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를 위한 변명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떤 음식은 슈퍼푸드라고 해서 만병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이 과대평가되기도 하고, 어떤 음식은 아예 못 먹을 음식으로 부당하게 매도되기도 한다. 밀가루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이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대표적 음식이다. 지구상에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밀을 주식으로 먹고 있고, 우리나라와 같은 쌀 문화권에서도 심심치 않게 먹고 있는 밀가루를 한편에서는 건강에 아주 안 좋은 음식으로 매도하고 있다. 정말 밀가루가 그렇게 나쁜 음식일까?

[헬스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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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역사

밀은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식물로 알려진 벼보다 그 재배 역사가 오래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1000년 전에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추산된다. 야생밀은 그냥 풀이었는데 그 낟알에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전분과 단백질 성분이 풍부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낟알이 작아서 재배가 부적합했는데 열대에 근접한 지역에서 강하게 발생하는 자외선의 영향으로 돌연변이가 생겨 현재 우리가 보는 큰 낟알을 가진 밀이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큰 낟알을 가진 풀이 살려면 기온이 너무 높지도 않고 혹한도 없고 건조한 기후조건이 필요했는데 지금의 중동이 적합했다고 한다. 서남아시아라고 하는 이 지역은 레바논,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이란 지역으로 거의 모든 재배 곡물의 유전학적 식물지리학적 원산지라고 한다.

밀은 쌀과 다르다

곡식의 낟알로 밥을 해먹는 쌀과 달리 밀을 밥으로 먹는 경우(밀밥)는 매우 드물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밀을 가루로 만든 후(밀가루), 반죽을 내어 빵을 만들거나 국수로 만들거나 쿠키 등으로 먹는다. 밀은 영양성분에서 쌀과 많이 다르다. 현미는 100g당 370kcal의 열량이 있고 탄수화물이 77g, 단백질이 8g 정도 포함되어 있다. 밀은 100g당 327kcal로 현미보다 열량이 낮은 편이다. 탄수화물은 71g, 단백질은 11.3g으로 현미에 비해 탄수화물은 낮지만 단백질 함량이 많이 높다. 밀에 들은 단백질, 특히 글루텐은 밀이 밥이 아니라 반죽으로 쓰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글루텐은 밀이 건강에 나쁘다고 주장되는 가장 대표적인 표적이기도 하다.

밀의 종류

밀은 수천종의 변종이 있지만, 현대의 작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3가지가 있다. 가장 많이 재배되고 많이 쓰이는 ‘보통밀(common wheat; Triticum aestivum)’은 주로 빵을 만드는 데 쓰인다. 단백질 함량이 많은 ‘듀럼밀(durum wheat: T.durum)’은 파스타를 만드는 데 쓰인다. ‘클럽밀(club wheat:T compactum)’은 케이크, 비스켓, 쿠키나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데 이용된다.

밀 종류와 빵, 과자, 파스타

밀은 자라난 기후에 따라서도 단백질 함량이 다르다. 건조한 기후에서 자란 밀은 ‘경질(hard)’인데 단백질 함량(주로 글루텐)이 11~15%로 높은 편이다. 찰지고 쫄깃한 성질이 있어 빵을 만드는 데 쓰인다. 습도가 높은 곳에서 자란 밀은 ‘연질(soft)’인데 단백질 함량이 8~10%로 낮다. 바삭하고 팍팍한 쿠키나 비스켓을 만드는 데 쓰인다. 밀 중에서 단백질 함량이 아주 높은(16%) 듀럼밀은 스파게티를 포함한 파스타를 만드는 데 쓰인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하는 ‘봄밀’은 단백질 함량이 높고 ‘겨울밀’은 단백질 함량이 낮다.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우리밀’은 대부분 겨울밀에 연질이라 단백질 함량이 높지 않다. 제빵용 우리밀도 개발되고 있으나 많은 경우 국수나 케이크용으로 적합하다고 한다.

‘밀의 현미’ 그레이엄 밀가루

밀을 여러 번 분쇄해서 갈아내면 하얀 밀가루가 나온다. 밀을 갈면 껍질과 씨눈 성분은 다 제거되기 때문에 비타민과 미네랄과 식이섬유는 많이 없어진다. 그래서 밀가루는 주로 전분과 단백질로 이루어진 가루이다. 백미를 생각하면 된다. 백미는 잘 먹으면서 흰 밀가루만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생각이다. 여기에 비해 밀껍질과 씨눈을 다 포함해서 분쇄한 밀가루를 그레이엄 밀가루(graham flour)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전곡밀가루'라고 한다. 영양분이 훨씬 풍부하지만 지방이 많은 씨눈이 포함되어 있어 산폐가 잘되어 오래 보관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흰 밀가루가 건강에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그레이엄 밀가루를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밀의 현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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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부비만, 당뇨병 그리고 글루텐

밀가루가 건강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논점은 글루텐 이슈와 당뇨병 이슈이다. 밀이 복부비만과 당뇨병을 초래하고 과장된 인슐린 반응과 혈당 상승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사에서 밀을 제거하면 복부비만도 좋아지고 당뇨병 발생도 줄어든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쌀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쌀, 밀, 감자, 고구마를 가리지 않고 모든 탄수화물 음식은 빨리 먹거나 소화가 잘되는 형태로 먹거나 과하게 먹으면 다 복부비만과 당뇨병을 일으킬 수 있다. 많이 먹어서 좋을 것은 없다.
글루텐은 밀과 기타 잡곡의 가공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불수용성 단백질인데 잘 늘어나고 탄력있는 그물 구조를 만든다. 글루텐은 밀가루 반죽이 발효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가두면서 늘어나고 부풀어 오르는데 그 결과 빵빵하고 찰진 빵을 만들 수 있다.

글루텐이 건강에 해롭다고 하는 것은 서양인에게 있는 셀리악 병의 유발원인 중에 글루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셀리악 병은 글루텐을 단순 아미노산으로 분해할 수 없는 유전적 배경이 있는 사람에게 발생하는 일종의 면역질환이다. 그런데 이런 유전적 배경이 적지 않은 서양인에서도 셀리악 병은 전체 인구의 1%이고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욱 더 놀랄만하다. 2013년 6월에 첫 번째 환자가 보고되었고 그 수는 아직도 미미하다. 물론 글루텐 민감성이 있는 사람은 더 있겠지만 전체 국민 비율로 볼 때 너무나 적은 숫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밀을 소맥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약으로도 먹었는데 글루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은 밀가루에 글루텐이 들었다고 기피할 이유는 없다.

조홍근(내과 전문의)

당뇨와 혈관질환의 전문가로 예방과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내과 전문의. 주요 매체에 정기적 칼럼을 게재하며, 의사는 물론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정기적으로 질환의 메커니즘을 쉽게 풀어 쓰는 글을 쓰고 있다. 《죽상동맥경화증과 지질대사》, 《대사증후군》, 《내몸 건강 설명서》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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