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침용 땅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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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땅굴 

 

 

 

 

 

제2땅굴

 

 

 

 

제3땅굴 

 

 

제4땅굴

 

 

 

 

 

 



 


           

                                                      

                 




구멍난 양말을 꿰매신었던 그때 그시절 
구멍난 양말을 꿰매는 지혜로운 어머니

우리들의 어린시절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떨리도록 져러오는 싸~한~ 아픔이랄까? 아니면 너무도 그리운 늘 꺼내어 보고픈 아름다운 추억이랄까? 오늘따라 유난히 우리들의 초등학교 시절이 불쑥 생각납니다. 그 당시의 어머님들은 학교(學校)에 갔다 오면, 양말 꿰매는 것이 일과(日課)이다시피 했었다. 학교 교실 바닥이 나무 바닥인데다가 나무의 결도 그리 좋지 않아서 교실을 걸어 다니면 양말이 튀어나온 나무결에 걸려 찢어지기도 했고, 날카로운 나무가시에 발이 찔리기도 했었다. 멋지고 이쁘다는 엄마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구제품의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얼레리~ 꼴레리~"라는 친구들의 그런 놀림을 받고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땡깡을 부렸던 그런 기억도 납니다.

날이 추우면 발이 시러워 고무신 안에 짚을 넣어 신었다. 발까지 피가 잘 돌아야 단잠을 잘 수 있고 발이 추위 얼었다면 바로 동상이 걸리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또 검둥 고무신조차 너무 귀해 웬만큼 헤져도 꿰매고 또 꿰매어 바닥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신고 다녔다. 때문에 아침에 꿰매어 신고 간 고무신이 하학(下學)길에는 다시 헤져서 ‘왕모래’가 신발 가득 스며들기도 했다. 이 경우는 기워 신은 헌 양말이 모래와 마찰(摩擦)되거나 양말 안에까지 모래가 들어가 ‘빵꾸’가 나기 일쑤였고, 발가락을 파먹기까지 했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면, 발이 시리더라도 양말을 벗어 책보에 싸들고 귀가(歸家)하는 경우가 많았다. 밤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어머니가 덧대어 꿰매 준다지만 꿔매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수십번 꿰매대니 나중에는 양말 모양이 이상하게 되기도 했고 아이들이 놀린다고 그 양말 신을 자식들이 아니지요. 그렇게 그 양말은 어느날 슬그머니 아궁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답니다.


 

 

겨울이 되면 그때 혹독했던 추위와 유행했던 나일론 제품들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너무 좋은 옷과 양말이 많아 추위에도 외출 걱정이 없답니다. 요즘 누가 헤진 양말를 신고 다니던가요. 가격도 저렴하고 흔하고 흔한 게 양말인지라 조금만 목 부분이 늘어나거나 닳아서 헤어지면 버리고 새 양말을 신지 않습니까. 까마득하게, 그러나 또렷이 발뒤꿈치 헤어진 나이론 양말을 두 겹 세 겹 기워서 신고 다니던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히려 발바닥을 여러 겹 기운 양말은 맨발로 다니던 나무 마루바닥에 미끄럼 타기가 더 좋아서 함부로 미끄러지며 좋아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이 추억으로 잠시나마 스쳐갑니다. 그러나 눈앞이 흐려지며,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헤어진 양말 이 주는 상징성과 주소지를 옮기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평양기생과 대동강 물장수등 생활

그 때 그시절 더위 극복법

            

 

'한강인지 바다인지…' 1961년 7월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한강 인도교 아래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1978년 7월 서울 남산동에서 무더운 여름 밤이 계속되자 길거리에 나와 잠을 자는 가족들.


1960년 7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가운데,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 현수막이 걸려있는 독립문 부근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노인들.


1958년 8월 동네 공동수돗가로 물을 길러나온 주민들의 물동이 행렬.


1980년 7월 거리에 좌판을 펴놓고 손금으로 운명을 점치는 점술가가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 손님이 없자 어린이들과 한담을 즐기고 있다.


1978년 5월 동네 공동수돗가로 물을 길러 모여드는 주민들의 모습.


1962년 7월 더위를 식히기 위해 마포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여름 수영을 즐기는 청소년들.


1970년 7월 강원도의 어느 농가 인근의 원두막에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의 모습.


1959년 7월 한 여름에 더위를 무릅쓰고 용광로 앞에서 철물 주조작업에 열중인 철물공장 근로자들.


1992년 6월 현대그룹이 에너지절약을 위해 본사사옥 에어컨가동을 중단한 직원들이 부채질로 더위를 달래고 있다.


1967년 7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박근혜(사진 오른쪽 끝) 대통령 등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경남 진해에서 해군 보트를 타고 거제시 장목면 저도로 가는 사진이다.


