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상황 6.25전쟁 당시를 회상한 일면

       

절박한 상황 6.25전쟁 당시를 회상한 일면,,

 

 

   도통 맞춤법 없는 원문 그대로 기록글 원용에 충실하였습니다...★

 

 

내나이 19세 6.25 아버지는 남대문시장서 옷장사 하셧다 대중교통이 전차뿐 저이집 흑석동 교통문제로

집에는 가끔오셨다 제일 한강교가 끈기면서 소식이 끈기고 할머님 어머님 이남 이녀중 맏딸인 나는

아버지 기다리다가 피난도 못가고 집은 한강변이였지요 한강다리가 끙기니 나룻배에 피난민들이 서로

탈려고 아우성엿지만 배가 사람을 너무실어 강건너다 뒤집어져서 한강변에는 물에 떠다니는 시신들이

강물이 빠지면 모래사장에 물이 불으면 다시떠다니고, 너무나 무서워서 잠을 못잣지 그런대 서울에는

양식을 구할 수가 업어서 걱정하는대 친척 할아범이 이를 차마 먼저 피난 떠나서 서울에 온줄알고

차자 와따기에 양식 걱정하는것보고 지금은 이북땅이지만 그 당시는 남한땅이니까 낙동강에서 전쟁할

때라 할아버지께서 거기는 시골이라 양식은 걱정 없으니 할아버지 따라 서울에서 개성지나 황해도

연안까지 삼백리길을 하루백리씩 삼일동안 걸어서 갔지 그 고세서 얼마간 지내다가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다시 서울로 피난오는데 미군 비행기가 얼마나 폭격하는지 바로 앞에가든 피란민들이 주거

너머저써요 다행이 우리 가족들은 무사햇지 고생고생 끗테 집에 와보니 마침 인천 상륙작전이엿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안와쓰으면 빨갱이 나라 북에서 못올뻔 했지 아버진 영영소식기 업고 1.4후태때

옆집 아주머니가 자기 친정이 오산인데 갓치 가자구해서 다시 떠나기로했지 철길따라 수원역에 갓는데

마침 화물차가 섯는데 짐칸에는 미군들이 타고잇써서요 피란민들이 차 타면 부산까지 갈줄알고 너도

나도 짐칸 위로 간신히 식구들 올라 갓는데 막내동생(동탄/임성택)은 올라갈 수가 업서서 노끈으로

달아올이고 문제는 여기서 이러낫슴니다. 집 떠날 때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때 짐보따리에서 날씨 추운

이까 꽁꽁 어러써요 그래도 먹을거시업스니 먹은거시 식구대로 배탈이났지요 밤은 어두운데 기차지붕

꼭대기서 오가도 못하고 그럭저럭 아침해가떠지요 나리발가보니 이써야될 짐칸군인들은 오간데업고

기차 머리 기간실도 엄써저써요 피란민은 망연자실하고 또 지친 몸을 철길 따라 융로로 피란 떠낫지요.

우리는 엽집 아주머니집 오산에 가니 거기서도 피난가고 집은 비엿어요 할 수 없어 다섯가구가 한집에

머물러슨데 알고보니 아군은 서정리에 진을 치고 우리가 머문데서 이십리엔 밤이되면 중공군이 도라

다니고 나리새면 미군 비행기 폭겨글 해대기에 할수업서 거기서 더산골짜기 마을에 집 세체 피란민 한

열가구 모엿는대 하루는 미군두명이 저만치 골짜기서 총들고 거러오고 이써써요 그때는 미군있는대는

여자들이 숨어야 되요 수물곳이 업서 절문 여인네는 전부 다락에 겨란을 두는 곳인 줄알고 우리가

머문 집도 닭두마리가 있느거슬보고 다락문을 열어는대 캄캄하니까 나이타 불로 안을 보니 그 미군도

놀라서 깔깔 웃어요 그러고 우리 안심시키고 갓어요 지금메 마는세월이 지나고보니 절로 우슴 납니다.

