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순교자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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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孫良源, 1902. 6. 3~1950. 9.28) 목사

 

 

 

경남 함양군 칠성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1902년 6월 3일 태어났다.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중

궁성요배를 거부, 퇴학당하였으나 선교사 L. 맥레이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철원보통학교졸업.
1929년 중동중학교입학 중퇴
1923녀 도쿄 스가모중학교졸업. 경남 성경학교입학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27회)
1938년 야양원교회 부임

 

삼일운동에 가담한 죄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했으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통해 큰 영향을 받으며 신학을 공부했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소압중학교)]를 졸업, 귀국 뒤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부산나병원교회·울산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에 여수의 나병환자요양원 애양원(愛養院)의 전도사로 부임한 이후로 평생동안 애양원의 목회자로 섬기며 애양원 사람들을 사랑했다. 문둥병자의 환부에 입을 접촉하여 병든 환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했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아 1940년에 체포되어 광복 후에 출옥하였다.

손양원 목사님의 곁에는 훌륭한 사모님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감옥에 계셨을 때, 사모님은 면회 갈 때마다 꼭 성경 한 구절씩을 외워 가서 목사님께 읽어 드리곤 했다.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감옥에 있는 목사님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946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동년 9월 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서울이 수복되는 날 9월 28일 전세가 역전되어 퇴패하는 공산군에 의해 미평과수원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사랑의 사도 /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지 탐방을 위하여 애양원을 방문하였다.
여수로 가다가 여수공항 옆길로 좌회전하여 쭉~~ 들어가면 애양원이 나오고
애양원 안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이 나온다.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1902년 6월 3일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고 1923년 일본 동경 소압중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1월 17일 정양순 여사와 결혼
1925년 동인 출생  1930년 동신 출생
1935년 평양신학교 입학  1936년 모친 별세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깐,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관훈




입구 소개판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도로 산 손양원 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의 생애



손양원 목사 생가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
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손양원 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 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 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
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출옥 후 옥종면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안하기위해 애양원을 떠나서
하동군 옥종면 산속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성도들이다.
둘째 줄 꼬마가 둘째아들 동인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일제는

군입대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온 가족이 흩어져 신사참배를 안하도록 의논하였다.
이에 동희와 동장이는 구포 고아원으로 동신이는 옥종면으로 
동인, 동수, 어머니는 남해 산골로 각 흩어져 살다가 해방 후 모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청주구금소에 있는 손목사님에게 어린딸이 보낸 편지  



손양원 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 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손양원 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사모, 안고있는 아들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 낳은 아들이다.



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막내는 손동길 목사, 세째 사위 김원하 목사, 큰 외손자 박유신 목사)



손양원 목사 장례식



순교자 동인, 동신 장례식, 1948. 10.24 애양원 교회 장례식 장면

1948. 10. 19 여순 사건 발생으로 동년 10.21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동인 나이 23살, 동신 나이 18살이었다.



손양원 목사 안장후 손동인,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
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 목사님의 묘가 있다.



순교자 손동인

1925년 11월 6일 손양원 목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절대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1948.10.21  여순사건 때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23세에 순교하였다.



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 목사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안재선
손양원 목사 순교 후 가족들과 함께한 안재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으나 손 목사님이 양자로 삼았다.



아홉가지 감사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영화화한 사랑의 원자탄 포스터와 비디오



대한민국건국훈장, 1995.8.15







지하 전시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손양원목사님은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사랑으로,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순교자요,사랑의 사도였다.그는 기도를 호흡으로 삼고,성경을 양식으로 삼고,전도가 생활이 되어 사신 분으로 원수에게는 사랑으로,고난받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서는 소망을 던져 주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또한 그의 설교는 몸으로 하는 설교였으며,그의 삶과 죽음을 통한 설교였다.

 

그의 사상에는 항상 민족의 정황이 문제가 되었고,민족 정신을 복음으로 승화 시켰다.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사상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국가와 민족의 사랑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았으며,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사상,종말에의 소망 말씀과 삶의 일치 등의 사상을 가지셨다.다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손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으며,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다가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사랑의 화신이요,한국 교회 일백년 교회사에서 세계 교회에 내 놓을수 있는 자랑거리이다.

 

주님께 부름 받기까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하였다.

 

1908년 7세 되던 해에 부친의 입신(入信)과 함께 자신 도 입신하고 같은 해에 본당(本洞)의 한문 성당에 입학했다. 이 때서부터 그는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 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도와 신앙 생활에 힘썼다.1914년 4월 1 일,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 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 고 천황 사친 배례와 요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합병 직후, 관공 서와 각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 때마다 거기에 최경례를 하게 함으로써 천황 숭배의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주입 하고자 했다.

