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하고 어색한 50년 전 한강
 
[쇼핑저널 버즈] 한강 르네상스 사진전이 오는 21일까지 선유도 공원 안에서
열린다. 1956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이다.
당시 카메라가 귀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희귀한 볼거리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주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당초 지난달 25일
서울시청 앞에서 28일까지 전시된 뒤 선유도로 옮긴 것이다.

사진 속에는 50년 전 폭염을 피해 한강인도교 부근 백사장이나 뚝섬, 마포 등을
찾은 사람들과 한강 모래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피서객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자전거나 인라인이 씽씽 달리는 지금에 비교한다면 정말
황당하고 어색한 분위기다.
한강은 생태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산이다.
 한강 문화의 복원을 위해 과거를 되짚어보고 세대 간의 가치가
공감될 수 있는 행사들이 많이 열리길 기대한다.

아래는 행사장에 게시된 사진 중 인상 깊은 것을 골라봤다.

 


 


위대한 어머니의 삶               

 

 



1959년 고구마를 길거리에서 아이와 함께 팔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아이를 들쳐업고 장사하기위해 물건 떼러가는위대한 어머니
1961년 부산


1962년 부산

생선을 사서 아이를 어우르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신문잡지 옥수수를 팔고 있는 어려웠던 그시절 1967년 부산


아이를 품에 안고 너무나 힘겨워 하는 위대한 어머니
1971년


1974년 사는게 왜 이다지도 고달플까요
아무도 사는 이 없는 자판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

1975년 자장면이 있던 시기 한그릇을 사서 아이와 나눠먹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1976년 가족들의 밥을 짓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우리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주요 도시의 옛 모습

 

1920년대 남대문통의 모습. 

 

1935년 청량리역 앞의 모습.

 

 1910년 용산역의 모습.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현 서울)

그래도 제법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인다.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의 보신각 주변.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

 

 현재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

콜로니엄 양식의 건물들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길 오른쪽 붉은색 벽돌 건물은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
‘서울의 중심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 양쪽에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1907년 3월에 찍은 광화문 거리.

 

 헤르만 잔더가 1907년 9월 무악재를 넘다가 찍은 사진.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1925년의 서울역.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의 하나.
당시 경성과 부산을 오가던 특급
[아카즈키(あかづき=붉은 달)]
일등 전망차의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일본 고관 및 친일 상류인사들이 주로 이용했다.

 

마음을 흔드는 가슴 뭉클한 사람 사진 20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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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흔드는 가슴 뭉클한 사람 사진 20 점!

                                                                                                                                                             

1. '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11일간 홀로 남겨져있다가 생존한 소녀


 

2. '벨라루스' 2차 대전 참전용사가 참전 기념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먼 여행을 와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다.

매해 참석하던 부대원들은 다 세상을 떠나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3. '이슬람'국가의 학살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든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소녀.

4.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끌고 가는 아들.

5. 9.11 기념관에서 9.11 때 희생된 아들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아버지.

6. 어린 여동생을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구해낸 오빠 ('시리아' 내전).

7. '뉴욕' '패션 위크'

8. 막 세상을 떠난 노숙자의 명복을 비는 중국 승려.

9. 변호사(오른쪽) '어시스턴트'
 

 

10. 대학 졸업한 아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가난한 아버지.

 

11. 양팔이 없는 엄마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2살 아이.


12. 완전무장 행군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18세 이스라엘 여군.


13. 아버지로부터 염산을 끼얹음 당한 어머니와 딸.


14. '시베리아' 소수 부족의 식사 한끼.


15. 시위 도중 키스를 나누는 커플.


16. '방콕' 홍수 때 기둥을 붙잡고 구조를 기다리는 여인.


17. KKK 집회에 참석한 KKK멤버의 아이가 흑인 경찰관의 방패를 만지고 있다.


18. 미국 '밀워키'의 한 가게밖에 누워있는 노숙자.


19. 1967년 미 국방부 앞에서 펼쳐진 반전 시위에서

당시 17세였던 '잔 로즈 카시미르'가 꽃을 진압 군인에게 내밀고 있다.


20. 이산가족 상봉을 마치고 헤어지는 형제.



