같은 턱을 만들고 거기에 관솔을 피워
방을 밝히는 고굴이 있었다.

등잔불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던 등불이었다.
토기, 도자기, 옥 등으로 등잔을 만들고
그 언저리에 한지, 솜, 마사, 삼 등을 꼬아
심지를 만들고 연료는 참기름, 콩기름,
아주까리기름, 동물기름, 생선기름 등을 썼으며
심지가 두 개 인 것을 쌍심지라 했는데
쌍심지는 매우 밝았으나 기름도 많이 먹는다.




등불은 길을 밝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의 상징이다.
인류는 불을 발견하고 이용하면서부터
불에 의지하고 어둠을 밝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월 파일의 연등제에는 수많은 종류의 등을 밝혀 어둠을 깨치는데
여기서의 불은 무명을 떨치는 의미이다.

1876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들어오면서 등잔은 호롱으로 바뀌었다.
등잔은 뚜껑이 없는 종지 같은 그릇이었으므로 석유를 쓸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석유는 인화성이 강하여 등잔 전체에
불이 붙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여 석유를 넣는 병모양의 용기와

이를 덮는 뚜껑을 만들었고
뚜껑을 관통하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호롱불이 생기게 되었다.

호롱불은 보통 나무로 된 등잔대에 놓여졌으며

등잔대 밑은 사각, 육각, 원형, 동물의 모형 등으로 되어
등잔을 안정되게 받혀주고 성냥 등을 놓는 곳이 되었다.

등잔은 아주 작아 크기가 지금의 알콜램프만했고 하얗게 사기로 만들었다.
심지를 돋구면 불이 밝아졌으나 그을음이 많이났고
석유를 많이 먹는다 하여 어른들이 심지를 돋구지 못하게 했다.
등잔밑은 등잔 받침대가 있어서 항상 제일 어두운 곳이었다.





알뜰한 집은 부엌과 안방 사이의 벽에 사방 한 자 남짓 구멍을 내고
부엌쪽 벽에 유리창을 해 달아 그 공간에 호롱불을 놓았다.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등이조였다고 하는편이 낫다.
이것은 한 등으로 두 군데를 밝히려는 절약정신이었으며
호롱불은 석유를 적게 소모해 석유 한 홉이면 하룻밤을 밝히고도 남았다.
물론 부엌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호롱불은 늘 안방 한가운데 차지였지만..

호롱불을 놓는 등잔대는
두 자 남짓의 높이로 어른 앉은키와 비슷해서
한밤중에 학생 책 읽는 소리가 낭낭하고
여인네 바느질하는 그림자가 방문 창호지에 비치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은 조금만 움직여도 불길이 흔들렸고
워낙 어두워 바늘귀를 꿰려면 불 앞에 갖다 대야 보였는데
그 불빛 아래서 아이들은 공부를 했고 여인들은 바느질을 했다.




호롱불은 꼭 그림자가 사방에 생겼다.
아이들은 손가락을 이용해 벽에 개,
여우, 나비, 도깨비, 주전자 등의 그림자를 만들며 놀았다.

그 뒤 양초가 나와 부잣집은 양초를 쓰게 되었고 뒤이어
남포등이 나왔는데 배가 불뚝 나오고 위로는 굴뚝처럼 생긴 남포등은
얇은 유리로 만들었는데 자주 깨져서 조심조심 다뤄야 했다.
남포등은 석유는 많이 들었으나 몇 곱은 밝아서 인기였으며

특히 밤나들이를 갈때는 바람막이가 있어서

더욱 애용을 했었다.

남포등을 등피라 했는데 등피는 그을음으로 꺼매졌다.
그런 등피를 청소하려면  세숫대야에 비누를 풀고,
지난밤 그을음이 낀, 유리로 된 등피를 물속에 넣고
물을 넣은 후 양쪽 입구를 막고 흔든다

1970년대 이후 전기가 활발하게 보급되면서 호롱불은 자취를 감추었다.
삼십 촉짜리 알전구가 방을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형광등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방바닥의 서캐도 보인다며 신기해했다. 