아버지 소식은 지금도 모릅니다.금년에 살아게시다면 101세 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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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박한 상황 6.25전쟁 당시를 회상한 피난경험의 모진 일면 ★ 

 

내나이 19세때 6.25사변이 터졌다.

우리 아버지는 남대문시장에서 포목 옷감 장사를 하셨다.

당시로선 대중교통이 전차 뿐 이기에

나의 집은 흑석동(지금의 흑석2동)이라서 교통문제로

집에는 가끔오셨다 제1 한강교가 끊기면서

아버지의 소식이 마저 연락 두절상태 

집안에 남아있는 할머님 어머님 이남 이녀중 맏딸인 나는

노량진 고개에서 줄 곧 아버지 기다리다가

아예 피난도 못가고 집은 한강변 이였지만

그 수많은 참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보아 왔었다.

 

 


한강다리가 끊기니 나룻배에 피난민들이 서로탈려고

아우성이었고 말 그대로 아비규환 이었고

배에다가 사람을 너무많이 싣고 강으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서

백사장 한강변에는 물에 떠다니는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또 강물이 빠지면 모래사장에 물이 불으면 시체는 둥둥 다시 떠다니고,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잣었다.

그런데 우리 남아 있는 가족들은

당시 서울에는 모두들 피난을 나가 양식 구할 수가 없어서 걱정을 하는데

친척 할아버지가 이를 잘못 알고 먼저 피난 떠나 서울에 온줄 알고

찾아 왔다기에 때마침 양식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선

황해도 해주 연안 지금은 이북땅이지만 그 당시엔 남한 땅이었으니까

남쪽은 한창 낙동강에서 피아간 공방 사투의 전쟁을 할때라

할아버지께서 거기는 시골이라(아드님이 사범학교 교편잡고 있었음)

양식은 걱정 없으니 따라 오라고 하시기에

결국은 친척 할아버지 따라 서울서 임진강 건너 개성을지나 황해도 연안까지

그먼 삼백리길을 하루에 백리씩 삼일동안을 걸어서 그곳에 갔다.

 

 


먹거리 풍성한 얼마간은 그럭저럭 걱정 없이 지내다가 그래도 서울에 게신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다시 또 서울로 피난을 나오는데

미군비행기(F-80 쎅세기)가 편대를 이루어 얼마나 폭격을 하는지

바로 앞에 가던 피란민들이 수없이도 파편에 맞아

안타깝게도 길가 연도에서 아녀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총소사를

포함한 오인 폭격으로 비명에 억울하게 죽어 갔었다.

 

 


다행이 우리 가족들은 천신만고 끝에 요행으로 무사했지만 고생은

이루 헤아릴수가 없었고, 그 고생 고생 끝에 흑석동 집에 와보니

집은 피폭되어 반파 돼 있었다.

 

이때가 바로 9.28 UN군 인천상륙작전

성공직후의 노량진 전투당시 그때 였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황해도 연안에서 피난길로 안돌아 왔으면 

지금쯤 소름끼치는 빨갱이나라 이북에서 못빠져 나올 뻔 했었다.

 

 


한편 아버지는 영영소식이 없으시고,

그후 1.4후퇴때 옆집 아주머니가 자기 친정이 오산인데 같이 피난 가자고 해서

다시 남쪽을 선택해서 무작정 떠나기로 했었고 철길을 따라 안양지나서

군포역에 갔는데 마침 남행을 위한 화물열차차가 몇량이 서있길래

무조건 화물차 지붕으로 올라탔다.

 

때마침 짐칸에는 후퇴하는 중대병력의 미군들이 타고 있었고,

피난민들인 우린 이 기차를 타면 부산까지 가는줄 알고

너도나도 짐칸 위로 몰려들었고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자릴 차지하려고

생지옥 인산인해의 다툼으로 간신히 식구들 몰려 올라 갔지만

막내동생(동탄/임성택)은 6살박이라서 올라갈 수가 없어서

노끈으로 드레박 달듯 달아 올리고..,모두 행운이 있어 안착을 했긴 했었는데

 

 


아 글쎄 문제는 여기서 일어났다.