외국의 그 옛날 추억의 사진모음 이미지






 
  







윈스턴 처칠과 그의 딸 (1943)




펠레 (1958)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1912년 4월 15일 호외를 파는 소년



루이 암스트롱 (1946)




헬렌켈러와 찰리채플린의 만남 (1919)




아브라함 링컨과 조지 매클렐런, 미국 남북전쟁 당시 (1862)




웃지 않는 표정의 마릴린 먼로 (1957)




히틀러와 괴벨스 (1943)




야구 레전드 베이브루스 (1920)




최초의 달 착륙 우주인. 닐 암스트롱




파블로 피카소




롱아일랜드에서 여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 (1939)




퀴리부인




토마스 에디슨 (1911)




뉴욕 (1904)




금문교 건설 중 (1935)




뉴욕 타임스퀘어 (1947)




상원의원 시절 존 F 케네디 (1958)




월트 디즈니 창립자, 월트 일라이어스 디즈니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면서 1962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왓슨과 크릭 (1953)




아이슈타인과 치료사




오드리 햅번




27살의 수염 없는 찰리채플린, 1916




사진기사가 유태인인 걸 알았을 때 괴벨스의 표정 (1933)




워싱턴 D.C. 교통사고 현장 (1921)




얼음을 운반하는 소녀들 (1918)




루게릭 (1939),


요즘 ALS (루게릭 병) 연구기금 모금을 위한 캠페인이 이슈죠

아이스 버킷 첼린지라고 얼음물 뒤집어쓰는 유명인사들의 영상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는데..

루게릭 병이 아래 사진의 야구선수 이름을 딴 병입니다.

이 사진은 루게릭이 ALS로 사망하기 2년 전 사진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1956)




톰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 (1900)





미국 포틀랜드의 거리 (1907)




콜로라도 증기기관차 (1900)




미국 군인과 캥거루 (1942)




일본 궁사들 (1860)




코넬 대학의 조정팀 (1911)




프랑스 피난민 어린이들 (1918)




토마스 에디슨, 존 버로스, 헨리 포드, (1914, 플로리다)




주유소 (1924)




미국의 사진가 도로시아 랭, 포드 차량 위에서 그녀의 거대한 카메라와 함께




장난감을 안고 있는 버려진 아이 (1945)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항모 엔터프라이즈호, 비행기 착륙 사고 (1943)




유명한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체 게바라




알버트 아인슈타인




피델 카스트로




케네디 3형제의 마지막 사진 (1963)




루이 암스트롱 부부




로렌 바콜, 험프리 보가트, 마를린 먼로



권투선수, 헤비급 챔피언 잭 뎀프시 (1920)




영화배우, 폴 뉴먼,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배우, 모나코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


한국전쟁 전투장면 사진                             

       

 

전쟁터 된 서울의 모습

 

 

철원 (진지)

 


철원 105mm포 사격

 


임진강

 


인천상륙작전

 


의정부 (수류탄 던지는 참전군)

 


양구 포사격

 


춘천 (포사격)

 


산더미같은 탄피

 


철의 삼각지대

 

 

마산공격

 


대포공격

 


철원 (추락한 전투기)

 


김화(파파산 전투기 공격)

 

출처 :한국전쟁 기록사진



한국전쟁중의 처음 공개되는 귀중한 자료!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 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 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새로운
공개되지 않은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 조국에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옮겨온 글~




한국일보 특종사진 50년                             

       

한국일보 특종사진 50년
한 컷 한 컷… 격동의 현장서 역사를 담았다

사진은 역사의 순간을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증언한다. 사진 한 장은 100줄의 기사보다, 100마디의 웅변보다 정확하다. 한국일보에 몸을 담은 사진기자들이 포착한 명장면들을 다시 본다. 국내외 사진보도전서 수상한 작품들이다. 사진기자들은 이 한 컷을 필름에 남기기 위해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첩첩산중에서, 역사적인 현장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낮과 밤을 지샜다


아! 나의 조국 1987. 6.10 AP 선정 20세기 100대 사진 선정 고명진기자
6·26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부한 문현로터리에서 웃옷을 벗은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다탄두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에게 달려가고 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이 사진은 1999년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사진의 주인공은 찾아지지 않았다.


