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언제 지어졌을까?

 

1930년에 지어진...

"미쿠니(三國) 아파트"로...

사원용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미쿠니아파트는 콘크리트 건물의 4층 높이에...

외관도 현대식으로 설계되었으며...

4개의 다다미 방과 부엌, 화장실을 갖추었고...

개별 난방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제법 현대식 아파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아파트 안에 공동화장실, 식당, 오락실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관사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아파트는...

1932년 서울 충정로에 세워진...

 

"충정아파트"입니다...

아직 서울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부동산>

 

충정아파트는...

초기에는 건물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토요다(豊田) 아파트"로 불렸으며...

한국식 발음인 "풍전아파트"로 개칭한 후...

다시 "유림아파트"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지역 명칭을 붙여...

"충정아파트"로 부르고 있습니다...

 

6층 건물로 지어진 충정아파트는...

초기에는 아파트로 사용하다가...

이후에 호텔로 용도를 변경하였다가...

 

해방 직후에는 만주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들이 양민을 학살한 장소로...

서울 수복 후에는...

유엔군의 호텔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79년 도시계획에 의해...

52가구 중 19가구(약 270평)가 헐리면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충정아파트도 그대로 안고 함께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는 어딜까요?

 

1941년 부산토지공사가 지은...

4층 높이의 아파트인...

"청풍장"이 부산 최초의 아파트입니다...

 

<사진 출처: 부산일보>

 

1980년대까지는...

아파트 외관이 너무 노후화되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넓어...

집주인이 엄청난 부자라...

세 번 놀란다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당시에는 최고급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중앙에 정원이 있는...

최초의 "중정식" 아파트는...

1965년에 지어진 "동대문아파트"입니다...

 

중정은 지붕이 없는 형식인데...

이는 이후...

대한주택공사 건축의 기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대문아파트는...

건축 초기에는 연애인들이 많이 살아...

"연애인아파트"로 유명하였으며...

영화 "숨바꼭질"의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서울문화포럼>

 

<영화 "숨바꼭질" 스틸컷>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1967년에 종로에 지어진 "세운상가"입니다...

 

<사진 출처: 도시개발신문>

 

세운상가는 70~80년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메카로...

우리나라 초창기 컴퓨터 시장을 지배했던...

삼보컴퓨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용산전자상가의 등장과 함께...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한때 세운상가 철거계획이 진행되었으나...

현대상가만 철거하고...

나머지 상가들의 철거계획은 백지화되었으며...

현재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아파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저 건물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하고...

저곳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분양하는 신축아파트에...

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추억의 시골 점빵 (?) ...


어렸을 때 동네마다 있었던 구멍가게...

요즈음 세상에 시설이 현대식으로 좋은 곳만 찾아
다니는 세상이라 위생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하지만
우리네 사는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집이 낡고 환경이 열악해서 그런가 했는데????
아주 우리 어렸을때의 가게 모습이 그대로 이다 보니 !
옛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게 좋아 보입니다.

들어오기 전까지 기분이 그랬는데 들어와서
옛 생각을 하니 모든게 정겹고 사랑스럽습니다.
정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 드링크 알프스라고 아세요?
알프스 빈상자가 전시품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위에 제비집 2개가 있습니다.
문은 옛날 미서기 유리창문인데 요즈음 보기 힘들지요.



꽂아서 돌리게 되어 있는 유리창문 잠금고리 입니다.



가게안의 물건 진열대 입니다.
옛날에는 깨끗했을 텐데 낡고 오래된 탓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유명 마트나 백화점과는 다르지만 사람사는 시골의 정서가 듬뿍 베어나옵니다.



가게 기둥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사용용도가 무엇일까요?
병따개 입니다. 재미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방에서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술한잔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한쪽에서는 열심히 화투(?)를 쳤겠지요?