집을 떠나올때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비상식량으로 짐 보따리에 챙겨

간수한 것이 날씨가 추우니까 그만 떡밥으로 꽁꽁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먹을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 배고픈김에 허기때운 식구들은

모두 배탈이났지요 밤은 어두운데 기차지붕 꼭대기서 오도가도 못하고

심히 낭패를 당하였다.

 

어찌 할 수 없이 궁여지책 용변을 바가지에 달아 기차 레일 바닥에다가

대충처리하고 모두는 생사의 결단 상황이라  죽기살기 마음들이라서 

그 갈림길인지 체면이고 뭐고 신체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차디찬 배앓이는 물론이지만 도통 떠날 줄 모르는 화물칸 기차

지붕 위에서 온가족들 꼬두 밤샘을 지키고 남행의 꿈을 위해

그나마 희망을 안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아침해가 떠올라 날이 밝아오고 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없었다.

 

아 글쎄 함께 있어야 할 짐칸의 미군들은 오간데도 없고

기차 머리만 살짝 돌려

다른 화칸을 이용해(작전상) 깜쪽 같이 달아나 버리다니....

이를 신뢰하고 크게 믿고 있던 피난민은 망연자실하고, 또 지친 몸을 이끌고

군포역에서 어쩔 수 없이 남쪽 철길로 피난대열들을 따라 나서 떠났다.

 

 


우리는 옆집 아주머니댁 집을 믿고 일단 오산 친정집으로 찾아 가보니

거기서도 피난들 가고 없는지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할 수 없이

같이 뭉쳐서 피난 갔었던 외지인 다섯가구가 한데 뭉쳐서 한집에 머물렀는데,

알고보니 이곳은 임시 완충 역활한 교전지역으로서

아군은 서정리에 진을치고 우리가 머무는데서 이십리 북방엔 밤만 되면

중공군이 따발총 매고 돌아다니니 피아간 격전지 틈새인줄을 전혀 몰랐었다.

 

 


날이새면 미군 비행기가 수 없이도 북쪽에 적진을 향해 폭격을 가하기에

더이상 머무를 곳이 못돼 우리 가족은 할수 없이 거기서 더 깊숙한

산골짝 마을로 옮겨갔다.

 

옮겨가던중 때마침 초가집 세채가 오기종기 모여 있기에 외지인을 포함한

우리 피난민 10가구가 단체생활로 몰려있었는데 다행히 곡간옆에 항아리에

묻어둔 곡식을 어쩔수 없는 처지들이라 주인 없는곳서 무단으로 찾아내

생명부지의 곡절에서 피난지 삶을 그나마 연명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미군 두명이 저만치 골짜기서 총 들고 사주 경계하면서 걸어 오기에

겁이나서 초가집으로 뛰어 들어 왔다.

그때는 미군들이 있는데는 여자들이 겁탈 당할까봐 겁나서 숨어야만 했었다.

이때 우리는 숨을 곳이 없어서 젊은 여인네는 전부 초가집 다락에 숨어 들었다.

 

 


아마도 그네들 미군은 초가집은 축사라 계란을 두는 곳인 줄로 착각 했겠지만.,

우리가 머무는 집도 닭 두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들어 왔다가 군화 발길로

안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우리 할머니가 다락문 앞에 빨랫줄 걸고 엉성하게 저고릴 걸어놓고 은폐했는데

미군이 뭐냐고 묻자 말 안통하는 우리 할머님은 온 몸 손짓으로 이를 제지하자 

이들은 더욱 궁금했는지 총검으로 그만 다락문을 뚫어 활짝 열어 제쳤다.

 

워낙 다락방이 캄캄하니까 지퍼 라이타로 불을켜 다락방 안쪽을 들여다 보니

몰려있던 아녀자들이 공포에 질린 근심드리운 얼굴 정경이 훤하게 비쳐 뵈는지라

그만 미군도 놀라서 뒤로 물러서 당황 하더니만

한참만에서야 상황을 판단한 두 미군은 서로 붙잡고 그만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마도 수색 정찰 나왔다가

닭소리에 초가집이 축사인줄 알고 계란 생각이 절로 났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선 미안했는지 연신 아임쏘릴 연발하며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돌아갔다.