이동수군의 분신 1986. 5.20. 제 18회 한국기자상, 권주훈 기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거행된 5월제 개막식 도중, 농대 원예과 이동수군이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채 '미제는 물러가라''경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투신하고 있다. 분신자살은 이후 대학가에 열병처럼 퍼졌다. 이 사진은 계엄령 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외신으로 먼저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김영삼 前 대통령 페인트 달걀 봉변 1996. 6. 3, 제 31회 한국기자상, 고영권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가 들어 있는 달걀 세례를 얼굴에 맞고 있다. 순간적인 포착이어서 김 전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아직 사태를 느끼지 못한 상태다.


기적의 소녀 1972.12.2, 제 6회 한국기자상, 1972년 세계보도사진전 은상, 박태홍 기자
서울 고아화문의 시민회관 대화재 당시 4층 회전창틀에 다리가 낀채 매달려 있는 조수아양을 소방관이 구출하고 있다. 이 사진은 계엄 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2개월 후에야 햇빛을 보았다. 박 기자와 소방관은 이후 이 소녀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조 양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아기 반달가슴곰1978.10.12, 16회 보도사진전 동상, 한융 기자
바위 틈에서 나뭇가지로 장난질을 치던 반달곰이 셔터 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을 긴장하면서 30m 전방의 위장한 카메라쪽을 바라봤다. 살이 통통하게 쪄 귀여운 반달가슴곰의 생태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컬러 필름에 담긴 순간이다. 지리산 해발 900m의 무명 능선에서 찍었다.


낙천 분풀이 폭력 2000.2.18, 제 32회 한국기자상, 제 32회 한국기자상, 손용석 기자
공천에 탈락한 한나라당 김호일(왼쪽.마산 합포)의원이 18일 오후 당무회의 직후 서둘러 집무실로 향하는 하순봉총장(오른족)을 ?아가 주먹과 발길길로 난타하고 있다. 김의원이 청년당원의 제지를 뚫고 하총장을 후려치고 왼손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뒤(사진 가운데) 오른발로 사타구니를 걷어타고 있다.(사진 아래)


다대포항의 이별 2002.10.15, 제 39회 보도사진전 금상, 최흥수 기자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북한 여성응원단이 다대포항에서 만경봉호에 오르며 눈물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고 있다. 이들을 뒤따라 온 노인이 철조망에 올라가 한반도기를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의 첫 증언 1992. 1.13. 제 29회 보도사진전 특별상, 신상순 기자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벌어진 '정신대 피해보상 요구 시위'에서 군대위안부 출신 김학순 할머니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사진은 역사의 뒷전에 숨겨져 있던 군대위안부 문제를 우리 사회에 알린 첫 보도사진으로 평가받았다. 고 김학순 할머니는 첫 증언자였다.


화염병에 불붙은 전경 고명진기자 - 1987년 23회 보도사진전 금상 , 1986년 4월 30일 중앙대
민민투결성식을 마친 중앙대 학생들이 후문으로 진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경찰의 몸에 맞아 불이 붙어 뒹굴고 있다.


석등도 쓰러지고 이종철기자 - 39회 보도사진전 가작, 1994년 4월 11일
11일 하오 '개혁의회'승려 7백여명이 총무원 건물로 다시 진입하려다 저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대웅전 옆 석등이 넘어졌다.


이 아픔 누가 아랴 최종욱기자 - 28회 보도사진전 동상, 1997년 8월 9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나미츠힐에 처참하게 부서진 기체를 내려다보며 오열하고 있다.


캄보디아 훈할머니 김민규기자 - 1998년 8월 4일
캄보디아에 버려져 조국을 잊고 살았던 종군위안부 출신 훈할머니가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이남이' 라고 써진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훈할머니는 본지의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조국을 되찾게 되었다.


불꺼진 회담 박서강기자 2001.11.8
제 6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해 8일 오후 금강산 호텔에 도착한 홍순영(왼쪽)남측 수석대표와 북측 김령성 단장이 북한의 어려운 전력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정전이 되자 촛불을 켜놓고 환담하고 있다. 제6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위해 금강산호텔에 도착한 홍순영(왼쪽) 남측수석대표와 김령성 북측 수석대표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촛불을 켜놓고 환담하고 있다.


