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남감리교회/고양감리교회

            

 

  대성전 전경


   중국과 평양으로 넘나들 수 있었던 고양은 육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곳에 민족을 사랑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윤치호 선생의 열의가 씨앗이 되어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회 고양감리교회가 세워진다. 고양감리교회를 기지로 역시 100년이 넘은 서울의 광희문교회, 종교교회, 자교교회, 배화학교가 뒤따라 세워졌다. 고양감리교회는 111주년을 맞은 할아버지교회이지만 청년처럼 봉사한다. 역사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문지역아동센터 등을 통해 지역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한다.


   고양동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다. 나지막하고 소박한 주택, 땅뙈기가 한 평이라도 여유 있을라치면 고추며 상추 모종이 무럭무럭 자란다. 한쪽엔 으리으리한 아파트가 즐비해 신도시의 면모를 풍긴다. 고양 지역은 조선시대 조선과 중국을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고양감리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이 숙박 휴식하던 사적 제 144호 벽제관지(碧蹄館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11년 전, 바로 이 곳 고양동에 고양감리교회가 세워졌다.

 
   윤치호 선생

 


   윤치호 선생의 초청과 미 남감리교회 리드의 내한


   고양감리교회는 좌옹(佐翁) 윤치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토포사(討捕使)에 등용된 부친을 따라 9세에 상경한 윤치호는 1881년 봄 17세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개화사상가이자 기독교인인 나카무라(中村正直, 1832~1891)가 설립·운영하던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유학중 영어를 터득한 윤치호는 1883년 5월부터 주한 미국 공사 푸트(L.H. Foote)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함께 귀국한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로 임명된 부친이 유배당한다. 윤치호는 1885년 1월 푸트의 소개장을 갖고 상해로 망명 겸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 중등과에 입학한 윤치호는 2년 뒤인 1887년 중서서원 교수 본넬(W.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1888년 10월 중서대학에서의 공부를 마친 윤치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서 3년,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도합 5년에 걸쳐 신학과 현대 학문을 공부했다. 윤치호는 틈틈이 순회강연을 하고 받은 돈과 학비를 절약해 모은 돈 2백 달러를 1893년 3월, 에모리대학 총장 캔들러(W.A. Candler)에게 위탁하며 한국 젊은이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 해 11월 상해 중서서원 교수로 부임했던 윤치호는 1895년 2월 3일, 조국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1972년 신년 주일예배 후 양총재 담임 목사와 교우들


   같은해 8월에 윤치호의 한국선교 요청이 이루어져 10월 13일 핸드릭스(Bishop Hendrix) 감독이 남감리교 최초의 주재 선교사 리드(C.F.Reid, 한국명 이 덕) 목사와 함께 인천을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리드 선교사는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선교 기지를 구입하고 출국했다가 1896년 8월 14일에 가족과 함께 이사해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감리사였던 상동교회 담임목사 스크랜턴(Scranton)은 자신이 맡고 있던 상동교회 교인인 김주현과 김흥순을 리드에게 보내 선교를 도왔다. 남감리교회는 다른 교파가 선교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여 선교하려고 했다. 따라서 미개척지였던 강원도 선교를 목표로 경기도 북부의 요지인 고양(高陽)을 우선적인 선교지로 삼았다. 지금의 고양동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첫 번째 역관(驛館)인 벽제관이 있던 곳으로 당시로는 번성했던 마을이었던 까닭이다. 김주현과 김흥순은 매서인으로 <인가귀도> <천로역경>과 같은 책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1897년 5월 2일은 남감리교 첫번째 교회인 고양읍교회가 조직된 날이다. 리드 선교사가 장년 24인과 유년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했던 것. 첫 교회는 윤치호가 예배당 용도로 사서 기부한 한옥에서 시작됐다.