지금에서야 당시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제 그 많은 세월들 64년을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은 지금도 그 옛 일에 주마등 처럼 얼룩진 과거

6.25동란 생각에 눈물로 흐름진다.

 

당시는 열아홉 처녀시절였기에 몸을 사렸던 것이고 절로 웃음꽃 피운다.

 

 


그나 저나 행방불명된 아버지 소식은 이산가족찾기 에서도 나타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리운 아버님의 생사를 모른다...너무나 연노하셔서 돌아가셨겠지만...

그래 내고향은 바로 거기 함경남도 정평군 귀림면 장흥리 6번지이다.

 

 


고향땅이 금강산 너머에 아담하고 작은 작은 어촌였으니 혹여나 살아만 계신다면

한세기를 훌쩍 104란 연세가 되셨지만 자상하시던 아버님 생각에

잠시 나의 눈시울 붉혀본다...

아버님 아니 아버지 그 그늘이 오늘 따라서 웬지 못내 그립습니다.....

못내 그리운 나의 아버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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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손수건에 눈물을 하염 없이 적셨던 나의 누나의 통한

그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면서.....!

 

K.B.S 방송국에 그시절 마당 애환 낭송원고로 송고를 해달란다..

큰누나의 마음을 읽고 간략히 살을 붙인 동생  동탄/ 임성택 代筆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 Brother's Four ~


 

그옛날 그시절의 추억의 사진감상

▲ 서울 거리 1966년대
 

▲남한산성  1966년대
 

▲ 서울 시청 1966
 

▲판자촌 서울 1966
 

▲서울역 1966
 

▲남대문 시장근처 1966 
 

▲서울역앞 1966 
 

▲1966년대
 

▲화성 / 수원 1966
 

▲화성 1966 년
 

▲1966년대
 

▲서울 1966 년 
 

▲1966년대
 

▲1966년대
 

▲서울 시청 1966
 

▲수원 1966
 

▲1966년대
 

▲서울 1966 년
 

▲수원 / 화성1966년대
 

▲미국 대사관, 서울 1966
 

▲화성 1966
 

▲한강 다리 1966 
 

▲한강 1966  

 

▲남대문 시장 1966

 

▲남대문 시장 1966


 

  



50년대 한국의 이모저모                             

            