린다 김 독점 인터뷰 김희원기자 2000년 5월 8일
린다 김이 8일 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응접실에서 본보 기자를 만나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의 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린다 김은 비교적 건강하고 분명한 태도로 질문에 응했다. 최초로 그와의 면담 인터뷰했었다.


뒤늦은 귀대신고 왕태석기자 -31회 보도사진전 특별상, 1994년 10월 25일
국립묘지 전사잔 명단에 올라와 있던 조창호 소위가 포로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25일 層?통합병원에서 문병온 후배인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학우의 분노 고명진 기자 - 1987년 세계보도사진전 3위, 1987년 6월 15일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입원중이 15일 하오 3시 연세대에서 최루탄 추방 궐기 대회가 열려 민주광장에 4천여명의 학생.시민들이 모인가운데 진행되었다. 집회가 끝난 후 많은 학생들은 교문밖진출을 위해 미리 대치돼 있던 진압경찰과 밀고 밀리는 과정을 번복하였다. 교문주변의 담벽철책을 뜯어내어 방석망을 쳐놓은 전경들에게 교련복을 입은 학생 1명이 쇠막대기를 휘두루며 학우를 살려내라고 울부짖고 있다.


시민에게 뺨맞는 전경환 권주훈 기자 -25회 보도사진전 금상, 1988년 3월 30일
검찰이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를 해외 재산도피 및 공금횡령등의 죄목으로 소환하자 국내외 보도진 150여명이 청사 마당에서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 한 시민이 전경환씨의 뺨을 때리고 있다. 당시 34세의 젊은 회사원인 김인철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경환씨의 소환소식을 듣고 분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며 검찰조사에서 밝혔다.


의령 총기 난동 이기룡기자 -19회 보도사진전 금상, 1982년 4월 28일
의령 우순경의 총기난동으로 12명의 희생자를 낸 문두출 씨의 노제(路祭)에 어머니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문씨의 손자가 제주(祭主)가 되어 잔을 올리고 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

            


 

동부전선의 소련군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기습공격을 해옵니다.

물론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소련은, 독일의 침공계획을 날짜, 규모, 이동경로까지 모조리 알고있었지만

스.탈.린 한사람의 무능함과 안일함, 그리고 얼마전에 있었던 '예조프시나 - 대숙청' 로 유능한 지휘관을 상실한 상태였죠.

더군다나 스탈린은 '설마 히틀리가 침공하겠냐' 하면서 대비조차 안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하루만에 소련공군이 거의 궤멸당했고

기습공격에, 가뜩이나 없는 지휘능력, 더 능력없는 국가원수 때문에 공격 첫날부터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공군비행장을 폭격하려 나섯던 독일군 파일럿은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시작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보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엄청난수의 소련병사들 -1941년-

 

 

포로로 붙잡힌 소련전차병.

독일장교는 그를 심문하지만, 전차병은 증오스런 눈빛으로 장교를 노려보기만 합니다.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것은 거의 일상이 되었고

남아있는 소련군들도 후퇴하거나 스탈린의 'Hold' 명령으로 죽을때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햇죠.

 

특히 독일군의 '전격전'은 소련군의 혼을 완전히 짜내기에 충분했고

1941년 동안 소련의 광활한 들판은 독일 기갑부대의 레이싱 경주장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속에서도 소련군 지휘관들은 이렇다할 반격작전을 시도하지 못했는데,

일단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매우 빨랐고

소련군 자체의 전투력이 독일군보다 훨씬 떨어졌으며,

무슨 작전을 구상하려고 하면 스탈린이 이것저것 간섭했으므로

제대로된 반격작전을 구상하지 못했다는거죠.

 

물론 모든 소련군들이 대책없이 녹아내리기만 한건 아닙니다.

그중 우크라이나 쪽을 담당한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다른지역의 독일군보다 진격속도가 더뎠는데,

이유는 우크라이나, 남서쪽 지역은 소련의 곡창지대이자 중요지역이기에

이곳의 소련부대들은 비교적 훈련이 잘 되있고, 독일군의 포위공격을 잘 피해가며

효과적인 반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늦추는 역할을 했기때문이죠.