그시절 추억 느껴 보셔요               

 

 

 

 

 

 

 

 

 

 

 

 

 

 

 




위대한 어머니의 삶               

 

 



1959년 고구마를 길거리에서 아이와 함께 팔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아이를 들쳐업고 장사하기위해 물건 떼러가는위대한 어머니
1961년 부산


1962년 부산

생선을 사서 아이를 어우르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신문잡지 옥수수를 팔고 있는 어려웠던 그시절 1967년 부산


아이를 품에 안고 너무나 힘겨워 하는 위대한 어머니
1971년


1974년 사는게 왜 이다지도 고달플까요
아무도 사는 이 없는 자판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

1975년 자장면이 있던 시기 한그릇을 사서 아이와 나눠먹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1976년 가족들의 밥을 짓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


  



불과 50여년 전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 불과 50여년 전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
♠ 풍요로움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옛날 어린이들 ♠
누더기 옷에 헐벗고 굶주림에 살았어도
따스한 온정이 흐르던 시절 이었습니다.

추운겨울 냉기가 감도는 방에서 나와 따듯한 햇볕에서
늘 언몸을 녹이곤 했지요. 헤진 옷을 입고 살아도 다들
그렇게 사니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어머니~ 추운겨울 양말이 없어 맨발이
시려도 어머니 등에 업히면 엄마 품에서 나는 젖내음과 따
듯하고 포금함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투방집=나무로 얼기 설기 쌓아서 흙으로 빈 공간을 막아서
지은 집입니다.


소 외양간에 창을 만들어 소 여물을 먹이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소가 재산목록 1호였으며 사람은 굶어도 소는 늘 따근하게 쇠
죽을 끓여서 주곤했지요. 물론 소없는 집이 대다수였지만....


두메산골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월동 준비를 해놓은 장작더미
앞의 세모자입니다. 초라한 모습과 천진 난만한 표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어놓은 너와라는 지붕이지요.

겨우살이를 위해 준비해둔 옥수수와 산골의 가정의 풍경입니다.
옥수수 죽이나 감자등으로 연명하며 겨울 나기를 했지요.


아이를 업고 김을 메는 우리들 어머님

신문팔이, 신문배달 참으로 어렵게들 사셨습니다.

추수가 끝난 동구밖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로서 최고였지요.

어촌의 아이들이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 어포를 말리는 중입니다.

생활은 어려워도 꿈과 희망이 넘첬던 시절이었습니다.
텃밭의 짚더미는 추위도 녹여주고 놀이터로 활용되고....


학교 다녀오면 의례 부모님 일손을 돕고 밤이돼야 숙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물 가물한 호롱불 밑에서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하다 머리카락 많이들 태웠었지요. 연필심
마져도 품질이 좋지 않아 <침을 발라 두어자 쓰고 또 침 바르고...

암닭이 알을 놓기가 바쁘게 책보허리에 메고 따듯한 계란을
들고 학교로 내달렸지요. 문방구에 가서 계란으로 공책이나
연필등 학용품으로 물물 교환했답니다.뛰어가다 엎어져
계란은 깨지고 눈물 콧물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금방 낳은 계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

학교 다녀와선 어김없이 지게지고 밭으로,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곤 했지요

가축들도 거두고, 한겨울에 고무신 신고 신발이 꽁꽁 얼서서
발에 붙어 떨어지지도 않았답니다. 그때는 동상 안 걸린
아이들이 이상했지요

설걷이를 하기 위해 빈그릇 솥가마등을 안고 동네 우물가로
설걷이를 하러 가는 모습입니다. 가마솥 뚜겅을 머리에 쓰고
가는 모습이 설걷이를 많이 해본 솜씨 같습니다.

지게를 못지는 여자아이들은 나무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산에서 내려오다 많이도 굴르고 다치고......

먹고 살기위해 학교 다녀오면 길거리로 구두딱이, 껌팔이,
신문팔이 무엇이든 했답니다.

구두를 닦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고달퍼 보입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돕고 있읍니다. 요즘 머리에 물건 이고
다닐 수 있는 어린이들은 아마 없겠지요.

부모님들은 공사장이나 들에 나가고 어린들은 학교 다녀와서
동네의 잔 일거리들은 다 하였지요.

곡괭이나 삽질도 잘했지요.

당시 정부에서 덩그러니 학교 교실 하나 지어주면 나머지
모든 공사는 학생들 차지 였습니다. 돌을 이고 지고 학교
축대 쌓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머리에 돌을이고 있는
어린이 모습.. 돌을 어깨에 맨 아이...