 50년대의 한국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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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역을 알리는 푯말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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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달성군에 있는 예배당에서 미국인들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한 아름씩 안겨주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보입 니다 (대구 달성이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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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조선 후기의 장독대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온듯 합니다
저 안에 된장 고추장 등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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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를 돕는 미국인 청년, 그 옆에 쉼을 갖는 농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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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사진입니다
전쟁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이를 업고 보따리 하나만 들고 고개를 숙 인 모습으로
어딘가 가는 모습처럼 생각이 되기도 하고 그 뒤에는 아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처량해 보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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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들이 곰방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사람을 신기한듯 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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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장이 서는 날의 장터 모습 같습니다. 소들을 팔려고 몰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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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은 반소매의 짧은 모습인데 아이들은 예쁜 한복을 입었군요 설날이면 추울텐데
가을 추석도 아닌 것 같고 초콜렛을 선물 받았는지 어린이가 즐거워 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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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어머니들의 옛 모습 같습니다 깔끔한 새 옷을 입었는데 명절날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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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장터의 모습같습니다. 거의 소를 파는 분들만 보입니다. 소 장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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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 같기도 하고 파 같기도 한데 수확을 거두며 즐거워하는 아낙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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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목 장사라 하나요? 이 분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 돈 세는 모습이 즐거운 표정입니다
여러분도 돈 많이 버세 요 그리고 선교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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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가마솥에 뭔가 음식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많이 만들어 나누어 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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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연설을 하는지 사람들이 한곳에 시선을 모으고 있네요 부흥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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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잔치날 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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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웬 거지떼? 아닙니다 저때는 먹을 것이 정말 부족했던 시절이라 합니다
우리의 어른들이 저렇게 살기 도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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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 같습니다
노랗게 기다란 것은 자장면 먹을때 나오는 단무지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닥꽝 저 무우를 자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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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에게 죽을 나누어 준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을 꿀꿀이 죽이라 불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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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를 사려는 사람이 입을 벌려 건강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소의 눈을 보고 입을 보면 건강한 소 인지 아는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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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궁. 아기가 벌거벗고 요즘 저렇게 했다가는 당장에 경찰관 아저씨가 부르겠지요?
신호등이 없던 시절 저 렇게 수신호를 하면서 교통정리를 했었답니다
당시 차라고 몇대 있었겠나? 미군들 자동차가 대부분 이었을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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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에 팔려가는 돼지 어느 잔치집으로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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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학교의 모습 같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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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의 모습인데 큰 갖을 덮어 쓰고 걸어가는 아저씨씨를 옷차림이 참 다양합니다
미국의 문화와 조선문 화가 섞인 근대사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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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 선교사로 보이는데 코 큰 미국인을 보는 눈길이 신기한듯 모두 쳐다봅니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탱크가 아니라 승용차입니다 요즘처럼 날렵한 것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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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라는 숫자가 써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사진은 1954년도
그러니까 전쟁이 막 끝난 후의 모습이네요 아이들이 죽 같은 것을 먹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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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꼬마들에게 저런거 머리에 얹고 가라면 큰일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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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아이들의 놀이터 같습니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습니다.
지금은 찾아 볼수 없는 판자로 만들은 담장이 뒤에 있는데 별로 보기는 좋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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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하의 원조를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베너를 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참으로 가난한 시절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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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에는 아이들이 있고 주위에는 어른들이 있는데 무슨 학교 입학식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는 컨테이너로 만든 막사도 보이고 저런 둥근 컨테이너 막사는 필자가
한국에서 군대생활 할때 지냈던 막사 이기도 한데 여름에는 덥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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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40년의 아품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그날 ㅡ
창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무심한 산천은 그렇게 침묵했다.
잘가거라고 한번만 시선 줬어도 이리 서운치는 않았으련만 ㅡ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갈갈이 내 깃발을 찢어놓았고 춘천역을 떠난 부산행 수송열차는 기적도 금새 목쉬어 버렸다.
기약없는 이별은 안개되어 터엉빈 너와 내 가슴에 스멀스멀 밀려 들었지.
영아~ 순아~날 잊지 말아다오.
조국아~내 조국아~날 기억해 다오.




누구를 위한 보냄이었던가?
무엇을 위한 헤어짐이였던가?
부산항 특별부두를 가득메운 깨알같은 군상들은 저마다의 사연들을 감추고 한마음 한목소리로 외쳤다.
조국의 영광과 자유수호의 사명감에 충만하여 이역만리 전쟁터로 떠나는 자기들의 젊은이를 위하여 외쳤다.
부디 잘싸우고 살아서 돌아 오라ㅡ

유령처럼 버티고 선 수송함의 까마득한 굴뚝을 보면서 한순간 백치처럼 하얀 마음이였었지.




'어무이~'
'내 새끼야~'
떠나는 자 보내는자 모두의 가슴엔 퍼석퍼석 손대면 흩어질 먼지만 남았다.
한달동안의 지옥훈련에 몰라보도록 까칠해진 아들의 얼굴을 부비며 어머니는 그렇게 하염없이 통곡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조국의 내 젊은이들을 지옥같은 전쟁터로 보내는 마음이야 누구나 다름이 있었겠으랴.






가고 옴은 원래 기약된 것이 아닌것.
바람이 흔적 있음을 보았느냐.
가물가물 멀어져 가는 저것이 내 조국 내 형제로구나.
아아~ 그날은 파도도 잠들었고 갈매기도 울음을 그치더구나.