 

하지만 무서운속도로 진격해오는 독일군은 조금씩-혹은 뭉텅이로- 소련땅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모스크바로 가는길을 거의 뚫렸고, 후퇴하던 소련군들은 모스크바쪽으로, 혹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퇴각합니다.

 

 

전선으로 행진중인 소련병사들. -1941년-

 

'10월쯤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 라는 히틀러의 예상이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는상황에서,

히틀러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게됩니다.

 

즉 모스크바까지는 이제 한걸음이고, 그전에 우크라이나에 갇혀있는 소련군들을 먹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실제로 독일군은 모스크바까지 얼마 남겨두지도 않은상태였고, 소련군의 사기는 땅을파고 기어내려갔으며

키예프에 엄청난수의 소련병력이 후퇴한 상태였죠.

 

당시 독일군은, 싸울의지가 완전이 사라진 소련군은 그냥 내버려두고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자고 했지만

히틀러는 이 엄청난 숫자의 소련군을 먹어치워야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킨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키예프로 진군을 명령합니다.

 

물론 키예프를 점령하면, 그곳에 남아있던 엄청난숫자의 소련군대를 붕괴시킬수 있을뿐만아니라

카프카스 유전까지 손에 넣을수있기에, 아주 틀린생각은 아니죠.

하지만 키예프를 치는동안 소련은 모스크바를 요새화할것이 뻔했고,

만일 키예프전선이 정체된다면  다가오는 겨울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모스크바 점령' 이 독일군의 가장 큰 목표였는데 말이죠. 

 

하지만 히틀러는 결국 키예프공격을 명령했고

키예프에서 방어하던 소련군은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게됩니다.

이 키예프 전투는 '2차대전중 독일이 거둔 가장 큰 승리' 라고 전해지고있죠.

 

하지만 소련군은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진것은 아직 아니였습니다.

독일이 키예프를 공격하느라 한눈파는사이 소련측은 재빨리 모스크바를 요새화시킵니다.

즉 키예프에있던 대병력을 독일에게 헌납(?)하는 댓가로 귀중한 시간을 얻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거죠.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1941년-

 

독일이 키예프를 점령한뒤 모스크바로 진격할때는, 이미 소련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상태였습니다.

수많은 대전차참호와 대전차포, 지뢰, 그리고 '겨울'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소련군은

전투전, 붉은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높히려는 목적이였겠지만, 당시 소련의 승리를 짐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겨울이다! 진격!'

 

어쨋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공격햇고, 서서히 모스크바의 숨통을 조여가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겨울추위,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과,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 때문에 공격속도는 점점 늦어졌고,

결국 공격3개월만에 독일은 모스크바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사실상 개전이후 소련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모스크바는 한숨을 돌리게?고, 소련군의 사기도 다시 높아졌습니다.

 

독일이 잠시 주춤해지자, 소련군은 대반격으로 '툴라' 같은 도시들을 탈환하기도 하죠.

 

하지만 독일역시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 공격실패이후 독일이 잠시 주춤한것은 사실입니다만

빠른속도로 전선을 안정화했고, 다시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독일군부에서는 코카서스유전, 볼가강을 점령하여

소련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코카서스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는 볼가강을따라 소련 전역으로 배분?으며

볼가강을 점령하면 소련경제는 말라죽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탈린'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이 도시는 상징적으로도 중요했죠.

 

결국 독일은 1942년 5월, '청색작전' 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실시합닌다.

즉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게 된거죠. 스탈린그라드로 가는길은, 독일에게는 순조로웠습니다.

수많은 소련부대가 포위,섬멸당했고 대부분의 반격역시 쉽게 제압했기 때문이죠.

 

 

독일군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소련군 공병-1942년 겨울-

 

하지만 도시로 진입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소련군 지휘관인 '추이코프'는, 전형적인 시가전으로 독일군에 맞섰고

좁은 도시에서 독일군은 적절한 탱크를 활용하지못한채, 보병vs보병전에 휘말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이 자랑하던 기동력은 건물의 잔해에 막혔고

독일군이 자랑하던 탱크는 소련군이 던진 화염병에 불타올랐습니다.

특히 '바실리 자이체프'같은 유명한 소련 저격수들의 활동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죠.

