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5) 히브리 사람 아브람

                 

 히브리 사람 아브람
창세기 14:13

"히브리 사람"이란 명칭은 히브리인으로서의 아브람을 지칭하는 독특한 명칭이다. 이 명칭은 여기서 처음으로 나온다. 아마도 여기서 이 명칭은 그 사용상 그가 가나안 주민들 중에 거주하면서 일컬음 받은 관습적 별명인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명칭은 민족의 이름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할 때나 그들 자신을 이방인들과 구별할 때 외에는 거의 "히브리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른 많은 경우에서 처럼 다른 민족이 사용한 민족적 명칭은 그 백성 자신에 의해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이 명칭이 민족의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 당시에는 민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개인을 뜻하는 통칭, 혹은 평범하게 말하면 별명이며 그 의미는 '다른 편에서 온 사람', '저편에서 온 사람' 곧 '강을 건너 온 사람'이란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중세기의 한 왕자가 Outremere(바다 너머에서 온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처럼 아브람은 토착민이거나 적어도 오랫동안 거기 정착해있던 그 나라의 주민들에게는 단순히 '이방인, 곧 요단 혹은 큰 강 유프라데스 강 저편에서 온 사람'이나 '강 건너온 사람'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제 이 명칭이 허용할 수 있는 두 서너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며 잘못 상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지는가 하는 것이다.

1. 사람들은 대이주(大移住)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아브람은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의 모든 과거, 단체, 사랑하는 것들, 많은 재산, 그리고 매우 심오한 의미에서 그의 옛 자아를 모두 묶어 버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와 그 모든 것들 사이를 통과할 수 없는 큰 간격을 두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이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늘 의도적으로 갑작스럽게 변화를 꾀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는 편협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철저한 종교인들 중에서 많은 경우에 수 개월 혹은 수 년에 걸쳐 일어났든 혹은 중요한 어느 한 순간에 집중되어 일어났든 의식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확신한다. 

시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새벽과 같았든 촛불 점화 같았든 그것은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마음 속에서 불타오르던 때이다. 종교적인 진리의 영향을 가장 참되게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자기 자신이 넘은 심연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큰 강의 저편에 있는 시간과 이 편에 있는 시간 -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자아가 변화된 사람이라면 행동을 자극하는 새로운 맛과 동기, 만족을 요구하는 새로운 욕망, 그의 마음을 달콤하게 채워주는 새로운 사랑, 그의 행동을 인도하는 생의 의미와 진실로 선한 생활과 시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 전에 좋았던 것을 지금 싫어하는 새로운 혐오, 그들의 자라나는 날개 깃들로 장식한 새소망, 새 길을 따라 행하는 새 힘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와 하나님 및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자아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중심이 되실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세계에서 산다. 

우리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며 심판을 당하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웠느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바로 이런 실례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이주이다. 이것이 송장의 상태에서 산 자의 상태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바울도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우리를(빛과 같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할 때, 이 관념을 약간 다른 예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예증은 고대 정복 군주들의 관례에서 나온 것 같다. 이 정복 군주들은 한 국가를 정복하고 나면, 강제적인 식민지 지배자가 되어 그곳 주민을 포로로 잡아 일렬 종대로 세워 끌고 나가서 다른 곳에 이주시키곤 하는 관습이 있었다.

정복자,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식으로 와서 그의 사랑에 정복된 사람들을 압제적이고도 무정부적인 어둠의 지배에서 이주시켜 자리를 옮겨주고 그들을 이끌고 행복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신다. 

이런 식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옛 자아에 등을 돌리고 '그들의 욕망과 쾌락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하자면 그들의 얼룩진 과거가 적힌 종이를 풀로 붙이고 새롭고 아름다운 종이를 넘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고, 본토 갈대아를 떠나 낯선 땅, 그렇지만 새로운 자아의 집인 하나님과 연합하는 땅으로 들어온 '다른 편에서 온(속한) 사람'인가?

2. 이 명칭은 그리스도인이 외국인, 곧 강 건너온 사람으로 알려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브람을 알고 있는 가나안 사람은 누구든지 그를 자기네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은 심지어 아주 천박한 사람에게까지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가나안, 곧 야만스럽지 않은 나라에 이주한 자기 자신을 발견했지만, 곧 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 안정된 질서의 안락과 편의와 규율을 지니고 있는 체계적으로 꽉짜여진 문명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무슨 일을 했는가? 그는 장막에서 살기로 결심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의 역사를 '그가 한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장막에 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기대가 영원한 거처에 고정되어 있을수록 그는 지상에서의 거처를 더욱 더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만일 그의 눈을 만족시키는 다른 도성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과 섞여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자기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되는 다른 질서가 없었더라면, 그는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질서와 운명을 같이 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그들과 매매를 하고 그들과 싸우고 그들 곁에서 살고 그들에게서 자기의 시체를 묻을 땅을 샀다 하더라도, 그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아니다! 나는 너희 도성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상수리 나무 아래의 내 장막에 머물고 있다.

