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 문화공간 백년대계


흥선대원군 별서…조선말기 대표적 건축물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

 서울미술관과 붙어 있는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6호로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다. 600년 된 소나무와 사랑채, 안채, 별채와 함께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계류(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가운데는 청나라풍의 정자(오른쪽 사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석파정은 6.25전쟁 이후 고아원과 병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인 소유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인수해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석파정은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말기의 건축기술이 잘 조화를 이룬 대표적 건축물이다.

 현재 석파정에 남아 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안채 뒤에 있는 별채와 청나라풍 정자로 총 네 동이다. ㅁ자형의 안채와 ㄱ자형의 사랑채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안채 뒤편 한 단 높은 곳에 一자형의 별채가 있다. 사랑채 앞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노송을 지나면 동선의 폭이 좁아지면서 연못과 정자가 있는 계류를 만나게 된다.

 창건 당시에는 안태각, 낙안당, 유수성중관풍루 등 일곱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각 당호에 따른 기록이 없어 오늘날엔 어떤 건물의 명칭인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사랑채에서 인왕산 쪽으로 물길을 따라 난 오솔길을 올라가다보면 개울 한가운데 위치한 망원정을 만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 ‘유수성중관풍루’이다. 몸채가 정사각형이고, 지붕은 기와 없이 동판으로 접어서 만들었다. 하단부는 석조 아치형이며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가 세 번 꺾인 돌다리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워진 위치며 모양새가 19세기 중엽 청나라 정자건축 양식을 닮았다.

 석파정은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의 소유는 아니었다. 조선 경종 때 조정만이 만든 소수운련암을 김흥근이 인수해 사용하고부터 그 기록이 전해진다. 김흥근이 언제 석파정을 조영했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연대를 대략 1837∼1866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김흥근이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 1837년이며 소치 허련이 김흥근을 만나 석파정에 머물기 전까지의 시간이 1866년이다.

 ‘소치실록’ 기록에 나타난 공간의 묘사가 현재 석파정의 공간 구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866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 틀림없다.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는 자연과 가까이 지내려는 풍조에 따라 별서 조영이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세도가들이 도성 안에 살림집을 두고 도성 밖 경치 좋은 산자락에 별서를 조성해 사교모임이나 풍류를 즐겼다. 별서 정원의 건물은 주로 누와 정자로 주변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개방된 형태이다. 담장이나 문은 없거나 부분적으로 있어서 자연과의 소통을 원활히 한다. 석파정은 입구와 건물 사이의 높은 고도차로 인해 생기는 시각적인 경계 때문인지 담에 의한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경사를 오르면 평지가 나타나면서 정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석파정을 어떻게 흥선대원군이 소유하게 됐는지는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기록돼 있다. 흥선대원군이 별서를 팔 것을 간청했는데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했다. 옛 풍습에 따라 김흥근이 억지 승낙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이곳에 행차하도록 권해 고종과 같이 석파정에 머물렀다. 그 후 ‘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김흥근이 다시는 오지 못했고, 결국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다.

 흥선대원군은 석파정을 소유한 뒤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었다. 석파정에는 흥선대원군이 ‘강일독경 유일독사’(강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라 쓴 편액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편액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특권층의 사적 공간이던 이곳이 오늘날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공간으로 개방되기까지는 힘든 여정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과 함께하고자 했던 열정과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석파정은 오늘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문화예술공간이 됐다. 문화애호가가 사랑하는 석파정과 서울미술관이 앞으로 500년 쯤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을 50년간 소유하며 이곳에서 정치권력의 불로장생을 꿈꿨다면 나는 이곳이 모든 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석파정과 서울미술관의 백년대계를 꿈꿔본다.<끝>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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