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예배드리니 정말 행복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유지하고 성전에 모인 성도들 ''감격''
1~7부 부활절 기념 감사예배 메시지에 은혜 충만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중단됐던 교회 현장 예배가 완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4월 26일부터 1~7부 모두 재개됐다. 만 두 달 만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된 성도들은 정해진 동선, 체온 체크, 마스크 착용 그리고 사방 1m 간격을 두고 앉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지만 성전에 입장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대상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했다.

 이영훈 위임목사는 "오늘은 사전에 교구로 신청한 인원만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아직 대부분의 성도들은 온라인예배를 드리고 있다"며 "하루속히 전성도가 함께 예배드리는 날이 오길 기도하며 전 세계 코로나19의 종식, 특히 해외에 파송된 670여 선교사와 사역지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도록 중보하자"고 말했다.

 이날 주일예배는 우리 교회를 비롯해 대다수 교회에서 부활절 기념 감사예배로 드렸다. 1~3부 예배를 인도한 이영훈 목사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23)라는 주제로 설교하며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대 기적이며 기쁨과 감사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평안으로 오늘날 온 인류에게 주시는 희망과 축복의 메시지"라며 "성령을 받고 복음 전파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며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영훈 목사는 또 "용서는 사랑의 결정체이자 부활 메시지의 완성"이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우리를 용서하신 주를 따라 우리도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4부 예배에서 ''삶의 심판의 두 가지 근원''(창 18:18~21)을 주제로 설교하며 "세상에 불의와 악이 가득해도 주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라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의 문이 앞에 왔을 때 회개해야 하고 성도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얻은 상처를 날마다 회개하며 삶의 방향이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용서받은 의인임을 기억하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앙으로 무장하는 성도들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도들은 그동안 예배를 향한 사모함이 컸는지 강대상에서 말씀이 울릴 때마다 힘차게 ''아멘''으로 화답하며 주를 향한 믿음과 헌신을 고백했다. 새벽부터 서둘러 남편 김종각 안수집사, 아들과 1부 예배에 참석한 방복자 권사(서대문대교구)는 "교회에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 기도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다"며 미소 지었다.

 전금순 권사(구로대교구)도 "인터넷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리다가 성전에 앉아 예배드리니 눈물이 났다"고 감사 고백을 전했다. 교회 출석을 고대했던 성도들은 교회에 오자마자 그동안 내지 못한 헌금을 감사함으로 드리는가하면 5부 예배에 참석한 청년들은 베다니광장에서 만난 교구 식구들과 반가움에 사진을 찍는 등 행복한 모습이었다.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0. 이스라엘의 제갈공명 아히도벨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최고 지략가의 잘못된 선택과 악한 계략, 비극적 최후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중국 삼국시대 때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중국의 전 역사를 통해 최고의 지략가로 알려져 있다. 조조에게 패한 후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그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갔다. 삼고초려(三顧草廬)후 유비는 제갈량을 얻었고 지방 호족 정도였던 유비는 제갈량의 도움으로 촉한을 건국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이후에도 촉한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바람에 파도가 바뀌듯이 적벽대전에서 일순간에 극적인 승리를 일궈낸 제갈량이 중국에 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에는 아히도벨이 있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제갈량이 되지 못했다. 사무엘하 17장 23절은 비극으로 끝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책사(策士) 아히도벨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1. 아히도벨의 등장

아히도벨의 계략은 일반적인 책사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사무엘하 16장 23절은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는 말은 제사장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받은 말씀처럼 신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히도벨의 지혜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탁(oracle)에 비유될 만큼 위엄과 권위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히도벨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히도벨은 유다 땅 길로 출신이었다. 그의 아들은 엘리암이었고(삼하 23:34),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었다(삼하 11:3). 그러니까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였고 다윗은 아히도벨의 손녀사위인 셈이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삼하 23:23~34).


2. 압살롬의 난 : 잘못된 선택과 악한 계략

성경은 다윗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자기편으로 만들었다(삼하 15:6). 그리고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된 후(삼하 15:10) 길로에 있던 아히도벨까지 그의 책사로 얻음으로써(삼하15:12) 역모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단숨에 거침없이 다윗성까지 무혈입성했다.