 
   백사겸 전도사


   전도사로 거듭난 시각장애인 복술가 출신의 백사겸


   매서인 김제옥이 전도지를 전한 인물 가운데는 백사겸이라는 유명한 복술가도 있었다. 백사겸은 시각장애인으로 고양 땅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모셔갈 정도로 이름난 복술가였지만 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미신과 우상이 판치는 세상이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23년 간 사람을 속이면서 명성을 쌓아왔던 터였다. 어디를 가든 백사겸이 자리만 펴면 “백 장님이 왔다.”하면서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백사겸은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걸인을 잘 대접하는 등 선행을 하였으나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여전했다. 그러던 중 매서인 김제옥에게 전도지 <인가귀도(人家歸道)>를 받고, 며칠 후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보이지 않아 헤매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는 좌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우편에 있는 사람이 은으로 만든 산통을 주면서 “나는 예수이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산통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통이다. 그는 꿈에서 받은 은산통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바로 며칠 전에 받은 전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전도지를 읽어보니 인가귀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신 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다는 말에 통곡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세례를 받았다. 이 날이 바로 고양읍교회가 조직된 날이다.


   교인이 된 후 백사겸은 거짓되게 모은 재물을 정리했다. 가구를 파니 3천 냥이나 되었다. 백사겸이 돈 쓸 곳을 고민하던 중 돈을 몽땅 강도에게 빼앗겼다. 백사겸은 불의한 재물이니 잃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마저도 공짜로 남에게 주고 가족을 이끌고 고양을 떠나 행주 땅으로 이주했다. 행주 땅에 도착하니 소문을 듣고 전도를 부탁하는 이들이 많았다. 남감리교에서는 이런 백사겸을 사역자로 임명, 1899년부터 리드 선교사와 함께 개성으로 파송했다. ‘조선의 삭개오’라 불린 백사겸은 개성, 장단 등지에서 13년간 전도하면서 장단읍교회, 감암리(甘岩里)교회, 개성남부교회 등을 세웠다.

 
   창립100주년기념비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 김흥순


   1895년 6월 1일에 기독교인이 되어 상동교회에 출석하던 김흥순은 그 해 10월 1일 스크랜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남감리회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리드 선교사를 도와 전도활동을 펴고 고양읍교회의 창립에 기여한다.


   매서인들의 주요활동이 성서 판매였지만 목적은 아니었다. 매서인들은 회개한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지역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역할도 담당했던 것. 매서인들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확인하고, 복음으로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고자 했다.


   김흥순은 1896년 12월부터 엄동설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경기도 고양읍을 중심으로 성서를 판매하면서 전도를 시작, 많은 교인을 얻게 되었고 1897년 5월 2일 리드 목사를 통해 교회를 조직했다. 이 고양감리교회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설립한 남감리교회다. 김흥순은 계속해서 불교신자 김온양과 김억실 등을 고양읍에서 전도했다. 1911년 성경학원·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남감리교회의 초대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 뒤 경기·강원도 일대의 각 교회 목회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한국 최초의 원로목사(元老牧師)로 추대되었다.


    하늘문지역아동센터


   고양감리교회는 일제시대 당시 폐쇄된 적이 있었다. 이후 다시 모인 교인들은 또 흩어져야 했는데 선교구역분할 협정으로 인해 고양 지역이 장로교회 구역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재건되어 신앙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양감리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를 모토로 지역 섬김에 앞장선다. 고양동 거리를 청소하는 작은 일부터 방과후학교를 통해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그 모양은 다양하다. 고양감리교회 내에 위치한 하늘문지역아동센터는 이미 지역의 명물이다.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아이들의 쉼터가 되고, 맛있는 저녁을 제공하는 식당이 되고, 독서·영어·풍물·미술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또 다른 배움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더 나이 먹었으므로 더 많이 사랑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홍기 담임목사

   노인센터 등 지역에 필요한 복지와 섬김 늘릴 것


   1983년부터 미국에 있는 감리교회를 섬기다 21세기가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왔다는 이홍기 목사. 3년 전 고양감리교회에 부임한 뒤 목사 사무실의 ‘목양실’이라는 간판을 뗐다. 목사도 기도하고 섬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홍기 목사는 ‘목사는 목자고 교인은 양’이라는 인식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 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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