지금은 간접조명에 삼파장스탠드가 방마다 밝혀주는 그림자가 없는 시대이다.
그림자란 무엇인가.

밝은 빛을 가로막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자기 자신을 늘 돌이켜 보아 갈고 닦던 옛 어른들의 지혜가 그립다.


               

               



동부전선의 소련군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기습공격을 해옵니다.

물론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소련은, 독일의 침공계획을 날짜, 규모, 이동경로까지 모조리 알고있었지만

스.탈.린 한사람의 무능함과 안일함, 그리고 얼마전에 있었던 '예조프시나 - 대숙청' 로 유능한 지휘관을 상실한 상태였죠.

더군다나 스탈린은 '설마 히틀리가 침공하겠냐' 하면서 대비조차 안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하루만에 소련공군이 거의 궤멸당했고

기습공격에, 가뜩이나 없는 지휘능력, 더 능력없는 국가원수 때문에 공격 첫날부터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공군비행장을 폭격하려 나섯던 독일군 파일럿은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시작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보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엄청난수의 소련병사들 -1941년-

 

 

포로로 붙잡힌 소련전차병.

독일장교는 그를 심문하지만, 전차병은 증오스런 눈빛으로 장교를 노려보기만 합니다.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것은 거의 일상이 되었고

남아있는 소련군들도 후퇴하거나 스탈린의 'Hold' 명령으로 죽을때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햇죠.

 

특히 독일군의 '전격전'은 소련군의 혼을 완전히 짜내기에 충분했고

1941년 동안 소련의 광활한 들판은 독일 기갑부대의 레이싱 경주장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속에서도 소련군 지휘관들은 이렇다할 반격작전을 시도하지 못했는데,

일단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매우 빨랐고

소련군 자체의 전투력이 독일군보다 훨씬 떨어졌으며,

무슨 작전을 구상하려고 하면 스탈린이 이것저것 간섭했으므로

제대로된 반격작전을 구상하지 못했다는거죠.

 

물론 모든 소련군들이 대책없이 녹아내리기만 한건 아닙니다.

그중 우크라이나 쪽을 담당한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다른지역의 독일군보다 진격속도가 더뎠는데,

이유는 우크라이나, 남서쪽 지역은 소련의 곡창지대이자 중요지역이기에

이곳의 소련부대들은 비교적 훈련이 잘 되있고, 독일군의 포위공격을 잘 피해가며

효과적인 반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늦추는 역할을 했기때문이죠.

 

하지만 무서운속도로 진격해오는 독일군은 조금씩-혹은 뭉텅이로- 소련땅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모스크바로 가는길을 거의 뚫렸고, 후퇴하던 소련군들은 모스크바쪽으로, 혹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퇴각합니다.

 

 

전선으로 행진중인 소련병사들. -1941년-

 

'10월쯤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 라는 히틀러의 예상이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는상황에서,

히틀러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게됩니다.

 

즉 모스크바까지는 이제 한걸음이고, 그전에 우크라이나에 갇혀있는 소련군들을 먹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실제로 독일군은 모스크바까지 얼마 남겨두지도 않은상태였고, 소련군의 사기는 땅을파고 기어내려갔으며

키예프에 엄청난수의 소련병력이 후퇴한 상태였죠.

 

당시 독일군은, 싸울의지가 완전이 사라진 소련군은 그냥 내버려두고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자고 했지만

히틀러는 이 엄청난 숫자의 소련군을 먹어치워야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킨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키예프로 진군을 명령합니다.

 

물론 키예프를 점령하면, 그곳에 남아있던 엄청난숫자의 소련군대를 붕괴시킬수 있을뿐만아니라

카프카스 유전까지 손에 넣을수있기에, 아주 틀린생각은 아니죠.

하지만 키예프를 치는동안 소련은 모스크바를 요새화할것이 뻔했고,

만일 키예프전선이 정체된다면  다가오는 겨울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모스크바 점령' 이 독일군의 가장 큰 목표였는데 말이죠. 

 

하지만 히틀러는 결국 키예프공격을 명령했고

키예프에서 방어하던 소련군은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게됩니다.