다윗성에 입성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베푼 첫 모략은 아버지인 다윗 왕의 후궁들을 강간하는 것이었다(삼하 16:20~23).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취함으로써 다윗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표식을 삼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아버지였고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기하는 것이었다(레 18: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는 반율법적이고 패륜적인 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짓도록 했다.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잡기 위해 그가 세운 책략도 악했다. 그가 세운 모사는 군사 1만 2000명을 자신이 직접 이끌고 그날 밤에 쫓아가서 다윗을 죽이고 돌아오겠다는 것이다(삼하 17:1~2). 반란의 주체인 압살롬이 아니라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아오겠다는 것으로 볼 때, 압살롬의 난은 아히도벨이 계획했고 이 역모의 방점을 본인이 찍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히도벨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삼상 24:3~4; 26:7~12).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울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삼상 24:6; 26:9).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볏단을 베듯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취했던 다윗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히도벨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책사였지만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반인륜적이고 반율법적인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려고 한 것이다.  


3. 아히도벨의 몰락

역대상 27장 33절은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謨使)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충신이었던 후새는 다윗이 예루살렘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성에 남았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에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다윗에게 그들의 계략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무엘하 17장은 아히도벨과 목숨을 걸고 다윗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후새의 전략이 숨 막히게 대립하고 있다. 만약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선택했다면 다윗은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새의 전략을 선택했고 결국 압살롬의 왕자의 난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아히도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목을 매고 죽었다. 그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분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압살롬의 난이 실패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산발한 채 맨발로 도망할 때(삼하 15:30), 계속 쫓아오며 저주를 퍼붓던 사울의 친족 시므이를 살려 줬던 다윗의 관대함을 몰랐던 것이다(삼하 16:5). 지략에 뛰어났던 아히도벨의 이름의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리석음의 형제''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처럼 아히도벨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사무엘하 17장 23절은 제갈량에 비교할 만한 최고의 지략가로서 왕의 책사는 될 수 있었지만 왕의 친구는 될 수 없었던 아히도벨의 비극적 삶을 말해 주고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레아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1. 인적 사항
①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의 첫째 딸, 라헬의 언니(창 29:16).
② '레아'는 '암소'라는 뜻. ③ 하란 출신. ④ 안력이 부족함(창 29:17).
⑤ 르우벤, 시므온 등 6자매를 둠(창 29:31-35;30:17-20).
2. 시대적 배경
레아는 B.C.2000년경 출생하여, 일가 친척이 뿌리를 내리고 살던 메소보다미아 하란에서 생활하다가 야곱과 결혼하여 낯설고 물 설은 땅에, 그것도 고정된 정착지도 없는 이주민의 신세로 가나안에 이주하여, 평생을 언약 백성의 조상으로서 역사적 기반을 닦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다 갔다. 그녀는 동생 라헬과 각각 두 자매의 몸종이었던 두 명의 시녀 도합 4명이 한 남자 야곱과 중혼하여, 그들이 얻은 12아들로 구성된 제3대 족장 가문의 제1정실 부인으로서 여성으로서의 관심은 별로 받지 못하였으나 6명의 아들을 직접 생산하였다.
3. 주요 생애 
| 결혼 전 시절 | 
하란에서 출생 | | 창 29:4,16 | 
결혼 후 시절 | 
야곱과의 결혼 | B.C.1922년 경(?) | 창 29:21 | 
르우벤, 시므온 등 6자녀를 낳음 | - |창29:21-35;30:17-20 
딸 디나를 낳음 | - |창 30:21 | 
가나안 이주 | B.C.1909년 경(?) |창 31:4-20 | 
죽어 가나안 땅에 장사됨 | - |창 49:30,31 |
4. 성품
① 특출한 미모는 없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기다린 인내의 소유자인듯 함
②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 신앙 인물(창39:18,20,32,33,35).
5. 구속사적 지위
① 아브라함 소명 이후 제3대에 이른 언약 가문의 족장인 야곱의 첫번째 정실부인.
② 장차오실 메시야의 육신적 직계 조상인 유다를 낳음(창 29:35;49:8-10;마1:2,3).
6. 평가 및 교훈
① 레아는 사실 야곱이 원래 원했던 아내가 아니었음에도 아비의 속임수로 야곱의 처가 된 여자였다(창29:25). 이것은 아비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강권에 의한 결혼이고 그 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차하게 한 결혼인 셈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녀는 언약 가문의 일원이 되어 훗날 구약 구속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육신적 어미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자의든 타의든 한 인간이 하나님 및 그 복음과 조우하게 되어 택한자의 범위안에 들게되면 누구나 큰 축복을 얻음을 보여준다.
② 레아는 인간적으로는 안력이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하여 남편의 사랑을 크게 못받았으나 그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그분의 은총을 받아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인 유다 외의 많은 아들을 낳은 즐거움을 얻었다(창29:35;49:9,10).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연약하나 하나님만을 믿고 의뢰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즐거움, 만족함 등을 얻을 수 있음을 본다(롬8:17,18;고후3:5).