거치른 남지나해를 가르고 일주일만에 도착한 그곳 월남은 은은한 포성과 뒤섞여 이따금씩 들리는 팬텀기 굉음을 빼놓고는
하얀 모래사장을 사그락 대는 물결과 향기로운 야자수 내음 그리고 아오자이깃 펄럭이며 한가로히 해변을 걷는
남국의 아가씨들 우수찬 눈망울에 취하는 아름다운 낙원이였다.
저길보라~그토록 작열하던 포성이 멎은 투이호아 혼바산위 장군바위의 평회스러운 모습을 ㅡ




그러나 무서운 불꽃놀이는 7년여 동안이나 계속됐다.
아니, 그것은 연인원 32만여명 참전에 5,000여명의 전사자와 2만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지금도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수만의 고엽제전우들의 끝나지 않은 싸움... 아직도 현재진행이다.
그대들은 알고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굵은 주사바늘을 팔뚝에 꽂은채 한웅큼의
알약을 삼켜야만 살아갈수 있는 우리 참전 전우의 참상을 ㅡ



쏘고 또 쏘고...인간이 할수있는 온갖 잔인한 죽음의 놀이가 산하를 뒤덮는다.
존재와 소멸의 모호한 線ㅡ




벌겋게 단 M16 총구가 채 식기도 전에 살육전은 계속된다.
죽이지 않으면 죽여야하는 선택이 필요없는 전쟁이란 이름의 제로섬 게임 ㅡ
아아~생사를 함께한 내 전우인데...





살았니? 죽었니? 조금전까지도 한가치 담배를 맛있게 나누어 피던 너였다.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내 널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참호속 어딘가에 작열한 포화야~ 너 한떨기 저승꽃ㅡ
죽음을 입�우는 찬란한 교항곡ㅡ





어쩔수 없이 전쟁이란 마물의 희생이 되어야 하는 민간인들 ㅡ
그래서 비록 인간에 의해 저즐러 진것이지만 그것은 하늘이 내린 천형과도 같은 것ㅡ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주민을 보호하라 」채명신 주월사령관의 민사작전
전략에 따라 우리 한국군은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포염속에서 어린아이를 구해 내었다.
일부 좌경사상에 물들은 자들의 '양민학살'운운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이는 목슴바쳐 자유수호를
위해 싸운 32만 참전군인들을 모독하는 행위여서 다시금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금치 못한다.




승리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텅텅빈 페허만 남은 격전지엔 파헤쳐진 흙구덩이와 타다 만 나뭇가지만 앙상하구나.
일순간에 모든것을 앗아가는 상실의 극치 ㅡ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었단 말이냐..






내 너를 전투중에 잃어버려 다시 찾아왔건만 너는 간곳이 없고 구멍뚫린 철모만 여기 딩구는구려.
전우야~전우야~
돌아가서 네 어머니에게 무어라고 전하랴.




이제 ㅡ

폭격기 포물선을 그리던 푸른 하늘엔 흰구름만 여유로이 떠돌고
포탄이 작열하던 밀림엔 야자잎이 웃음띠며 너울거린다.
죽고 죽이던 저주의 유령이여
네 붉은 입술일랑 달콤한 입마춤을 잊어라
우리 이리 늙었다네.

사십년도 넘은 세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네.
꿈에서도 떠도는 악몽일랑 이제 그만 걷어 가게.
앙상한 병사들의 가슴일랑 더 이상 후비지 말게.
주름진 전우얼굴 마지막 웃음꽃 피는걸 보게 해 주게.



천연색 사진으로 보는 1952년

                 

            

재미동포 곽홍씨(80미국 볼티모어 거주)가  미 해병대 의무대

군의관으로 재직했던시절 

 당시에는 귀했던 컬러 슬라이드 필름으로 기록해 놓은 사진들..

  

 

» 1952년 가을 운동회 의무대가 김포 통진에 주둔했을 때 의무대 앞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운동회 풍경.

  

 

 

» 남대문로의 군용트럭 왼편의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과 전면에 중앙우체국 건물이 보이는 서울 남대문로. 중앙우체국 뒤로 명동성당이 보인다. 1952년 여름.