그 옛날 秋夕寫眞(추석사진)과 風景(풍경)

※...그때을 아싶니까...? ...※


"명절이데 싼 것이라도 사 입혀야죠" 추석 시장에 나온 어머니.
(동대문시장. 1962년9월10일)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열차. (1968년 10월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적이다.
기적이 울리는 가운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
(1969년 9월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 변하기도.(1969년 9월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
(1969년 9월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외에도 사고를 막기위해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대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했다.(1969년 9월24일)


추석 보름달 (1969년 9월26일)


귀성객이 버스 창문으로 오르는등 고속버스정류장 대혼잡
(광주고속버스정류장. 1970년 9월14일)


삼륜차까지 동원되어 1인당 1백원에 성묘객을 나르고 있다. 홍제동. (1970년 9월15일)


60~70년대에 선보였던 대표적인 추석 인기 선물 - 설탕세트.


잔뜩 찌푸렸던 추석날씨가 오후부터 차차 개자 고궁에는
알록달록한 명절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찼다. (경복궁. 1976년 9월11일)


꿈속에 달려간 고향.
지하도에서 새벽을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는 귀성객들. (서울역앞에서. 1978년 9월16일 새벽2시)


추석 전날 시골 풍경 (1980년 9월)


한복정장차림으로 추석제례를 올리고 있는 4대째의 일가족.
올해 1백살난 姜敬燮할머니가 시부모의 묘에 절을 할때 80세된 며느리
呂判敎할머니와 손자 손부 증손자 증손부와 문중일가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다.
(慶北 金陵군. 1980년 9월24일)


추석 귀성객 (1980년)


추석 귀성객은 돌아오기도 고달프다.
통금이 넘어 14일 새벽 0시20분에 도착한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있다. (1981년 9월14일)


광주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한 여의도광장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삽시간에 표가 동나버렸다. (1982년 9월19일 정오)


짐인지 사람인지... 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1982년 10월3일)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추석귀성을 위한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행렬이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끝이없이 늘어서 있다.
(여의도광장. 1983년 9월10일)


빗속의 귀성예매 대열 추석 귀성객을 위한
고속버스승차권 예매가 15일 서울여의도에서 시작되자
3분의1일인 1만5천6백여장이 팔렸다. (1985년 9월15일)


추석 고향길은 멀고도 불편한 고생길.
서울역 광장은 요즘 귀성객들이 하루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민족대이동의 인파로 붐비고 있다. (1985년 9월29일)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벽제국도.1987년 10월7일)


추석 고향길은 멀고도 불편한 고생길.
서울역 광장은 요즘 귀성객들이 하루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민족대이동의 인파로 붐비고 있다. (1985년 9월29일) 


추석 귀성열차표를 사기위해 서울 용산역광장에 몰려든 예매객들. (1989년 8월27일)


가다가 쉬다가... 추석인 14일오전도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는 귀성객과 성묘객들의 차량이 몰려 평소보다 2~3배나 시간이
더 걸리는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1989년 9월14일)


멀고 먼 귀성길 5일부터 추석귀성 열차표 예매가 시작되자
6일 발매되는 호남선 열차표를 사려는 시민들이
앞자리를 뺏기지 않기위해 텐트와 돗자리까지 동원,
새우잠을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역. 1992년8월6일)


공책으로 본 지난 100년 초등생의 삶

                 

 

 




'1960년대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의 공책에 적힌 ‘즐거운 하루’ 계획표. 
새벽 3시에 일어나 재건체조, 집안 청소까지 한 뒤 학교에 간다는 계획이지만, 
며칠이나 지킬 수 있었을까? 
오전 수업 끝나자마자 동생과 놀고, 저녁 먹고 놀 시간까지 별도로 계산한 모습에 웃음이 난다. 
집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고작 두 시간뿐이니, 학원 순례에 바쁜 요즘 초등학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여유롭다.






'일제 강점기 하의 ‘국어 시간’이라 함은 일본어 시간을 의미했다. 
한국어는 모국어가 아닌 조선어로 분류되어 따로 수업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의 산수 학습장은 수식을 계산하기 편리하도록, 
큼직한 여백 많은 칸으로 구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공책. 원래 있는 그림은 오른쪽 하단의 꽃병 그림뿐이었지만, 
공책 가운데 과목과 이름을 쓰는 난 사이에 태극 문양이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옛날 학생이나 요즘 학생이나 공책에 낙서하기는 똑같다.






'1949년 논산공립농업중학교 학생이 썼던 갱지 공책. 
종이 수급 상황이 좋지 않은 시절인 탓에 인쇄 질이 조악했다. 
‘NOTE BOOK’이라는 영문 표기에 서양 장식 문양을

그려 넣은 노트는 이후 대학노트에서 즐겨 썼다.