배타고 나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소먹이러 가고...비록 힘들게 살았어도 국경일이면,
산골마을 독가에서도 꼭꼭 태극기 게양 했지요...

초가집 앞 텃밭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네요.

한겨울 강아지를 안고 따라로운 햇볕을 쬐고있습니다...
강아지 안으면 온몸이 따듯했지요...돌아가면서 안고,
순서를 기다리는 두어린이 표정이...*^^*

엄마가 세수시켜 줄 때면 제인 먼저 코풀어! 하시고 ...
따듯하게 물데워서 어린 동생들을 돌아가며 세수를
시키셨지요.

아파도 병원이 없어서, 너무 멀어서, 늘 집에는 아까징끼
(머큐롬)을 비치해두고 발라주시곤 했지요. 자식의 아픈
고통을 대신하듯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깝게 보입니다.

이발관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동네 한 두곳 이발기계 있는
집에가서 머리를 깎고 했지요. 부실한 기계로 머리털 뽑혀서
눈물은 줄줄...

간혹 사회 복지가들이 학교 찾아오시어 사탕이나 먹을것을 전해주시고...

아이를 등에 업고 갯벌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곤 밤이면 아고고
허리야! 고통으로 잠못 이루시던 우리 어머님들 이셨습니다

 

 


지금은 볼수없는 추억의 체인점들            

 


한때 추억의 장소였지만 점점 사라져가거나 아예없어진 체인점들




추억의 교육자료


 

▲ 1950년대 셈놀이 주판 1950년대 셈놀이를 하는데 쓰던 어린이 주판이다.
50년대 절박한 시대상황을 엿볼수있는 놀이기구로 나무와 철사로 만들었다.
 
▲ 1957년 졸업앨범 단기 4290년(1957년) 군산국민학교의 졸업기념 앨범이다.
 
▲ 1960년대 국민학교 시험지 5학년 국어고사 시험지로 곳곳에 한자가 섞여 있다.
 
▲ 1964년 국민학교 생활통지표 표지가 예쁜 성적표로 행동발달사항 가나다와 교과학습발달상황 수우미양가에 붓뚜껑으로 찍는 방식으로 표시했다.
 
▲ 1970년 어린이 저금통장
 
▲ 1968년 국어 읽기 음반 국민학교 3학년생들이 읽기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레코드판이다.
 
▲ 1968년 어린이 행진곡 음반 국민학교 학생들이 동요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레코드판이다.
 
▲ 1970년대 온도계 ~~~~~~~~~~~~~~~~~~~~~~~~~~~~~~~~~~~~~~~~
 
▲ 1975년 졸업장과 졸업장통 1975년에 함백국민학교를 졸업한 진용선학생의 졸업장과 졸업장을 보관하던 통이다.
 
▲ 1960년대 주판 주판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송나라 말기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 셈을할 때 사용하는 계산기구다. 산판(算板), 수판(數板)이라고도 하는데 위칸에는 하나 또는 둘, 아래칸에는 넷 또는 다섯개를 꿰어 위의 알 한 개를 다섯으로, 아래 알은 하나로 셈을 쳐서 십진법으로 계산한다.
 
▲ 1970년대 책가방 1980년대 초까지 교복을 입었던 남학생이면 누구나 들고다녔던 가방이다. 여러 권의 교과서와 함께 도시락이 자리잡고 뒤쪽에는 신발주머니도 넣고 다녔다. 도시락 반찬 국물이 흘러 가방 한 구석이 얼룩지고, 무거움 때문에 한 쪽 어깨가 처지곤 했다.
 