 

  

 

» 바닷가 달리며 부산 송도 바닷가의 어린이들. 뒤로 적산가옥들이 보인다.

1952년 가을

 

 

 

 

 

» 신나는 널뛰기 색동옷을 차려입고 설날 널뛰기를 하는 아이들. 1953년 설날. 김포 통진.

 

 

 

 

 

 

 담요로 만든 옷 입고 덕수궁. 전쟁 중이라 옷감이 흔치 않던 시절 미군 담요로 만든 옷을 입고 덕수궁에 온 소년들. 1952년 초.

 

 

 

 

 

 

 

» 결혼식 화동들 부산에 피난 가 있던 어머니를 뵈러 갔던 길에 만난 어느 결혼식의 화동들. 1952년 가을

 

 

 


» 야전병원의 민간인 미 해병대 의무대대 D중대 야전병원에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1952년 가을



잊혀진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사진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 진전.
-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 촬영)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면면을 보여준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 하는 영친왕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 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 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인듯.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 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1918년 1월25일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 촬영)




영친왕이 조선 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


(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1919년 2월 9일 고종 황제가 승하한 창덕궁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2006/05/26 15:27]출처 : 인터넷 한겨레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 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
.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독일어로 ‘Palastdame’(궁녀),
영어로 ‘ 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




상중의 이건 연미복 입은 고종 황제




영녕전 참배 의식중인 영친왕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홍릉 입구의 홍살문 -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하지 않는 문이다




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에 참여 한나인들 -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




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습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 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


가마에 탄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 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 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기념으로 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 발견.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회장은


그동안 미공개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


1962년 일 본에서 귀국한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촬영된 사진이다.




오열하는 궁녀들
-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左부터)





구한말 황족 한자리에
-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대원군의 62세 생일 기념
-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처음 마주친 것은


DVD 물로만들어진 조선황실의 기록이었다.


아는 것은 아는대로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은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선포 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 통감을 설치,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2월 3일 73세로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에 순종과 순명효황후와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이야기의 주인공이순정효황후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 례식




어떠한 뜻을 지닌, 무슨 사진인지 잘 모르겠다.




창경궁 인정전은 아닌것 같고 어디지?




운현궁 양관




창경궁 궁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



사라져가는 풍물, 풍습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허 생원은 말뚝에서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작가 이효석(李孝石·1907∼42)이 ‘메밀꽃 필 무렵’도입부에 그린 강원도 봉평 ‘5일장’의 풍경이다.
5일장은 장돌뱅이와 서민들이 빚어내는 공간이다.대전의유일한 5일장(4·9일)인 유성장.수수한 옷차림의 떠돌이장수들이 골목길에 빼곡히 좌판을 깔아놓고 옷과 생선 등을 판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온 듯 한 할머니는 각종 봄나물과 메주를 길거리에 풀어 놓고 팔고,풀빵장수는 ‘풀빵 사세요’를 외치며 지나가는 손님을 잡아끈다.
5일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콩,깨,조,수수 등의 곡식과 사과,배 과일에서부터 이불 등 공산품까지 즐비하다.봄이 와서인지 지난 19일 유성장에는 유난히 호미와 낫 등 농기구와 묘목,난(蘭)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6·25 이후 50년간 칼을 갈아 왔다는 할머니는 “예전에는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엔 돈이 흔해서인지 이빨 빠진 칼을 다듬어 다시 쓰는 이들이 별로 없다”면서도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시골에도 자동차가 늘어나고 주변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5일장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90년 73곳에 이르던 충남지역 5일장이 현재 52개로 30%가까이 감소했다.전국적으로도 87년 750곳에서 30% 정도줄어 지금은 526곳만 남았다.
30여년 전만 해도 나무를 파는 시골 사람들이 5일장에서자주 눈에 띄었다.나무를 한 짐 지고 장터로 나가 팔아 명태를 한 꾸러미 사가지고 해질녘에 돌아오고는 했다.대장간에는 칼이나 쟁기를 만들려는 이들로 붐볐다.
또 국밥 집에선 구수한 김이 인정처럼 모락모락 피어 올랐고 서민들이 모여 세상과 이웃들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정보망이 없던 그 시대의 5일장은 시골의 유일한 ‘열린광장’이었다.
장이 끝나면 객줏집에서는 술판과 투전판이 벌어지고 작부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당시의 5일장은아빠,엄마가 고무신과 꼬까옷을 사줄 수 있는 날이어서 꼬마들도 손꼽아 기다리며 덩달아 신바람이 났었다.
충남도 관계자는 “요즘 5일장은 예전 같은 맛은 나지 않지만 이마저 갈수록 줄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발췌 : 서울신문