'1947년경으로 추정되는 국어 공책. 테두리와 과목, 
이름 쓸 밑줄 등 꼭 필요한 부분만 인쇄된 공책이었다.






'1950~6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짓기장.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는 개미의 모습으로 근면 성실의 미덕을 설파했다. 
아리랑 노트는 당대 가장 이름 있는 공책 회사 중 하나였다.






'1968년 12월 5일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은 교과서를 비롯해 공책 등 학용품에까지 인쇄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시의 맹세문인, ‘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는 글 역시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다. 







'당시 유행했던 만화 판박이가 공책 곳곳에 붙어있다. 
미술 공책에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의 산수 공책. 서울노트 제품.







'1960년대에 제작된 국일사의 국어 공책. ‘
국민학교 지정 노트’라는 선전 문구가 들어가 있다.







'전북노트에서 제작한 일기장.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 실사가 등장했고, 
색채도 더 풍부해졌다. 아이들의 복장은 지금 보아도 세련된 감이 있다. 
남자아이의 반바지 차림은 부유층 자녀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도상이다.







'1970년대 그림일기 표지로, 일상의 모습을 연출한 사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모습이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무전기는 당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70년대 국어 공책. 당시 유행했던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1~2라는 표시는 사용 연령층(초등학교 학년 표시)을 의미했다.







'앞표지는 사진이나 그림을, 뒷면은 세계의 자연이나, 
지리 등 정보를 수록한 형식의 공책이 많았다. 1980년대 새한노트.






'화사한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배드민턴과 축구공을 든 아이들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배경의 한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풍경이다.






'호돌이, 둘리 캐릭터를 도입한 (주)영문구의 칸나 학습장. 
1987년에 제작되었으며, 당시 가격은 140원이었다.






'1990년대 모닝글로리, 바른손 등 팬시문구 업체는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고생들은 각 과목의 특성에 맞춰 캐릭터를 그려 넣은 과목 노트를 장만하기도 했다.






'인기 만화 ‘궁’을 표지로 가져온 최근의 공책. 
과목이나 이름을 적는 난과 같은 실용적인 항목은 이제 공책에서 필수 사항이 아니다. 
표지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학창시절 추억사진들                             

       
* 조개탄 난로, 양은 도시락, 주판놓기...그 옛날의 학창시절 추억사진들 *

시험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책상위에 올라와 책상을 반으로 갈랐던 책가방,
난로 위에 놓아두었다가 태워 먹었던 양은 도시락, ‘쭈르르’소리를 내며
계산기를 대신했던 주판. 누구나 한번쯤 거쳐 왔을 학창시절의 모습들이다.



[ 난로가 있는 정겨운 교실 풍경 ]




[ 시험보는 날 ]




[ 주산 수업시간 ]




[ 야외에서의 미술시간 ]




[ 신체검사 받는 날 ]




[ 즐거운 휴식 시간 ]




[ 부채춤 추던 어느 운동회 날 ]




[ 꿈을 날려보던 날 ]




[ 억울한 (?) 벌 받기 ]


               

'대전부르스'의 사연                    

1948_Daejeon.jpg
1948년의 대전역 모습


1959년 어느날 밤 12시40분경.
산책 나온 듯한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내 플랫폼 가스등 아래 머문다.
청춘남녀가 두손을 꼭잡고 눈물 글썽한 시선으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북쪽에선 남자를 떠나보낼 목포행 0시50분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가 시를 쓴다.

대전블루스 가사였다.
사내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 직원이었던 최치수씨로 지방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최씨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씨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대전블루스를 완성했다.
가수는 블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로 정해 녹음에 착수했다.

출반 3일만에 서울 지방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대전블루스는 야간작업까지 강행, 창사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작사. 작곡가, 가수에게 특별보너스와 월급인상 혜택이 돌아갔다.

1950_Daejeon.jpg
1950년 9월 전쟁으로 폐허가된 대전역


십수년이 흐른 뒤 이노래는 조용필의 리바이벌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순배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척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병을 입에 대고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피서철이면 대전역 광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한잔의 술과 함께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즐겨부르기도 한다.

술이 뒤따라야만 제목청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래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잘담고 있다.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 처럼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다.
80년대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와 임철우의 중편소설 사평역 은
해방과 6.25, 조국 근대화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 적으로 그려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귀향하는 기분으로
/침 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의 이 시는 당시 대전발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묘사한 듯하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0시50분열차는 지금 없다.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05분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씨와 김부해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 나온다.

. [ 출처 : 전남대학교 (http://chonnam.chonnam.ac.kr ) ]


日本人의 잔인함

이것이 일본인의 실체 입니다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특종> 너무너무 귀한 한국 근대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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