이 키예프 전투는 '2차대전중 독일이 거둔 가장 큰 승리' 라고 전해지고있죠.

 

하지만 소련군은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진것은 아직 아니였습니다.

독일이 키예프를 공격하느라 한눈파는사이 소련측은 재빨리 모스크바를 요새화시킵니다.

즉 키예프에있던 대병력을 독일에게 헌납(?)하는 댓가로 귀중한 시간을 얻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거죠.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1941년-

 

독일이 키예프를 점령한뒤 모스크바로 진격할때는, 이미 소련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상태였습니다.

수많은 대전차참호와 대전차포, 지뢰, 그리고 '겨울'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소련군은

전투전, 붉은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높히려는 목적이였겠지만, 당시 소련의 승리를 짐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겨울이다! 진격!'

 

어쨋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공격햇고, 서서히 모스크바의 숨통을 조여가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겨울추위,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과,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 때문에 공격속도는 점점 늦어졌고,

결국 공격3개월만에 독일은 모스크바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사실상 개전이후 소련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모스크바는 한숨을 돌리게?고, 소련군의 사기도 다시 높아졌습니다.

 

독일이 잠시 주춤해지자, 소련군은 대반격으로 '툴라' 같은 도시들을 탈환하기도 하죠.

 

하지만 독일역시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 공격실패이후 독일이 잠시 주춤한것은 사실입니다만

빠른속도로 전선을 안정화했고, 다시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독일군부에서는 코카서스유전, 볼가강을 점령하여

소련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코카서스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는 볼가강을따라 소련 전역으로 배분?으며

볼가강을 점령하면 소련경제는 말라죽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탈린'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이 도시는 상징적으로도 중요했죠.

 

결국 독일은 1942년 5월, '청색작전' 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실시합닌다.

즉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게 된거죠. 스탈린그라드로 가는길은, 독일에게는 순조로웠습니다.

수많은 소련부대가 포위,섬멸당했고 대부분의 반격역시 쉽게 제압했기 때문이죠.

 

 

독일군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소련군 공병-1942년 겨울-

 

하지만 도시로 진입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소련군 지휘관인 '추이코프'는, 전형적인 시가전으로 독일군에 맞섰고

좁은 도시에서 독일군은 적절한 탱크를 활용하지못한채, 보병vs보병전에 휘말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이 자랑하던 기동력은 건물의 잔해에 막혔고

독일군이 자랑하던 탱크는 소련군이 던진 화염병에 불타올랐습니다.

특히 '바실리 자이체프'같은 유명한 소련 저격수들의 활동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죠.

 

하지만 소련역시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은 서서히 도시를 점령하기시작했고,

또다시 소련군을 상대로한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마마에프고지, 붉은10월 바리케이트공장, 트렉터 공장 등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스탈린 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자랑하던 공중지원,포병사격을 제대로 할수없엇는데,

이유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너무 근접해서 전투를 별였기 때문입니다.

 

추이코프는 독일군이 강력한 이유가, 포병과 항공지원때문이라는것을 꿰뚫엇고

병사들끼리 근접전을벌이면, 독일군은 포병지원을 받을수 없기 때문이엿죠.

 

 

시가전을 벌이는 소련군 -1942년-

 

소련군에게 있어서 전선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볼가강 강변만을 남겨둔채 도시전체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합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더이상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의 저항은 무지막지했습니다. 남은 동료들이 모두 죽어도 최후의 일인이 끝까지 독일군에게 저항한 사례는

그리 어렵지않게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점점 의기소침해졌으며 전선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아있던 제 62군은 민간인,노동자 등을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냇으며,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건물에서는

여전히 소련군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다행히,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이 대기중이였고, 제2 친위사단 병사들이

62군과 합세해 방어를 계속 이어나갔죠. 독일군은 더이상 진격할수없었고, 소련군은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강해졌습니다. 이미 볼가강 건너, 소련군의 증원군이 모여들었고, 독일군이 거의 점령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기위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고있었죠. 반면 독일군의 상황은 그리 좋지못했습니다.