▲ 1970년대 표어 명찰 원호의 달, 불조심, 쥐를 잡자, 민방위의 달, 저축의 달, 산불조심 등 계몽표어를 이름과 함께 달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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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와서 올린자료-



 


 

   

   

가슴 찡한 사연들               

            

불행이란 악성바이러스를 이겨내는 항체’

사진작가 최민식, 시인 조은이 엮어낸 감동적 사진에세이

 

삶이 고단하고 힘드신가요? ‘인간의 불행이라는 악성바이러스를 꿋꿋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항체’가 여기 있습니다. 50년간 인간을 주제로 삶의 진실을 파헤쳐왔던 사진작가 최민식(76)씨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불행'을 껴안는 그의 넉넉한 품이 그려집니다. 최근 시인 조은씨가 최씨와 함께 펴낸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샘터)는 고단한 삶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최씨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담아왔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장사하다 끌려가는 아주머니와 고구마 몇 개 얹어놓고 행상을 벌이는 아이와 어머니, 길가에 지친 몸을 기댄 부자(父子) 등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이 연이어집니다. 그 자신 또한 팔리지 않는 사진만 찍느라 줄곧 가난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네들 삶의 진실이 더욱 진하게 그의 사진에 묻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최씨의 카메라가 이처럼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치열하게 움직이며 찍어낸 사진에 시인 조은씨가 간결한 글로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최씨가 1950년대 후반부터 2004년까지 담아온 여러 서민들의 모습과 느낌에 감동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찍고 써 내려간 과거의 불행으로 잠시 되돌아가봅니다. 과거를 보면서 힘겨운 현재를 잠시 위로 받아봅니다. 인생을 담은 노사진작가와 한 중견시인의 질퍽한 감동의 사진에세이를 이제부터 간략하게 소개해봅니다.

 

 

 

 

어머니...어머니...

 

 

 

왜 어머니의 팔은 아이를 품어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어린 소녀는 힘겹게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일까요?

 

(1969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서 있는 어머니 젖을 누나 등에 업힌 채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 어머니는 손에 밴 비린내 때문에 아이를 안지 못 하고 있다.)

 

 

 

 

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에게 이 순간, 손을 내밀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뒤에 있는 간판과 대비된다.)

 

 

 

 

삶을 응시하는 자들이 키워가는 세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고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질서와 안정감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글픕니다.

 

(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일찍 어른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미래가

암초처럼 모습을 나타내곤 합니다.

 

(1957년 부산. 이 시절에는 두 소녀처럼 학교도 못 가고

가사를 돌보며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리의 부녀를 눈여겨보세요. 손으로 소음을 막아주고,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잡아주며 아버지는

딸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1963년 부산)

 

 

 

 

본질에서 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빨래는 남루를 씻어버린듯 눈부시고

햇살은 명랑한 아이들처럼 골목을 뛰어다니지요.

 

(1963년 부산. 태극촌이라는 종교마을의 전경.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판자촌은 당시 북한과 타지방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불순함이라고는 없는 노동에 저토록 수모를 당해야 하다니

때로 세상의 정의가 불한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에 끌려가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

 

 

 

 

육신의 한 부분을 미리 자연 속으로 돌려보낸

사람들의 삶도 도무지 가벼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삶의 속도에 의해서 진창을 벗어날 때도 있고

속도 때문에 진창에 처박힐 때도 있습니다.

 

(1978년 부산. 역전에서 비오는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튈까봐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

 

 

 

 

이토록 다른 정서적 이질감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여유 있기 때문이지요.

 

(2002년 부산. 역전의 공중전화에서 두 여인이

전화를 걸고 있지만 그 모습이 묘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장면)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

 

(1975년 부산. 범어사에서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어른들 세계로 팔을 쭉 뻗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빛을 향해 발돋움하겠지요.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자신의 삶을 스스로 더 가파른 곳에 올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라야 평지에 있는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것일까요?

 

(1968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짐을 기다리던 지게꾼이

사진작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잘 찍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외로움과 죽음의 관념을 이겨내고 비로소 환해지는 우리의 영혼처럼...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큰 사고들 ..

※주의※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큰 사고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관련 사고에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1970년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2동에서 발생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입니다.

전적으로 당시 정부의 날림공사 + 부패 + 전시행정 등등이 모두 결합한 사고로,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왜 아파트를 저런데다 짓느냐는 질문에

"야 이 새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보일 것 아냐!"라고 한건 유명합니다.


6개월만에 날림으로 지은 아파트가

지반도 다지지 않고

애초에 부족했던 한동에 1100만원 정도의 공사비를

하청과정에서 동당 125만원씩 떼먹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시공업자까지 무면허.