[성지자료] 누가의 묘(에베소)

            


한글 안내판

 


영문 안내판

 


안내판

 


누가의 묘

 


누가의 묘

 


누가의 묘임을 입증하는 송아지그림(누가복음)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에 들어 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 뒤 쪽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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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미자립교회위원회, 마스크 손세정제 등 지원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사님들 힘내세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자립이 어려운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를 돕고 있는 농어촌미자립교회위원회가 16일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찬양축복교회와 이천에 있는 설성장로교회를 방문해 코로나19로 인한 예배 중단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힘을 보탰다. 이정부 위원장과 위원들은 목회자들에게 지원금과 함께 마스크와 손세정제 등의 생필품을 전달했다.

 평택 찬양축복교회 최해석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주셔서 성도님들께 드릴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천 설성장로교회의 류종관 목사도 “교회건축을 위해 받은 대출금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재정적 압박이 큰 상황이었는데 장로님들의 방문에 큰 힘을 얻었다”고 고마워했다.

 우리 교회는 1994년부터 26년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1만447개 농어촌 교회의 자립을 도왔고 219억 원을 지원했다. 현재도 매월 평균 327개의 교회를 지원하며 농어촌복음화에 힘을 더하고 있다. 올해는 농어촌미자립교회 지원금을 지난해 보다 1억 원이 늘어난 8억5000만 원으로 책정했다.

 이정부 위원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는 목회자들의 모습을 직접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농어촌 교회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또 “주신오토모티브를 운영하시는 권사님의 특별 후원으로 이번에 농어촌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며 성도들의 많은 후원을 부탁했다. 


투바공화국/이철성선교사 후임인 나타샤라목사의 인도

투바에 일어난 순복음 영성 되살리는 노력 필요

1992년 이철성 목사 첫 파송 후 급속 성장 
귀임 후 이단 성행하며 성도들 현혹시켜 
소련선교회 후원 및 중보기도 힘쓸 계획

 