엄청난추위와 소련군의 저항, 거기다 히틀러의 '후퇴불가'명령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했고

지휘관들은 끝날것같지않은 이 전투때문에 골머리를 않앗다고 합니다.

 

결국 소련군은 대반격을 시작합니다. 먼저 강력한 독일군은 남겨두고, 시원찮은 독일의 동맹국-이탈리아,루마니아 등등..

을 먼저 공격합니다. 예상대로 순식간에 박살난 동맹국 군대는,소련군에게 진격을 허용했고, 독일군이 미처 손쓰기도전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재 포위합니다.그리고 소련군은 최후의 공격으로 '쇠고리 작전'을 실시합니다.

 독일군은 강력하게 저항햇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로인해 서서히 도시로 밀려들어갓고, 결국 1943년 2월에 결국 항복하죠.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긴 전투였습니다.

수백만명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독일이 앞으로 전투를 수행할때 필요한 전차,항공기등을 이 전투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에게 있어, 더 큰 손실은 바로, 앞으로의 작전시 히틀러가 지휘권을 갖게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다지 군사적재능이 뛰어나지않은(정확히는 형편없는) 히틀러가, 한명의 의견이 아까운 현 시점에서 직접 지휘를 한다는것은

어떻게보면 독일군의 어두운앞날을 암시하는것이죠.(그럼에도 소련군,연합군의 진격을 예상보다 3달이나 지연시킨

독일 장군,병사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더 재밌는것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태도가 서로 바뀌었다는겁니다.

전쟁초기, 스탈린은 자신의 형편없는 군사지휘력을 과대평가하여, 작전시 이것저것 참견했다가

결국 모스크바까지 위기에 처하는 아찔한(?)경험을 했죠.그러다 결국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인정하고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넘긴데반해, 히틀러는, 위에쓴데로 군사지휘권을 자신이 통솔하게되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끝난이후, 소련군은 하르코프에서 다시 반격작전을 시도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입은피해만큼의 피해를입고 결국 물러나게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독일군에비해 소련군은 엄청난수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 숫자는 독일군의 몇배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소련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게아니라, 패배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햇다는겁니다.

소련군의 병력충원능력은 대단함을넘어 경이로울정도로, 어느날 한개의 사단이 전멸당하면, 다음날 바로 보충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했을정도였습니다. 소련이 가지고있는 엄청난숫자의 인적,물적자원은, 독일에게는 없는 소련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압도적인 숫자로 독일군을 밀어붙여 전쟁에서 승리하게된는, 가장 큰 힘이됩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질적으로도 향상되며, 전쟁후반이 되면 독일군과 대등한-혹은 약간 우수한- 무기와

전술로, 소련을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망을 무참히 깨뜨리죠.(물론 전쟁내내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본건 안자랑)

 

 

 

전투전, 작전을 구상하고있는 소련군전차병들 -1943년-

 

1943년이되자 소련군의 반격은 점점 거세졌고, 독일군의 전선은 계속 축소?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아직 죽지않아서, 여전히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을 훌륭히 막아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다시 전세를 역전하기위해 작전지도를 펼쳐들었고, 소련쪽에서 혹처럼 튀어나와잇는 '쿠르스크'를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작전은 소련의 정보요원들에게 노출되었고, 곧 소련군은 방어준비를 합니다. 쿠르스크 외각으로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으며, 이곳에는 대전차포대, 대전차참호, 지뢰밭등 강력한 방어선이 건설?습니다. 문제는, 독일군은

자신들의 계획이 소련군에게 노출되고있다는걸 알지못했고, 소련군의 대병력이 은밀히 전투준비를 한다는것도 알지못했습니다.

 

더욱이 독일군은 5월경에 시작한다는 '성채작전'을, 북아프리카전선에서의 패배로 7월로 미뤄야했고, 결국 소련군에게

더욱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줍니다.

 

이윽고 7월5일, 독일군의 강력한 기갑부대는 쿠르스크를 향해 돌진해옵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튼튼한 방어선에 엄청난피해를 입어야했고, 41~42년에 보여주었던 무서운 기동력을 보여줄수없게 됩니다.