1912년 7월 30일,그들이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는 각지에 요배소(遙拜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요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요배의 강요는 일반인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각종 제일, 축일마다 학생들에게까지 계속 강요되었다.

 

기독교 학교는 총독부의 결의에 따르지 않았으나 문제는 관공립 학교에 다니는 기독 학생들이 문제였다. 1915년에는 개정 사립 학교령을 공포하여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등 탄압을 가중화 시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한편 관공립 학교에서는 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 주입에 광분하였다.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동방 요배)를 표함으로써 수업이 시작된다. 신도 의식이 모든 공휴일마다 개최되고 학생들은 천황 사진에 절을 하게 된다. "

 

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이러한 궁성 요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 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하여 계속 학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복학 후 주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라고 했으나 주일은 학교에 갈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면서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가는 가운데 마침내 1919년 3월 24일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남달리 공부에 재간이 있고 배우려던 의욕이 강했던 그는 1919(18세)년 칠원 보통 공립 학교 졸업과 함께 서을 중동 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학업에 임하고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학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국동 교회를 다니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손 목사가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1920년4월3일 3·1운동의 여파로 아버지가 칠원 읍내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다가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는 일이 일어났으며, 손목사 자신도 철저한 주일 성수로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흔들리게 되자 극심한 생활고에 빠진 그는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70전을 출석하던 안국동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낙향하고 말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심신을 달랜 뒤 1921년, 다시 향학의 불꽃을 태우고자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한다. 이번에는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등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이 때 그는 일본 동양 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동경의 판교(板橋)성결 교회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게 되며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손 목사는 고향 칠원 교회에서 1914년 3월 17일에 이종윤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고, 1917년 10월 3일에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24년 1월, 손 목사는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자란 정양순씨(19세)와 결혼하고, 그 해 3월 23일에 일본에 다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임하는 도중 신앙의 새로운 도전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중생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 10월 23일에는 봉사하던 교회에서 집사로 피선되어 봉직하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동인이가 한 살이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에 교회를 세웠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감만동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던 중 1932년,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에게 은혜를 받은 문신활이란 성도가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손 목사가 왜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1932년, 감만동 교회에서 손양원 전도사님은 성조지(聖朝誌)를 가지고 사경 공부처럼 일주일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시로부터 부산 감만동 나병원의 배후에도 복음의 꽃송이들이 드문 드문 피게 되었지요. 암흑에 잠겨 있던 감만동 교회는 광명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곪아졌던 생명들은 생생하게 소리를 쳤더이다. 아! 모든 법과 의식에 결박되어 고통과 번민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는 소생은 날로 때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나이다. 뭇생명들이 그처럼 자비스럽게 해방을 받아 나가던 중도에 불행하게도 소위 목회자라고 하는 몇 사람의 시기로 인하여 손양원 전도사님도 감만동 교회 일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

 

손 목사는 당시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 조선의 잡지를 가지고 사경회처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된 것이다. 문신활의 편지 가운데 "부민정으로 떠난 뒤로"라고 한것으로 보아 감만동 교회를 사임한 후 손 목사는 그가 개척한 부민정 교회로 옮겨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민정 교회에서 목회를 전념한 것으로 사료된다.

 

신학교에서

 

손 목사는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 연구를 깊이하였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에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시무 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손 목사는 이 때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선교사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심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평양 신학교 교장 나부열(R. L. Roberts)목사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결국 손 목사가 1938년 3월 제33회로 졸업하고 나온 그 해에 신학교는 교문이 닫혀 버리고 말았다.따라서 33회 졸업생들은 학교가 폐쇄되어 버린 까닭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는 일까지 생겼다.

 

손 목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 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호통을 치고 그냥 들어갔다고 했다.

 

이 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청빙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손 목사의 이러한 외침, 어쩌면 와락 터져 나오는 벌떼와도 같이 신앙의 저 깊은 저변에서 용솟음치는 회개를 역설하는 설교로 인하여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 바다를 이루는 역사가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 목사는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라 한센병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들일 수 있는 처지 또한 못되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였다

 

한센병자의 영원한 벗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 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설사 그들이 자유롭게 밖에 나간다 할지라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가 일쑤였고, 차를 탄다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극장,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 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양원에 딸린 병실로 쓴 가옥은 모두 17호실로 되어 있는데 1호실부터 10호실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호실부터 13호실은 경환자실,14호실은 중환자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실에 거주하는 몇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흥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간호원 둘이 매달려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음으로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흥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손 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 목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 목사님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손 목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녹여 낸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된 사랑이 넘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한 목자