 시베리아 남쪽에 위치한 투바공화국.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으로 우리에게는 생경한 이름이지만 순복음의 영성이 이 곳에 불어닥친 것은 1990년 초반의 일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 초청 성회에 참석했던 한 고려인으로 인해 투바공화국에 순복음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대통령 법률고문이었던 그는 당시 대통령에게 불교국가이긴 하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한다. 그리고 바로 대통령의 요청으로 우리교회에서 이철성 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됐다. 불교국가이지만 러시아 정교가 활동하는 이 나라에 순복음이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선교사가 세운 투바순복음교회를 비롯한 지교회를 통해 1000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교제를 나누게 됐다.
 이철성 선교사가 10년의 사역을 마치고 2004년 귀임하면서 투바순복음교회는 이 선교사로부터 양육받은 현지인 사역자가 담임으로 세워졌다. 간간히 본교와 연락은 오고갔지만 이 선교사가 귀임한 후 한동안 우리교회에서는 발걸음이 뜸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믿고 사역을 맡겼던 현지인 사역자가 교회를 처분하고 타지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중에 교회는 분열됐고, 책임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가 없자 성도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중 나타샤라는 여 목사가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순복음의 열정에 불을 붙이려 노력하다 결국 모교회에 도움을 요청해왔다. 지난 6월에 열린 순복음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해 그 동안의 사역을 보고한 나타샤 목사는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소련선교회장 박흥열 장로는 급박한 상황을 선교국에 보고하고 토지임대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7월에 1000달러를 지원했다.
 그리고 지난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소련선교회장 박흥열 장로와 임원 그리고 투바공화국에서 사역했던 이철성 목사(현 순복음동산교회 담임)가 함께 투바공화국을 다녀왔다.
 동쪽 대부분은 삼림으로 덮여있고 서부는 분지지대로 이뤄진 투바공화국은 키질이 수도다. 우리와 같은 알타이 족에 해당하는 투바족이 사는 투바공화국은 과거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1914년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1961년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면서 1993년에는 투바공화국으로 개칭된다.
 수도 키질에 아시아의 지리적 중앙임을 상징하는 ‘아시아의 중심 기념탑’을 세워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투바공화국 사람들은 한때 구소련의 붕괴로 극심한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이철성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할 당시만해도 소련선교회가 의료선교까지 펼치며 애정을 쏟았던 그 곳은 최근 이단들이 성행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실했던 한 목회자가 이단의 꾐에 넘어가 많은 교인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현지 성도들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국에서 상황을 보고 받고 이 곳에 와서 직접 상황을 본 순간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임 사역자가 사택과 교회를 팔고 떠나는 바람에 다른 교역자들과 성도들 가슴에 큰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타샤 목사가 끝까지 남아 200여 명의 성도들과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박 장로는 현지를 방문해 보니 투바순복음교회의 어려운 상황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종교법상 15년된 교회는 자체 등록을 할 수 있지만 투바순복음교회의 경우는 세워진지 13년 밖에 되지 않아 자체 등록이 어려워 가까운 러시아의 민스크에 있는 오순절 교단 교회로 소속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일은 비록 안타깝게 마무리 됐지만 교회 성도들이 민스크에 있는 교회 목사에게 ‘우리는 끝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속이다. 결코 변함이 없다’라고 했다더군요. 그들의 확고한 정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 장로는 또 “아침에 숙소 인근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강가에 한 무리가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이들은 다름아니라 교회 분열이후 투바순복음교회를 떠났던 교인들이었다. 우리를 보고 반가워 한 이들은 교회가 안정을 찾고 있다는 소식에 다시 투바순복음교회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놀라워 했다.
 이철성 목사와 박흥열 장로는 이번 투바공화국 방문에서 남아 있는 교역자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타샤 목사를 담임으로 세우고 5명의 부교역자들에게 협력을 당부했다. 박 장로는 후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그동안 교류가 없었던 구 소련 지역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우크라이나 자파로지아순복음교회와 영산신학대학 우크라이나 분교에서 열린 제1회 순복음 영산제자 선교대회에 참석을 권유했다. 기차를 타고 편도 6시간이나 걸려 선교대회에 참석했던 투바순복음교회 교역자들은 그 곳에서 순복음의 사역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사명감을 확고하게 다지게 됐다. 수 많은 제자사역자들을 보고 도전과 순복음 사역자로서의 자부심을 얻게 됐다고 했다.
 박 장로는 “1992년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한동안 이 지역에 복음의 문이 열려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철성 목사님의 경우는 일찍 이 곳에 와서 사역을 했던 경우에 속한다. 타 교단 사역자들도 많이 왔지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투바 사람들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도 상당수다. 하지만 이철성 목사님의 경우 이 곳에서 크게 사역하실 수 있었던 것은 순복음의 파워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성령운동은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녹였고, 주님의 자녀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역사했다. 하지만 점차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다. 활발한 복음 사역의 전개를 위해서는 현지인 제자를 양육해 본교회와 교류함으로 순복음이 영성이 꽃피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투바공화국에 관심을 갖고 이 곳에 복음이 활발히 전파될 수 있도록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9. 다니엘의 소명과 제국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세 개의 제국과 네 명의 왕을 보필한 최고의 재상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단 1:21)