결국 공격5일만에 독일군은 예상외의 대피해를 입었고, 잠시 물러나야했습니다.

 

 

진격중인 소련지상군 -1943-

 

진격할때마다 큰 피해를 본 독일군은 '프로호로브카'라는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3일뒤 도착한 소련군 전차부대와 격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는 '인류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루만에 수백대의전차가 박살난, 악명높은 전투로 기록됩니다.

수천대의 전투기가 출격했고, 수백대의 전차들이 초 근접전을 벌이며, 서로 들이받고 뒤엉키며, 탈출한 전차병들은 상대전차병들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난사하며 무자비하게 싸웠다고합니다. 결국 이 전투로 독일은 더이상의 공격작전을 수행할수 없을정도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죠.

소련역시 그 피해가 심각하여, 더이상 진격을 못햇다고합니다.

 

얼마전에 보니까 쿠르스크전투때, 사실상 패배한것은 소련군이라는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독일군전차는 600대라고 하는데, 사실 프로호로브카 에 배치?던 독일군전차는 200대 정도였다네요.

이 전투에서 700대의 전차가 파괴?다고하는데....

독일군 전차가 200대라는게 맞다면

그중 파괴된 전차를, 아무리 심하게 잡아봐도, 대충 100대라 치면..

그럼 나머지 600대는 소련군 전차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어쨋든...그때 읽어본 기록에서 보면, 사실상 궤멸직전으로 몰린건 소련측이였고

독일군은 그 소련군을 잡아먹기위해 출동준비를 했지만,

시실리섬으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히틀러가 동부집단군을 전투에서 빼냈다고합니다.

결국 독일은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해야했고, 소련은 만신창이가 된채, 승리햇다는 소리죠.

 

 

"복수의 시간이 왔다!" 포격중인 155mm포 -1943~44년-

 

하여간 독일군의 힘은 약해졌고,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합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점령하고잇던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독일군은 밀어붙였습니다. 독일군의전선을 계속해서 축소되었지만, 히틀러는 '후퇴불가'만 외쳤고,

결국 수많은 독일군부대가고립, 궤멸당합니다. 소련군은 세바스토폴 요새를 탈환했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도 풀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독일의 동맹군중에서 '가장'강력한 핀란드를 공격했고, 파르티잔을 이용해,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 전력을 약화시켰죠.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독일군은 어떻게라도 반격을 해야햇지만, 이미 쿠르스크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터라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을 '완전축출'할 작전을 구상하고 있엇습니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국가존망의 위기까지 겪었던 소련은, 독일에게 복수한다는 의미로

1944년 6월22일, 날짜만 같은날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시합니다.

사방에서 발빠르게 진격하는 소련군과는 달리, 독일군은 소련의 거짓정보와, 파르티잔의 방해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할수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60만명의 인명피해와, 2000대의 탱크, 그보다 더 많은수의 무기들까지, 이 전투로 독일군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고, 결국 서쪽으로 패주하게 됩니다.

소련역시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입었지만, 독일에게 없는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주며 독일군을 추격했죠.

 

이제 소련본토에서 독일군은 '완전축출' 되었으며 핀란드,루마니아 등을 공격,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

 

"베를린으로!" -1944년-

 

소련은 독일군을 추격하여 동유럽국가를 공격, 수중에 넣엇으며 폴란드로 진격햇습니다.

독일군의 전선은 급속히 축소되엇으며, 수많은 포로,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히틀러는 거의 광적으로 자신의 지휘관을

질타,해임햇으며, 결국 훌륭한지휘관을 제손으로 밀어치운꼴이 ?죠.

당시 독일군의상황은 최악이였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성공, 프랑스땅을 점령해갔으며

이탈리아군은 일찌감치 항복해버렸죠. 사실상 혼자서 연합군.소련군을 상대해야하는 독일의 앞날은 매우 어두웠고,

전세를 뒤집어보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예를들어 벌지전투), 결국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지못하고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하여튼 당시 소련군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바그라티온작전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엄청났고, 보충하는데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햇던 것이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독일이 바르샤바봉기때문에

정신이팔린틈을타서 잠시 여유를 얻었다는것 정도. 독일이 간신히 바르샤바봉기를 진압하자,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진입,

다시 점령하게됩니다.