그가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병자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한 커다란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여순 사건이 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묘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

하고 보복하는 인민 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

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 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긴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부등켜안고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 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 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일대기

 

 

장로교 목사로서 순교한 손양원(孫良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孫宗一)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1813∼1873)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산돌은 1913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선교사 맥레이(Macrae, F.J.L.·孟浩恩)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회 때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당하자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여 퇴학당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교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복교되었으며, 1917년 7월 졸업하였다. 산돌은 1918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신문 배달과 만두장사를 하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녔는데 이때도 안국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20년 봄 부친이 풀려나자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10월 칠원읍 교회의 집사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정쾌조(鄭快兆)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24년 3월 도일(渡日)했다가 성결교회의 나카다 주이치(中田 重治)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결교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에 큰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할 것을 각오한 산돌은 매일밤 열심히 기도하던 중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그 해 10월 귀국해 부산에 있던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초량교회의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친교를 맺고 그의 지도와 신앙에 감명받았다.

 

한편 부산 감만동 상애원이라는 나환자수용소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산돌은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다고 전한다. 산돌은 "내 주소는 주님의 품속이며, 생일은 중생된 날입니다. 생일의 기쁜 잔치는 천당에 들어가는 그 날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산돌은 10여 년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南倉)교회, 부산 남부민동교회, 양산 원동(院洞)교회 등을 개척 설립하였다. 그는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열중하면서 능라도(綾羅島)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신학교에서도 산돌은 뜨거운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로 유명했다.

 

졸업한 다음 부산지방 시찰회 강도사로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다. 이때도 그는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1939년 7월 15일 산돌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산풍리에 있는 나병환자 요양원 애양원(愛養院)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그는 버림받은 나환자들의 몸을 씻기고 상처난 손과 발을 싸매주었으며, 때로는 입으로 더러운 피고름을 빨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언행이 일치된 산돌의 사랑에 넘친 신앙 실천은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감동시켰다. 거듭되는 신사참배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던 산돌은 마침내 1940년 9월 25일 연행돼 여수경찰서에 미결수로 감금됐다. 1941년 7월 광주구치소로 이감된 산돌은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1943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 위협에 "당신은 전향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앙이 문제"라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결국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산돌은 독방에서 감식과 독감으로 고생하면서도 "빈 방 혼자 지키니 고적함을 느끼지만, 성삼위(聖三位) 함께 지내니, 네 식구 되는 구나"는 한시를 지었다. 이처럼 뜨거운 일념으로 주님을 섬겼던 그의 신앙은 오로지 감사와 자족의 충만함이었다. 그는 기도와 찬송과 암송한 성경읽기로 신앙을 굳게 지켜 '옥중성자'로 널리 알려졌다. 산돌은 감옥에서도 수감된 사람들과 간수들에게까지 전도하고 설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취조 때도 기독교의 국가관, 신관, 그리스도관, 성서관, 말세관 등을 설명하느라 조서가 무려 500여장에 달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 만에 출옥하자 산돌은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나환자 목회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21일에는 당시 순천사범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 아들 동인(東仁)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동신(東信)이 좌익에 의해 '예수쟁이' '친미주의자'라며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기독교 신앙만 버린다고 약속만 하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아, 마침내 그의 두 아들은 총살당했다.

 

10월 27일 애양원에서 산돌의 두 아들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그는 '아홉 가지 감사'라는 설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 두 아들이 함께 순교하였으니 더욱 감사, 자식들이 총살당하면서도 전도했음에 감사,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더욱 감사,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회개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셨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후 반란이 진압되고 아들 형제를 죽인 안재선도 체포되어 계엄사령부에 의해 총살당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산돌은 가해자의 구명을 탄원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마침내 담당관들을 감복시켜 그가 출감되자 양아들로 입적하여 손재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산돌은 양아들을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부모까지 기독교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산돌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28일 새벽 여수 근처 미평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죽는 순간에도 기도했었음이 밝혀졌다. 10월 13일 오종덕 목사에 의해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애양원 뒤쪽 바닷가 동도섬에 산돌과 그의 두 아들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3년 4월 이곳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준공되었다. 한편 안용준(安瑢濬) 목사가 쓴 '사랑의 원자탄'(1949)이라는 산돌의 일대기가 출판되었으며, 훗날 이 책은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돼 해외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 신양흥업 제작으로 1966년 6월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산돌은 경건한 신앙인으로 평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항상 찬송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소외된 이웃인 나환자들의 등불이자 친구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을 정도로 경이로운 인물이다. 산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초인적인 사랑의 사도'였으며, 무신론자에 반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지켜 결국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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