17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왕정시대가 저물어가고 왕에 의한 1인 통치가 아닌 의회에 의한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왕은 존재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왕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나라의 전반적인 대내외적인 일은 의회의 수장인 총리가 감당하게 되었고 역할과 권한도 강화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총리를 손꼽으라면 저마다 다른 인물들을 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현대의 입헌군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지만 왕을 대신해 총리로서 제국을 다스렸던 위대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형들에게 팔려 히브리 노예에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창 41:41)과 전쟁 포로에서 신(新)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 벨사살, 메대의 다리오,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까지 세 개의 제국, 네 명의 왕을 보필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고의 재상(宰相) 다니엘이다(단 2:48; 6:2).다니엘 1장 21절은 짧은 한 절의 말씀이지만 다니엘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왜 벗고 싶은 짐을 벗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는지 그의 소명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1. 남유다의 멸망

성경에 느부갓네살로 기록된 네부카드레자르 2세(Nebuchadnezzar II)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 유브라데강 하류 지방까지 점령했다(왕하 24:7; 렘 46:2~12). BC 625년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은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바벨론 제국(BC 625~539)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국의 기틀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느부갓네살은 재임기간 동안(BC 605~562)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켰고 신바벨론은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과의 전쟁 이후 근동의 패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고 이스라엘을 여러번 침략했으며 남유다를 멸망시켰다(BC 586).예루살렘에 입성한 느부갓네살은 솔로몬 성전을 파괴했고 성전 기물들을 빼앗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단 1:2). 유대인들은 네 번에 걸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을 바벨론유수라고 한다. 1차는 다니엘을 포함한 귀족과 왕족이 끌려갔고(BC 605, 단 1:1~6), 2차 때는 여호야긴 왕을 포함 방백들과 군사들 그리고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들과 각 분야의 장인들 외에 일반 백성들까지 1만 명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BC 597, 왕하 24:14).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친애굽 정책을 폈던 시드기야 왕은 남유다의 멸망과 함께 마지막 왕이 되었다. BC 586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솔로몬 성전까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때 시드기야 왕과 다수의 백성들이 세 번째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네 번째는 BC 581년 느부갓네살 왕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에 의해 남아 있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비천한 사람들 약 2만 명 정도만 유다 땅에 남게 되었다(왕하 24:14).

2. 노예 소년의 성장

BC 605년 귀족출신인 다니엘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19년 전인 1차 바벨론유수 때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왔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린 소년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쳐 왕궁에서 일을 시키고자 했다(단 1:4). 마케도니아의 펠리포스 2세(BC 382~336)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을 위해 알렉산더가 13세가 되던 때 당대 최고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들였다. 알렉산더는 20세에 왕위에 오른 뒤 바사(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헬라제국을 완성해 위대한 대왕의 자리에 올랐다.

바벨론과 헬라 시대는 시간적 차이가 있으나 그 당시 근동의 교육은 대부분 성인식을 치른 13세에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느부갓네살이 교육을 시켜 왕궁에서 쓰려고 유다의 소년을 잡아 왔다면 다니엘의 나이도 13세 쯤 되었을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교육의 시간은 3년이었다(단 1:5). 이 기간 동안 다니엘의 이름은 바벨론 식의 이름인 벨드사살로 바뀌었고(단 1:7) 전혀 생소한 언어 문화 학문을 익혀야 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무자비한 왕이었다.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죽였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데리고 왔다(왕하 25:7; 렘 39:6~7; 52:11). 그리고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술사들의 몸을 쪼갤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왕이었다(단 2:5). 하지만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부했다(단 1:8). 이것은 참으로 목숨을 건 위대한 신앙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    

3. 다니엘의 소명과 고레스 원년

바벨론에 잡혀온 유대인들이 꿈에 그리던 일이 고레스 원년에 일어났다.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포로로 잡혀 왔던 유다 백성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스 1:1~3; 대하 36:22~23). 다니엘 1장 21절은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에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까지 관직에 있었고 그 후에 그만 두었다는 의미이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볼 때(단 6:28), 수많은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궁정에서 다니엘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거나 왕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70년 동안 바벨론 메데 바사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며 네 명의 왕 밑에서 재상을 지냈던 예언자이며 정치가였던 다니엘은 고레스 원년 이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성경에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레스가 유대인의 포로귀환을 결정할 때 다니엘이 대단히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3세에 바벨론으로 왔다고 가정한다면 70년의 세월이 지나 다니엘의 나이는 83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세 개의 제국에서 네 명의 왕을 모시며 수많은 음모와 사자 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의 조국 남유다가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이 두 눈이 뽑혀 사슬에 메어 바벨론으로 잡혀오는 굴욕과 복받쳐 오르는 오열을 참아냈다. 마침내 예언되었던 70년의 시간이 차고, 고레스가 유다 백성의 포로귀환을 칙령으로 반포하자 다니엘은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말씀이 다니엘 1장 21절의 말씀이다. 이후 그는 다니엘 7장부터 정치가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라헬 ― 질투심이 강한 미모의 여인
1. 인적 사항
① 라반의 둘째 따이며 야곱의 아내, 레아의 동생이며,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조카.
② '라헬'은 '암양'을 의미하며, 피조물에서 따온 최초의 이름.
③ 곱고 아리따운 여인(창 29:17).

