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동계곡 - 뛰어들고 싶은 물길                            


 

고선교를 건너면 잔대미 마을이다. 평범한 산골 마을 밭이 펼쳐진 풍경이다. 계곡 사람들은 ‘비탈밭’에서 채소나 당귀

같은 한약재 농사를 짓는다. 마음 편안하게 녹색의 향연을 즐기며 걷는다. 그렇게 2~3km 정도 걸었을까?

길가의 풍경이 거칠게 바뀐다.

하늘 가린 숲, 음습한 계곡길

길 오른쪽은 산 절개면이다. 바위와 흙이 엉켜있는 그곳에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왼쪽은 계곡 낭떠러지다.

길 한참 아래로 물길이 났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계곡은 보이지만 길에서 바로 내려갈 수 없다.

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숲과 계곡이 내뿜는 음습한 기운이 마음을 졸였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 말고는 앞뒤 옆이 산에 산이고 절벽에 절벽이다.

 ‘첩첩산중’이란 말이 이 계곡에 딱 맞아떨어진다. 계곡 상류로 들어갈수록 눈과 귀, 코와 숨구멍까지

계곡의 숨결에 익숙해진다.

계곡에 바람이 불면 물소리도 더 쾌활해 진다. 서늘한 계곡의 기운에 여름 더위가 싹 가신다.

계곡은 낯설면서도 아름다웠다. 한차례 바람이 계곡을 휩쓸고 간다. 숲 전체가 일렁이고 계곡에서 부서지는 물 알갱이가

바람에 흩날린다. 비 온 뒤라 물이 많다. 5km 정도 걸어 마방에 도착했다. 새로 놓은 다리는 계곡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마방에는 민박집과 야영장 등이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번 걷기여행 코스의 반쯤 온 셈이다. 마방에서

처음으로 물가로 내려갔다. 계곡은 협곡처럼 산에 둘러싸여 답답했지만 물은 깨끗하고 차가웠다. 잠시 물가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산에 걸린 하늘이 좁다.

계곡의 밤, 마음에 새긴 발걸음

산 높고 골 깊은 이곳은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마방 계곡에서 십여 분 정도 쉬었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걸어

약 2km 정도 위에 있는 황토민박집에 숙소를 정해야 했다. 민박집 앞 넓은 계곡으로 나갔다. 해질 무렵 계곡물은

더 큰 소리를 내며 흐르고 물도 더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텀벙거리며 계곡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시리다. 물에 그대로 누워 뒹굴었다. 음습한 계곡의 습기와 땀이 씻겨나간다. 계곡물에 들어가 앉아 멍하니 있었다.

머리도 맑아진다. 계곡의 밤은 소리로 보고 소리로 느끼고 소리로 모든 것을 직감해야 한다. 민박집 전등불이 있지만

계곡은 칠흑같이 깜깜하다.

바람은 낮보다 더 날카롭게 울부짖는다. 우리가 있는 숲과 계곡이 통째로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오즈의 세상’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럴 때면 불 켜진 창들이 아늑하다. 창 안 환한 불빛 아래서 소곤대며 옛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술잔은 계속 돌았고 마음 깊은 곳 비밀의 방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길을 내며 흐르는 물줄기와 숲을 통째로 흔드는 광풍, 괴기스러운 계곡,

이 모든 것들이 낯선 두려움으로 다가와 편안한 휴식이 됐다. 아무 생각 없이 잠들었다.

저무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머리가 맑아진다.

금광으로 유명했던 계곡에 자연만 남아 여행자를 반긴다

어제 걸어왔던 잔대미, 마방 말고도 계곡 상류로 올라가면서 노루목, 북말, 큰터, 새터, 간기, 도화동 등 자연마을이 있는데

 이번 걷기여행 코스의 종착점은 ‘큰터’다. 구마동 계곡에서 가장 넓은 땅이 있다 해서 붙여진 ‘큰터’에 살고 있는 안세기

할아버지를 만났다. 열세 살 때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할아버지에 따르면 한때 계곡을 따라 15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계곡 하류와 상류에 초등학교가 각각 하나씩 있었을 정도라니 마을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금채굴과 벌목을 위해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상주했다고 하니 더 많은 사람들이 계곡에서 살았을 것이다. 말을 잇던 할아버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좋았던 시절 얘기를 덧붙인다. “한때는 5리, 10리 거리를 두고 계곡을 따라

주막이 있었다”고. 돈 풀리는 날이면 하루에 이 계곡에서 없어지는 막걸리만 해도 열 말은 충분히 넘었단다.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부근과 노루목 세류암 부근이 유명한 주막거리였다. 하루일 마치고 ‘큰터’나 ‘노루목’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한 잔 거나하게 걸친 밤이면 할아버지는 휘청거리는 달빛을 의지해 집으로 돌아왔단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찐 감자와 동동주로 점심을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민박도 하니까 다음에 오면 꼭

하루 지내고 가라신다.

처음 걷는 길에서 느끼는 긴장감에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던 길, 돌아갈 때는 마음 편히 천천히 걸었다. 물안개가 피어난

계곡과 숲은 신비로웠다. 길가에 서낭당이 있어 문을 열었더니 열린다.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께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길을 잘 지켜 달라’고 빌며 문을 닫았다. 나비가 숲에서 나풀거리고 벌이 계곡 절벽에 핀 꽃에서 나에게 날아든다.

어제는 음습한 기운으로 느껴졌던 계곡의 기운이 오늘은 온몸을 청정하게 만드는 그 무엇으로 느껴진다. 걷다가

더우면 계곡에 몸을 담그면 그만이다. 그렇게 계곡과 길을 넘나들며 돌아오는 길, 물 건너 바위에 꽃이 피었다.

바람에 꽃줄기가 흔들린다. 나는 물을 건너 꽃을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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