 

 뗏목에실려 낙동강을건너는시외버스...

 

1950년대 시내버스정류소모습인데여 요즘에도 인기있는박카스광고판이 인상적입니다

 좌측은 버스와 전차 교통사고 모습입니다..

 

 

 

 

 

 

 

 

 

 

 

 

1960년후반의 서울시청앞을 달리고있는 시내버스모습입니다

 

 

 

 

1960년중반 서울시내모습입니다

요즘은사라지고없는 3륜화물차모습이새롭지요 ^^

 

 

 

 

  1960년초 서울 남대문앞모습입니다

 

 1970년초 경부고속도로모습입니다

 

 

 1960년중반 서울시청앞모습입니다

 

 

1960년대 강원도 홍천시외버스터미널모습

 

 

1965년 부산 충무동 시외버스터미널부근입니다..

당시 충무동에서 동래 온천장까지 운행하던 2번시내버스입니다..

트럭을 개조해서 만들었는지..

엉성해보이는 버스지만 부산시민의 애환이 깃든 버스입니다..

 

 

 1969년대 고속버스입니다..

형태는 요즘 고속버스와같이 앞문이 조수석에 있구요..

아마 경부고속도로인기봅니다..

신진여객....

 

 

 

 

 

 

1955년대 서울청계천부근같습니다..

서울 시내버스 칼라로보니 새삼스럽지요..^^

 

 

 

 

1958년도 시내버스주차장...

 

 

 

 

1978년..지금부터 30년전의 부산 서면로타리근처입니다..

한창 지하철1호선공사중이네요

당시 시내버스가 한눈에 들어오네요

포니..시보레택시가보이구요

23번버스는 운동장에서 부산대학까지 운행하지않았나 기억합니다...

즐감하세요  ^^*

 

 

 

 

1955년 당시 서울시내버스...

 

 

 

 

1970년초 경부고속도로를 시원하게달리는 한진고속버스입니다..

서울-부산을 약6시간만에 달렸어요..



북한의 남침용 땅굴                             

       

.

 

제1땅굴 

 

 

 

 

 

제2땅굴

 

 

 

 

제3땅굴 

 

 

제4땅굴

 

 

 

 

 

 



日本人의 잔인함

이것이 일본인의 실체 입니다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6.25 한국전쟁이 남긴 귀한 사진들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필자 주>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2004 박도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2004 박도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2004 박도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2004 박도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2004 박도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2004 박도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2004 박도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2004 박도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2004 박도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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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2004 NARA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2004 NARA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NARA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2004 NARA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2004 NARA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2004 NARA



1950. 8. 15. 피난민 행렬ⓒ2004 NARA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2004 NARA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2004 NARA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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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2004 NARA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2004 NARA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2004 NARA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2004 NARA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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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2004 NARA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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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2004 NARA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2004 NARA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2004 NARA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2004 NARA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2004 NARA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2004 NARA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2004 NARA



1950. 10. 1. 소공동 일대ⓒ2004 NARA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2004 NARA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2004 NARA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2004 NARA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2004 NARA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2004 NARA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2004 NARA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2004 NARA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2004 NARA

 

여기 귀한 자료인 6.25 한국전쟁이 남긴 귀한 사진들 작품은 울님들을 

위해서 스크랩 해와서 약간의 편집을 했습니다만 펌해가는 것은 자유이나

수고 하신 분들을 위해 원본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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