④ 그녀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유적이 베들레헴에 있음.
2. 주요 생애 

| 결혼 전 시절 | 
하란에서 출생 | 1세 B.C. ? | 창 29:4,6 | 
아버지의 양을 침 | | 창 29:6,10 | 
야곱을 만남 | B.C.1929년경(?) | 창 29:10-13 | 
결혼 후 시절 | 
야곱의 열애를 받음 | | 창 29:18 | 
야곱과 결혼 | B.C.1922년경(?) | 창 29:30 | 
요셉을 낳음 | B.C.1915년 | 창 30:22-24 | 
가나안 이주 | B.C.1909년경(?) | 창 31:4-20 | 
베냐민 출산 시 죽음 | | 창 35:16-20 |
3. 성품
① 아름답고 고운 자태로서 평생을 적극적으로 생활함.
② 자녀문제로 심한 질투를 보이며 가정의 불화를 야기시킴(창 30:1;31:32-35).
③ 자신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 감출 정도로 자신의 대한 욕망이 강함(창31:32,34,35).
4. 구속사적 지위
① 아브라함 소명 이후 제3대에 이른 언약 가문 족장인 야곱의 두 번째 정실부인. 이 당시는 중혼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레아와 라헬은 빌하 및 실바와는 달리 둘 다 정실부인의 지위를 보유했다.
② 자녀가 없는 자로서 자식을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실제의 장자 르우벤 대신 이스라엘의 영적 장자 명분을 얻는 요셉과 야곱의 막내아들인 베냐민등을 낳음(창 30:23,24;49:4;대상 5:1).
5. 평가 및 교훈
①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못 낳는 자로서 자녀를 낳는 형 레아를 투기함으로 서로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창 30:1,14,25). 이런 사실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나보다 남을 위하고 스스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함을 배우게 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② 라헬은 비록 그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형을 투기하고 불평하는 연약한 자였으나 하나님께 자녀 잉태를 위해서 기도하여 응답 받아 자녀 요셉을 낳았다(창 30:22-24). 여기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비록 하나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자일지라도 하나님께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사 만족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시50:15).
6. 핵심성구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 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창 30:22).


  •  [성지자료] 골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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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로새

     


    골로새 전경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에서 찬 약수가 라오디게아로 가는 수로

     

    현재명은 Honas이다.  바울 당시보다 수 백년 이전에, 골로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어키)의 주도적인 성읍이었다. 골로새는 루카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게해 해변이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동서의 큰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골로새는 제 2류의 상업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그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3 참조)에게 세력이나 중요성에 있어서 오랫동안 눌려왔었다. 주요 산업은 직물업으로 '골로시누스(colossinus)'라는 직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해안에서 동쪽지방으로 이어주는 무역로는 이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주변에 살고있었다(성전세를 낸 수치를 기준하면 약 7,500명의 유대 자유인이 이 주변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골로새가 중요시된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 에바브라가 회심하여 복음을 골로새에 전달한 사실 때문이었다(1:7,8; 행 19:10 참조). 이때 아직도 연륜이 오래 되지 않은 이 골로새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에바브라나 바울에 의해 개종된 다른 어떤 신자의 노력 결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떤 것들은 가정 교회였다(4:15; 몬 2절 참조). 그런데 그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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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선교사(대만 타이통생명천순복음교회)

태풍으로 상처입은 대만 위해 기도해주세요  

 8월 모라꼿 피해로 타이통 원주민 갈 곳 없어
교회들 힘 모아 주님 사랑으로 복구 힘써 
중국남방선교회 제일 먼저 성금 전달

              