나는 여기서 나그네요 체류자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언어와 의복과 그밖에 수많은 다른 사소한 것들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이 좋게 살지만 분리되어 사는 이 낯선 방문객에 대한 인상을 남기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 주민들이 그에게 붙여준 '다른 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이름에 구체화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야 하는 인상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내적 비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딘 사람에게까지도 분명히 다른 질서에 속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의식을 우리 마음 속에 새롭게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태도와 행동으로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도성, 우리 마음과 소망의 어머니인 성이 하늘에 있다는 의식을 계속 기르라는 권고는 늘 반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권고를 우리의 참된 친화성과 우리의 영광스런 소망에 어울리는 생활의 필요 조건으로 받아들여 늘 순종해야 한다. 

또한 필요한 다른 권고는 이 잠시 동안 머무는 이방의 법에 따라 생활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나라의 법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철저하게 그렇게 살아간다면, 구태여 '나는 다른 나라에서 왔소'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의 행동이 그것을 대신 말해줄 테니까.

한국 배는 그것이 어느 지대에 있든지 작은 한국이며 대통령의 권한이 미칠 수 있는 해상 범위를 훨씬 넘는다 하더라도 그 배는 떠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작은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세계 대양의 한 가운데 있는 저 작은 점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기를 펄럭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법만이 유일한 법으로 통용되어야 한다.

만일 하만이 그의 왕에게 유대인들에 관하여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든 백성들과 다른 법을 지니고 있는 백성이라는 말을 들으려면'(에 3:8) 우리는 우리가 섬기기로 고백한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 대부분이 하는 일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라. 그러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다른 편에서 온 사람', '그는 이 성읍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할 것이다. 무슨 겉치장을 할 필요가 없고 '와서 주님을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거리 모퉁이나 다른 곳에서 우리 앞에 나팔을 불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은 편이 더 낫다. 우리가 다른 동기에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주님에 대한 우리의 증거는 더욱 더 유력해진다. 

예를들어 존 녹스(John Knox)가 프랑스의 갤리선에 탔을 때, 그는 어떤 죄수, 아마도 살인자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과 같은 노(oar)에 묶여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일을 하였고 무거운 노를 함께 저었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슬픔을 당하였다.

여러분은 그들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있었으리라고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같은 신앙을 갖지 않고 우리와 같은 소망과 열정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은 과제를 갖고 똑같은 환경하에서 나란히 일할 수 있을 것이나, 비록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은 똑같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앞에 모시고 우리에게 선례를 보이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강 건너 온 사람'이란 것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3. 또한 주목할 것은 이 차이점, 곧 우리가 거하는 세상 질서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 부동성(浮動性)이 완전히 조화하여 모든 류의 협력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방의 연합군이 소돔을 포함하는 다섯 성읍을 공격하여 파하고 재물과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 포로들 가운데 아브람의 친척인 롯과 그의 가족이 있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은 약탈당하였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도망하여 '다른 편에서 온 사람'에게 곧장 와서 마치 동정과 도움을 확신이나 한듯이 그에게 참패의 비극적 소식을 전하였다. 분명히 도망한 자가 아브람을 찾은 것은 아브람과 롯의 관계는 물론 소돔인들을 그가 기꺼이 도와주리라고 확신한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처럼 도망한 자가 궁지에 빠졌을 때 찾은 사람은 마므레에 있는 헷의 아들들이 아니라 히브리인 아브람이었다. 아브람은 소식을 듣자 즉시 동방의 연합군을 추격하여 파하고 포로와 빼앗겼던 재물을 찾아왔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떨어져서 살고자 한다면,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세상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종교는 틀림없이 약하고 지친 자에게 도움과 위안을 가져다주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형제적인 친절과 자비의 모든 행동을 성공시킬 수 있으므로 종교를 통해 신속하고 영웅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칼을 뽑아야 할 사건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아브람은 그런 점에서 손에 실제적인 검을 쥔 구약 시대의 전형적인 신앙의 영웅이다. 검이 없는 신약시대의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전사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우리는 동정과 도우는 의무를 피하지 말고 모든 궁핍하고 슬퍼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영웅적으로 희생을 각오하고 신속히 도와주어야 한다. 도망자와 절망한 사람들이 그 지역의 사람들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소심하여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다른 편에서 온 사람,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능적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성품을 스스로 만들어 우리가 나그네요 순례자로 거하는 '도성의 평화를 구해야' 한다. 
(ALEXANDER MACLAREN).

출처...자기부인...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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