1971년






1971년 12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 호텔에서

발생한 한국 최대최악의 화재 사고입니다.

호텔 화재에서는 세계에서도 유명한 규모입니다.

총 사망자 166명으로 인명피해로는 한국 내 역대 5번째입니다.

대부분의 비상구가 잠겨있었고

스프링쿨러 등 진화시설도 미흡해서 인명피해를 키웠습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질식하거나 뛰어내리다가 희생됐습니다.


1983년




kal.PNG

1983년 9월 1일에 일어난 민항기 격추 사건인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입니다.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으로 뉴욕의 공항을 출발해서 앵커리지

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의 여객기가

사할린 근처의 소련 요격기에게 격추당해 추락당했습니다.

당시 소련에선 그런 일은 없었다며 해당 항공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다가

다음 날 항법등을 키지 않았다던가, 경구에 응답하지 않았다던가 발표했고,

미국이 당시 일본이 녹음한 소련 공군기의 테이프를 공개하자 이후

"민항기로 위장한 스파이기였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UN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라

직접적인 항의도 불가능했었죠.




1993년






1993년 3월 28일 부산 북구 구포역 근처에서 일어난 열차 전복 사고로,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탈선-전복하여 78명의 사망자를 내고

198명이 부상당한 참사입니다. 기관사가 생존했기 때문에

전후 상황이 금방 파악됐는데,

전역인 물금역을 지나 구포역 정차를 앞두고 해당 구간을 통과 중

사고지점 100m 앞에서 선로 지반이 무너지는 것을 기관사가 발견하여

비상제동을 시도했지만 제동거리가 부족하여 기관차와 발전차가

무너진 지반 아래로 전복됐고, 뒷 차량도 탈선됐습니다.


참고로 사고의 원인은 선로 아래로 관통하는

전력관계 공사를 시공사 멋대로 발파까지 해가며 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공사는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혀

6개월 영업정지를 당하고

국내 공사 수주를 받기 힘들어졌는데

결국 해외로 가서 두바이에서 초고층 빌딩을 짓는 기업이 됐습니다.


.

.

그리고 4개월 뒤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cat.PNG

1993년 7월 26일, 김포 공항엣서 출발해서 목포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였던

아시아나 733편 여객기가 전남 해남의 한 야산에 추락한 사고입니다.

당시 목포공항엔 강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파일럿은 세번 착륙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네번째 착륙을 시도하던 여객기는, 3분후 목포공항의

관제레이더에서 사라지며 통신이 두절되고, 공항에서 10km정도

떨어진 어느 야산에서 발견됩니다.

총 탑승인원 106며중 68명이 사망한 사고로,

파일럿의 무리한 착륙 시도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이 사고의 3개월 뒤,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의 위도 근처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해서 292명이라는, 한국에서 사고로 3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사고입니다.

이 사고는 특히 인재로 꼽히는데,

먼저 출항 당시 기상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출항했고,

기기 조작도 상당히 무리수를 가했으며,

화물이 선박 앞쪽에 집중적으로 실려

무게중심이 앞으로 기우는 상황에서 결국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이 초과승선에는 위도의 관광객이 크게 늘어난 것도 한몫했는데

계속해서 관광객들과 위도 주민들은 증편을 요구했지만

영세업체라면서 허가를 거부했고,....




1994년






1994년 10월 21일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입니다.

32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하루아침에 멀쩡해 보이던 다리의 가운데가 뚝 떨어진

사고로 전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특히 붕괴시간대가 학생들의 등교시간이여서,

추락한 시내버스에 타고 있던 여학생들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pH4Zufv4M0Q#t=602)


당시 희생된 한 여학생의 아버지의 인터뷰가 싸늘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올 수 없다고 장담 못 해!

미리미리 방지한다고 하지만 이미 늦은거야!"


1995년






1995년 4월 28일에 대구의 상인네거리 근처에서

일어난 가스 폭발사고입니다.

대구백화점 상인점의 지반공사를 하던 인부가

실수로 가스관을 건드려, 가스가 유출되서

지하철 공사현장으로 모여 폭발한 사고입니다.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치솟았고

400m에 달하는 공사현장이 모두 붕괴했습니다

이 사고로 101명이 숨졌는데

특히 학교 근처인데다 등교시간이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는 아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문에

금새 묻히게 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건물붕괴사고입니다.

