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기에서 영의정 까지◈ <경덕궁(경희궁)지기에서 영의정까지> 한명회는 조선이 나라를 세우고 뿌리를 내리려 할 때,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조실부모하여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과거 시험엔 여러 번 떨어지고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을 지키는 관리 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하도 못생기고 머리만 커서 아이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머리는 영리해서 열 살 때 충주부사 민대생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명회의 장모는 사위가 될 사람이 너무도 못생겨서 자기 딸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의 영특함을 알아본 민대생이 자기 딸하고 결혼을 시킨 것이다. 그래도 한명회의 딸들은 인물이 예뻐서 나중에 왕후가 될수 있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친구였던 권람을 통해 단종의 작은 아버지였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어린 왕이 다스리는 조선이 더 발전할 수 없고 신하들에 의해 나라가 썩어간다고 얘기하였다. 단종을 쫓아내고 수양대군이 왕이 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쿠테타를 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어난 쿠테타가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나서 수양대군이 세조로 1445년 왕이 되자 한명회는 1등 공신이 되었고 바로 좌부승지라는 벼슬에 올랐다. 좌부승지는 오늘날의 국무총리 아래 장관인 셈이었다. 경덕궁을 지키던 하찮은 벼슬에서 13년 만인 52세의 나이로 까마득하게 높은 벼슬인 좌부승지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명회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계유정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식들과 결혼을 시켜 자신의 부와 권력을 더욱더 견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조의 둘째 아들(후에 예종이 됨)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서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한명회에게도 시련은 닥쳤다. 1466년 이시애라는 사람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이시애의 속임 수에 말려서 당시의 권력가 중 한 사람인 한명회와 사돈지간인 신숙주와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한명회는 하늘이 도왔는지 죄가 없음이 밝혀져 곧 석방 이 되었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예종이 왕에 올랐을 때 한명회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와 함께 국사를 다시 돌 보게 되었다. 예종이 왕이 된지 1년 만인 1469년에, 그는 너무도 짧은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년 만에 예종이 유명을 달리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한명회는 영의정과 병조판서를 같이 맡게 되었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같이 하게 된 셈이다. 그는 경덕궁지기에서 드디어 영의정까지 오른 셈이었다. 그 정도면 한명회는 얼마나 부와 권력을 가졌었는지 알 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명회는 당대의 충신이었던 김종서와 단종의 또 다른 숙부였던 안평대군을 죽이는데 주동하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데 일조하였다. 그 후에도 기회마다 4번의 난을 일으켜 당대의 존경을 받던 성상문, 박팽년, 남이 같은 대학자를 제거하고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피해갈 수 없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를 죽인 주모자로 지목받은 한명회에게 부관참시의 극형을 내리고 그의 재산 까지 몰수하였다. 무서운 인과응보의 형벌이었다. 이런 한명회를 두고 사람들은 당대의 최고 책략가,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양대군을 부추기고 어린 조카를 제거하게 하여 권력을 독점한 간교하고 계략에 능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역사의 인물평은 그를 보고 느낀 후대 사람들의 몫이다. 한명회의 별장인 鴨鷗亭이 동산위에 별장이 있었는데 그산을 헐어 매립하여 만드러진 것이 지금의 아파트 단지이다 -조선왕조실록 야사에서-
◈경찰선교회 카페◈ -카페지기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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