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7. 바울의 유언 : 마가와 바울 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바나바와 함께한 마가, 실라와 동행한 바울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1. 버가에서의 뒷걸음

버가는 소아시아 남쪽에 위치한 밤빌리아 지역의 고대 도시 중 하나이다. 버가의 현재 지명은 터키 남부지역에 위치한 무르타나(Murtana)이다. 버가에 대한 잘못 알려진 것중 하나는 항구도시라는 오해이다.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지나 도착한 첫 소아시아 도시라는 것 때문에 항구도시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버가는 해안에서 약 17㎞ 정도 떨어진 내륙 도시이다. 1차 선교 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곳을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다(행 13:13~14). 그리고 선교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도 버가를 거쳐서 돌아갔다(행 14:25).

바울의 선교는 로마 빌립보 에베소 등과 같이 대도시 중심의 선교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정뿐만 아니라 교통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고고학자들에게 버가는 유적들로 가득한 행복한 보물찾기 장소이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보존이 잘 된 방사형 노천극장 아스펜도스(Aspendos)와 투기장이 있다. 아스펜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A.D. 161~180) 때 지어진 것으로 부분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여 질만큼 잘 보존이 되어 있다. 그 외 1만 2000명의 관객을 수용하고 길이 234m 너비 34m의 경기장에서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던 안틱스 스타디온(Antikes Stadion)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가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두 번이나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지만 로마인들을 위한 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온 몸을 찢기며 믿음을 지켰던 초대 교인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또 다른 오해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계 1:11; 2:12) 버가모교회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중 버가에서 세운 교회라는 오해이다. 버가모의 현재명은 베르가마(Bergama/Pergamon)이다. 버가와는 약 620㎞ 정도 떨어져 있다. 버가모는 해발 3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버가모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사탄의 권좌'를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이로 인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순교를 감당해야 했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순교자 안디바의 순교가 이곳에서 일어났다(계 2:13). 요한계시록 2장 14~15절은 버가모교회의 책망으로 교회 내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킨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한 부류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황제숭배 등과 같은 방만한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로마인들 사이의 인사말은 '황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였다. 상대방에게 이 말을 들으면 똑같은 말로 화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초대교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니골라 당은 이들에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쳤다. 그 중 핵심 내용은 육체로 짓는 모든 죄는 구원의 문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니골라 당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나 성적인 타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교회 내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찍어 내지 못해 책망 받은 두 교회가 있는데 에베소교회(계 2:1~6)와 버가모교회(계 2:12~16)이다.

2.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어떤 이유에서 마가가 버가에서 선교여행을 중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행 13:13). 그러나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보면 이 결정은 지극히 마가의 개인적인 이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떠나…돌아가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코레사스'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리를 버리고 떠나다'의 의미인 '아포코레오'라는 단어에서 왔다. 누군가에게 자기의 일을 맡기고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던져버리고 떠났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은 이런 마가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마가의 행위를 배신행위로 간주했던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가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행 15:38). 바나바는 이 일로 바울과 심하게 다투었다(행 15:39).

바나바의 인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며 많은 무리가 바나바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었다(행 11:24). 바나바는 레위족속 사람이었고 유대식 이름은 요셉이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행 4:36).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돌봤고 구제와 헌신에 앞장섰던 사람이다(행 4:37). 또한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사람이다(행 9:27). 심지어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가 부흥하자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사역을 했다(행 11:24~26). 그랬던 그가 바울과 심한 논쟁을 하고 결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이다(행 15:39~40).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을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록쉬스모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 15장 39절과 히브리서 10장 24절에 두 번만 등장한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격려'로 번역되었지만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신랄한 반대, 말다툼'(sharp disagreement / sharp contention)으로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행 15:37~41). 이후 바나바의 이름과 행적은 더 이상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바나바를 언급하며 사역자로서의 바나바를 인정하며 서로 교제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 9:6; 갈 2:1,9,13; 골 4:10).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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