독일군은 용감하게 반격하지만 소련군은 파도처럼 달려들었고, 독일본토로 점점 다가가고있었습니다.

 

 

민간인을 징집해 조직된 '국민돌격대' -1944~45년-

 

연합군과 소련군이 독일본토로 진출하였습니다. 이제 전쟁초기,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루프트바페의 날개는 부러졌고

독일군의 자랑이였던 전차부대는, 한낱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렷습니다. 하지만 나치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전쟁은 계속됫습니다.

싸울 병력이 부족해지자 히틀러는 징집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년부터, 40세이상의 중년층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습니다.

그들은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소련군대와 싸워야햇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련군보다는 '자비로운' 연합군쪽으로 투항하기위해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독일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않았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능한 지휘관과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수잇엇지만, 그들역시 자신들이 패배할것이라는것은 알고있었습니다. 반면 히틀러는 거의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엿다죠.

용감하게 싸우는 병사들이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붉은군대는 그들을 무참히 부수고 결국 베를린 동쪽에 진입하게 됩니다.

 

 

베를린 -1945년-

 

이제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입했습니다. 소련포병대의 포격이 베를린을 불바다로 만들엇고, 수많은 소련병사들은 히틀러를 잡기위해

베를린을 공격했습니다. 전투는, 말그대로 '생지옥'이였습니다. 양측모두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앗으며 무시무시한 전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습니다. 독일병사들은 3년전,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그랫던것처럼 지하도, 건물잔해 속에 숨어서 전투를 계속했고,

소련군은 화염방사기로 그들을 불태우거나 직접가서 사살했습니다. 독일군은 맹렬하게 저항햇으나,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헛된것이 되었고,

'히틀러에게 충성' 하느니, 가족들과함께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독일군의 침략을 당했던 소련군은, 독일군이 그랬던것처럼 독일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햇고, 포로는 모두 총살햇습니다.

 

소련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지만, 계속해서 공격햇고, 결국 독일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국회의사당 내부에서도, 남아있던 SS무장친위대 들과의 잔인한 근접전이 기다리고있었죠.

하지만, 소련군은 그런 친위대들의 저항을 무찌르고 결국 붉은깃발을 국회의사당에 휘날리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소련군은 베를린에서 -혹은 그 이전부터 - 잡은 포로들을 시베리아 포로수옹소로 보내버렸고,

그곳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은 극소수라고 합니다.

 

 

국회의사당 위의 소련군 -1945년-

 

 

전투가 끝난뒤 '브라덴부르크 문' 앞에서 잡담하는 소련전차병들 -1945년-

 

독.소 전쟁은, 2차대전당시 가장 참혹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말그대로 '대 학살극' 이였습니다.

'국가' VS '국가' 가 아니라 '게르만족' VS '슬라브족' 의 '인종싸움' 이였기 때문이였죠.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하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끔찍한 결과물이엿습니다.

 

동부전선에서의 싸움은, 사실상 2차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하고 거대한 전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것 같더군요....

그때 그시절 어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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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요런 모습들 생각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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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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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이다..       

            

1956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이다.
당시 카메라가 귀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희귀한 볼거리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주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당초 지난달 25일
서울시청 앞에서 28일까지 전시된 뒤 선유도로 옮긴 것이다.

사진 속에는 50년 전 폭염을 피해 한강인도교 부근 백사장이나 뚝섬,
마포 등을 찾은 사람들과 한강 모래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피서객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자전거나 인라인이 씽씽 달리는 지금에 비교한다면
정말 황당하고 어색한 분위기다. 한강은 생태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산이다.

한강 문화의 복원을 위해 과거를 되짚어보고
세대 간의 가치가 공감될 수 있는 행사들이 많이 열리길 기대한다.
아래는 행사장에 게시된 사진 중 인상 깊은 것을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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