 지난 8월 8일 태풍 모라꼿의 영향으로 대만은 수 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족을 잃어버려 연일 고통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특히 대만 남부에서는 소림촌이라 불리는 한 마을이 통채로 매몰되는 사태로 600여 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소림촌에 비하면 그래도 다행히라고 할 수 있지만 제가 사역하고 있는 남동부인 타이통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타이통생명천순복음교회와 성도들은 안전하게 대피해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우리의 이웃인 타이마리의 지아란 등 주변 여러 지역은 마을의 약 3분의 1이 물과 함께 사라지고 주변의 도로가 흙더미 돌산으로 변했습니다. 더러는 철로와 다리가 끊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10미터 넓이의 잔잔한 시냇가가 800미터의 무서운 강으로 넓혀지면서 주변의 도로와 주택들이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쓸렸고, 해변은 쓰레기더미 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뿌리채 뽑혀 나뒹굴고 있는 집, 반쪽만 남아 벼랑끝에서 간신히 걸려 있는 집, 노면이 깍여 나가 자갈과 흙으로 엉켜진 도로 등 마을은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습니다. 마을 어귀의 도로가 손상된 까닭에 높고 높은 산의 외길을 꼬불꼬불 넘어서 도착한 타이마리의 한 마을은 재난 영화에서나 볼수 있었던 그런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늘 다녔던 곳들이 하룻사이 쏟아진 폭우로 마치 낯선 광야같이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처참해진 모습에 그저 주저 앉아 있는 주민들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 지 몰랐습니다.

 ‘어떤말들이 저들에게 위로가 될수 있을까’ 그냥 옆에 함께 털썩 주저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며 “밤중에 물사태가 일어났다면 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을텐데 그나마 낮시간이었으므로 긴급광고를 듣고 대피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번 수해자들은 주로 대만 원주민들입니다. 과거에 이들은 산지족이라 호칭하였지만 지금은 원주민으로 불리웁니다. 대만 원주민은 13개 부족이 있는데 고연령층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산 주변에서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공부할 시기가 되면서부터 자기 부락을 떠나 도시로 나가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자기 부족들이 있는 곳에서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인들이 자기 부족의 언어 외에 중국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 타 지역으로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현재 타이통생명천순복음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을 방문해 미용,간단한 진료,식사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진흙더미로 변한 가정들의 청소를 돕거나 정신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수해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며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심하고 평안히 들어갈 수 있는 자신들의 집이 속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현재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는 장소들에서도 곧 이동을 해야하는데, 이들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부도 이들을 잘 챙기지 못해 원주민들은 그 어느때보다 많은 관심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번 수해가 이들에게는 50년만의 재해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중에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타이통 지아란촌에는 5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들 교회 성도들이 들려준 간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번 수해로 광야가 되어버린 주택가에 흙더미 위에 벽과 지붕만 남은 낡은 가옥 2채가 서 있었습니다. 원시오라는 자매의 집이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갑작스럽게 휘몰아쳐 내려오는 물사태로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자 폭우속에 이웃들을 데리고 지붕 위로 올라가 구조를 요청했답니다. 기도하다 눈을 뜨고 현실을 보면 체념됐다가도 다시 기도하기를 8시간째 됐을 때였습니다. 떠밀려오는 물이 마지막으로 지붕 위를 휩쓸어버릴 그 순간, 그녀는 포기하면 안된다 싶어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집앞까지 내려온 물이 집 양편으로 갈라져 흐르는데, 마치 누군가 큰손으로 자신들이 있는 지붕을 감싸안고, 감싸 앉은 손 밖으로 물이 갈라져 흐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결국 함께 데리고 올라간 이웃 20명과 그녀는 함께 구조를 받아 많은 수해자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태풍 피해가 가장 심한 소림촌과 타이마리 지아란은 심하게 우상숭배를 하는 지역입니다. 수해의 상처를 씻고 이 지역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백성이 될수 있길 기대하며 타이통 여러교회은 이번에 합력하여 사랑의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수해자들을 돕는 일에 제일 먼저 성금을 보내주는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중국남방선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대만 원주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상처를 잘 이겨내고 평정을 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속히 거주할 주택이 마련되어 각자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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