사망자 501명으로 테러/천재지변을 제외한

건물붕괴 사고중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건물붕괴 사고입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이후로 최대의 피해를 낸 사고로

그야말로 안전불감증의 결정체적인 사고입니다.

사고공화국이란 소리를 듣던

김영삼정부의 대미를 장식한 사고이기도 합니다.


이 이후로 전국의 건물의 안전성을 조사해서

전체 고층 건물의 14.3%가 개축이 필요하고

80%는 크게 수리할 필요가 있고,

단 2%만이 안전한 상태라는 결과가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1997년







국내에서 일어난 건 아니지만, 대한한공의 김포국제공항발

아가나 국제공항행 801편 여객기가 추락한 사고입니다.

1997년 8월 6일, 괌에서 일어난 229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입니다.

해당 공항의 시설미비 + 조종사들의 잘못된 착륙방법

고집 등이 원인이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사고현장 앞에서

국회의원들이 기념사진을 찍다가 걸려서

빈축을 샀습니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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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30일에 일어난 화재 사고로,

경기 화성의 씨랜드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어났습니다.

497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 554명이 있었고,

이 중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하여 23명이라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희생자가 늘어난 이유로는,

안전관리 문제가 심각했는데 우선 객실 내 화재경보기는 고장나 있었고,

소화기들을 쓰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인솔교사들은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련원을 멀쩡히 운영했던 것은

수련원 측에서 뇌물을 퍼먹였던 것인데

여기 관련되있었던 화성군수는

지금도 멀쩡히 지역유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일어난 화재사고입니다.

씨랜드 사건 4달만에 일어난 사고로, 사망 55명 부상

 78명을 낸 대참사입니다.

화재의 원인은 전기 스파크가 공사중이던 지하

노래방의 신나에 불을 붙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희생자가 늘어난 이유로는 비상구를 막아버리고,

창문을 통유리로 막아버리거나,

간판으로 쓰려고 다 막아놓았기 때문. 가장 큰 문제는 호프집 주인이

화재로 인해 사람들이 빠져나가려 하자 돈내고 나가라면서

단 하나 있는 출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였습니다.

참고로 이 인간은 5년간 교도소 복무 후 CCM가수로

변신해서 교도소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2003년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인명피해 순위로는

4번째인 대구 지하철 참사입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방화사고로, 관련자들의 대책이 미흡하여 피해를 키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철도사고중 최대급이며

세계적으로도 지하철 안전대책 마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사건입니다.


2008년







2008년 2월 10일에 일어난 숭례문 방화사건입니다.

70세 노인이 자신의 토지에 대한 보상액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경비가 허술해 접근이 쉽고 인명피해가 나지 않는,

그리고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숭례문을 불태웠습니다.

방화에 쓰인건 겨우 니스 3통과 라이터 하나....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야말로 문화재 하나가

전소한, 다른 의미의 대참사였습니다.


2012년





L.PNG

27일, 구미시 산동면의 구미산단 4단지의 휴브글로벌

불산 저장탱크에서 폭발이 일어나

10t가량의 불산가스가 유출되고 5명이 사망한 사고입니다.

폭발 당시에는 5명이였지만

불산오염으로 인한 후유증을 생각하면...


여기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불산제독이 가능한 장비를

보유한 주한미군 화학대대가 출동해서 도와줬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사고 현장을 찾은 당시 환경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마스크를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해 보이기 위해)

빈축을 샀습니다.


2014년







2014년 2월 17일, 경북 경주의 마우나리조트의 강당이 폭설로 인해

무너져 내려 OT를 왔던 부산외대 학생들이 매몰된 사건입니다.

총 1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고로 이 건물은 2009년에 완공된 후 안전진단을

단 한번도 안받았다고 하네요.

시공 중 설계도에 있던 지붕 구조물 하나는 생략한 것도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결국 안전불감증의 대가였죠.

이 당시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지만,

단 2달 후에 역대급 재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옛날 그시절의 추억어린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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