 

하지만 소련역시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은 서서히 도시를 점령하기시작했고,

또다시 소련군을 상대로한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마마에프고지, 붉은10월 바리케이트공장, 트렉터 공장 등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스탈린 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자랑하던 공중지원,포병사격을 제대로 할수없엇는데,

이유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너무 근접해서 전투를 별였기 때문입니다.

 

추이코프는 독일군이 강력한 이유가, 포병과 항공지원때문이라는것을 꿰뚫엇고

병사들끼리 근접전을벌이면, 독일군은 포병지원을 받을수 없기 때문이엿죠.

 

 

시가전을 벌이는 소련군 -1942년-

 

소련군에게 있어서 전선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볼가강 강변만을 남겨둔채 도시전체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합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더이상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의 저항은 무지막지했습니다. 남은 동료들이 모두 죽어도 최후의 일인이 끝까지 독일군에게 저항한 사례는

그리 어렵지않게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점점 의기소침해졌으며 전선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아있던 제 62군은 민간인,노동자 등을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냇으며,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건물에서는

여전히 소련군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다행히,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이 대기중이였고, 제2 친위사단 병사들이

62군과 합세해 방어를 계속 이어나갔죠. 독일군은 더이상 진격할수없었고, 소련군은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강해졌습니다. 이미 볼가강 건너, 소련군의 증원군이 모여들었고, 독일군이 거의 점령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기위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고있었죠. 반면 독일군의 상황은 그리 좋지못했습니다.

엄청난추위와 소련군의 저항, 거기다 히틀러의 '후퇴불가'명령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했고

지휘관들은 끝날것같지않은 이 전투때문에 골머리를 않앗다고 합니다.

 

결국 소련군은 대반격을 시작합니다. 먼저 강력한 독일군은 남겨두고, 시원찮은 독일의 동맹국-이탈리아,루마니아 등등..

을 먼저 공격합니다. 예상대로 순식간에 박살난 동맹국 군대는,소련군에게 진격을 허용했고, 독일군이 미처 손쓰기도전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재 포위합니다.그리고 소련군은 최후의 공격으로 '쇠고리 작전'을 실시합니다.

 독일군은 강력하게 저항햇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로인해 서서히 도시로 밀려들어갓고, 결국 1943년 2월에 결국 항복하죠.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긴 전투였습니다.

수백만명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독일이 앞으로 전투를 수행할때 필요한 전차,항공기등을 이 전투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에게 있어, 더 큰 손실은 바로, 앞으로의 작전시 히틀러가 지휘권을 갖게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다지 군사적재능이 뛰어나지않은(정확히는 형편없는) 히틀러가, 한명의 의견이 아까운 현 시점에서 직접 지휘를 한다는것은

어떻게보면 독일군의 어두운앞날을 암시하는것이죠.(그럼에도 소련군,연합군의 진격을 예상보다 3달이나 지연시킨

독일 장군,병사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더 재밌는것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태도가 서로 바뀌었다는겁니다.

전쟁초기, 스탈린은 자신의 형편없는 군사지휘력을 과대평가하여, 작전시 이것저것 참견했다가

결국 모스크바까지 위기에 처하는 아찔한(?)경험을 했죠.그러다 결국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인정하고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넘긴데반해, 히틀러는, 위에쓴데로 군사지휘권을 자신이 통솔하게되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끝난이후, 소련군은 하르코프에서 다시 반격작전을 시도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입은피해만큼의 피해를입고 결국 물러나게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독일군에비해 소련군은 엄청난수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 숫자는 독일군의 몇배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소련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게아니라, 패배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햇다는겁니다.

소련군의 병력충원능력은 대단함을넘어 경이로울정도로, 어느날 한개의 사단이 전멸당하면, 다음날 바로 보충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했을정도였습니다. 소련이 가지고있는 엄청난숫자의 인적,물적자원은, 독일에게는 없는 소련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압도적인 숫자로 독일군을 밀어붙여 전쟁에서 승리하게된는, 가장 큰 힘이됩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질적으로도 향상되며, 전쟁후반이 되면 독일군과 대등한-혹은 약간 우수한- 무기와

전술로, 소련을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망을 무참히 깨뜨리죠.(물론 전쟁내내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본건 안자랑)

 

 

 

전투전, 작전을 구상하고있는 소련군전차병들 -1943년-

 

1943년이되자 소련군의 반격은 점점 거세졌고, 독일군의 전선은 계속 축소?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아직 죽지않아서, 여전히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을 훌륭히 막아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다시 전세를 역전하기위해 작전지도를 펼쳐들었고, 소련쪽에서 혹처럼 튀어나와잇는 '쿠르스크'를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작전은 소련의 정보요원들에게 노출되었고, 곧 소련군은 방어준비를 합니다. 쿠르스크 외각으로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으며, 이곳에는 대전차포대, 대전차참호, 지뢰밭등 강력한 방어선이 건설?습니다. 문제는, 독일군은

자신들의 계획이 소련군에게 노출되고있다는걸 알지못했고, 소련군의 대병력이 은밀히 전투준비를 한다는것도 알지못했습니다.

 

더욱이 독일군은 5월경에 시작한다는 '성채작전'을, 북아프리카전선에서의 패배로 7월로 미뤄야했고, 결국 소련군에게

더욱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줍니다.

 

이윽고 7월5일, 독일군의 강력한 기갑부대는 쿠르스크를 향해 돌진해옵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튼튼한 방어선에 엄청난피해를 입어야했고, 41~42년에 보여주었던 무서운 기동력을 보여줄수없게 됩니다.

결국 공격5일만에 독일군은 예상외의 대피해를 입었고, 잠시 물러나야했습니다.

 

 

진격중인 소련지상군 -1943-

 

진격할때마다 큰 피해를 본 독일군은 '프로호로브카'라는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3일뒤 도착한 소련군 전차부대와 격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는 '인류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루만에 수백대의전차가 박살난, 악명높은 전투로 기록됩니다.

수천대의 전투기가 출격했고, 수백대의 전차들이 초 근접전을 벌이며, 서로 들이받고 뒤엉키며, 탈출한 전차병들은 상대전차병들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난사하며 무자비하게 싸웠다고합니다. 결국 이 전투로 독일은 더이상의 공격작전을 수행할수 없을정도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죠.

소련역시 그 피해가 심각하여, 더이상 진격을 못햇다고합니다.

 

얼마전에 보니까 쿠르스크전투때, 사실상 패배한것은 소련군이라는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독일군전차는 600대라고 하는데, 사실 프로호로브카 에 배치?던 독일군전차는 200대 정도였다네요.

이 전투에서 700대의 전차가 파괴?다고하는데....

독일군 전차가 200대라는게 맞다면

그중 파괴된 전차를, 아무리 심하게 잡아봐도, 대충 100대라 치면..

그럼 나머지 600대는 소련군 전차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어쨋든...그때 읽어본 기록에서 보면, 사실상 궤멸직전으로 몰린건 소련측이였고

독일군은 그 소련군을 잡아먹기위해 출동준비를 했지만,

시실리섬으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히틀러가 동부집단군을 전투에서 빼냈다고합니다.

결국 독일은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해야했고, 소련은 만신창이가 된채, 승리햇다는 소리죠.

 

 

"복수의 시간이 왔다!" 포격중인 155mm포 -1943~44년-

 

하여간 독일군의 힘은 약해졌고,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합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점령하고잇던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독일군은 밀어붙였습니다. 독일군의전선을 계속해서 축소되었지만, 히틀러는 '후퇴불가'만 외쳤고,

결국 수많은 독일군부대가고립, 궤멸당합니다. 소련군은 세바스토폴 요새를 탈환했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도 풀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독일의 동맹군중에서 '가장'강력한 핀란드를 공격했고, 파르티잔을 이용해,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 전력을 약화시켰죠.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독일군은 어떻게라도 반격을 해야햇지만, 이미 쿠르스크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터라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을 '완전축출'할 작전을 구상하고 있엇습니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국가존망의 위기까지 겪었던 소련은, 독일에게 복수한다는 의미로

1944년 6월22일, 날짜만 같은날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시합니다.

사방에서 발빠르게 진격하는 소련군과는 달리, 독일군은 소련의 거짓정보와, 파르티잔의 방해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할수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60만명의 인명피해와, 2000대의 탱크, 그보다 더 많은수의 무기들까지, 이 전투로 독일군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고, 결국 서쪽으로 패주하게 됩니다.

소련역시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입었지만, 독일에게 없는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주며 독일군을 추격했죠.

 

이제 소련본토에서 독일군은 '완전축출' 되었으며 핀란드,루마니아 등을 공격,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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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으로!" -1944년-

 

소련은 독일군을 추격하여 동유럽국가를 공격, 수중에 넣엇으며 폴란드로 진격햇습니다.

독일군의 전선은 급속히 축소되엇으며, 수많은 포로,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히틀러는 거의 광적으로 자신의 지휘관을

질타,해임햇으며, 결국 훌륭한지휘관을 제손으로 밀어치운꼴이 ?죠.

당시 독일군의상황은 최악이였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성공, 프랑스땅을 점령해갔으며

이탈리아군은 일찌감치 항복해버렸죠. 사실상 혼자서 연합군.소련군을 상대해야하는 독일의 앞날은 매우 어두웠고,

전세를 뒤집어보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예를들어 벌지전투), 결국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지못하고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하여튼 당시 소련군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바그라티온작전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엄청났고, 보충하는데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햇던 것이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독일이 바르샤바봉기때문에

정신이팔린틈을타서 잠시 여유를 얻었다는것 정도. 독일이 간신히 바르샤바봉기를 진압하자,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진입,

다시 점령하게됩니다.

독일군은 용감하게 반격하지만 소련군은 파도처럼 달려들었고, 독일본토로 점점 다가가고있었습니다.

 

 

민간인을 징집해 조직된 '국민돌격대' -1944~45년-

 

연합군과 소련군이 독일본토로 진출하였습니다. 이제 전쟁초기,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루프트바페의 날개는 부러졌고

독일군의 자랑이였던 전차부대는, 한낱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렷습니다. 하지만 나치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전쟁은 계속됫습니다.

싸울 병력이 부족해지자 히틀러는 징집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년부터, 40세이상의 중년층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습니다.

그들은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소련군대와 싸워야햇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련군보다는 '자비로운' 연합군쪽으로 투항하기위해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독일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않았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능한 지휘관과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수잇엇지만, 그들역시 자신들이 패배할것이라는것은 알고있었습니다. 반면 히틀러는 거의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엿다죠.

용감하게 싸우는 병사들이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붉은군대는 그들을 무참히 부수고 결국 베를린 동쪽에 진입하게 됩니다.

 

 

베를린 -1945년-

 

이제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입했습니다. 소련포병대의 포격이 베를린을 불바다로 만들엇고, 수많은 소련병사들은 히틀러를 잡기위해

베를린을 공격했습니다. 전투는, 말그대로 '생지옥'이였습니다. 양측모두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앗으며 무시무시한 전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습니다. 독일병사들은 3년전,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그랫던것처럼 지하도, 건물잔해 속에 숨어서 전투를 계속했고,

소련군은 화염방사기로 그들을 불태우거나 직접가서 사살했습니다. 독일군은 맹렬하게 저항햇으나,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헛된것이 되었고,

'히틀러에게 충성' 하느니, 가족들과함께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독일군의 침략을 당했던 소련군은, 독일군이 그랬던것처럼 독일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햇고, 포로는 모두 총살햇습니다.

 

소련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지만, 계속해서 공격햇고, 결국 독일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국회의사당 내부에서도, 남아있던 SS무장친위대 들과의 잔인한 근접전이 기다리고있었죠.

하지만, 소련군은 그런 친위대들의 저항을 무찌르고 결국 붉은깃발을 국회의사당에 휘날리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소련군은 베를린에서 -혹은 그 이전부터 - 잡은 포로들을 시베리아 포로수옹소로 보내버렸고,

그곳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은 극소수라고 합니다.

 

 

국회의사당 위의 소련군 -1945년-

 

 

전투가 끝난뒤 '브라덴부르크 문' 앞에서 잡담하는 소련전차병들 -1945년-

 

독.소 전쟁은, 2차대전당시 가장 참혹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말그대로 '대 학살극' 이였습니다.

'국가' VS '국가' 가 아니라 '게르만족' VS '슬라브족' 의 '인종싸움' 이였기 때문이였죠.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하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끔찍한 결과물이엿습니다.

 

동부전선에서의 싸움은, 사실상 2차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하고 거대한 전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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