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조개나물

내 고향 거창에서의 대처는 대구였다.

1960년대 너나없이 농촌을 떠나 도회로 진출할 때 솔가하여 대구에 터를 잡은 분들이 많다.

며칠 전의 대구행은 그런 행사가 아니라 꽃산행이었다.

이름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대구 불로동에 들어서니 공기 속에 색다른 사연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내 고향 거창에서의 대처는 대구였다. 1960년대 너나없이 농촌을 떠나 도회로 진출할 때 솔가하여 대구에 터를 잡은 분들이 많다. 그런 연유로 예전에는 결혼식, 최근에는 장례식에 가려고 종종 대구를 찾는다. 며칠 전의 대구행은 그런 행사가 아니라 꽃산행이었다.

출발-도착만 있는 기차여행은 인간이 풍경과 소통하면서 얻는 애틋한 감정을 생략해 버린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아침에 떠나면 저녁은커녕 이슬이 마를 무렵이면 어디든 도착한다. 이름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대구 불로동에 들어서니 공기 속에 색다른 사연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삼국시대에 조성되었다는 210여 기의 무덤들이 밀집한 불로동 고분군. 불로(不老)라 했지만 죽음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던가. 탱자나무로 울타리 했지만 해마다 무덤은 늘어나고, 봄마다 새파랗게 새롭게 살아나서 다종다양한 야생화를 기르고 있었다.

이곳은 무덤이 도심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무덤 주위까지도 침범해 들어간 형국이다. 이미 죽음과도 많이 친해진 듯 무덤 사이로 길이 반질반질하게 나 있다. 고은의 절창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유서 깊은 동네의 음덕을 입었는지 이곳에는 귀한 야생화들이 차례차례 다녀간다. 이름을 잃고 아라비아 숫자로만 남은 어느 무덤 앞을 점령한 것은 조개나물이었다. 꼿꼿한 줄기 위에 층층의 다락방 같은 구조이다. 잎겨드랑이마다 입술 모양의 보랏빛 꽃들이 늠름하게 달려 있다. 이렇다 할 향기가 없지만 벌들이 쉬지 않고 출입하고 있다.

늙지 않는다는 동네의 지하에서 갓 올라온 꽃들은 발등 높이다. 따지고 보면 결혼-장례-무덤으로 이어지는 시간도 요만한 길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덤에서 뻗어나간 길이 아파트를 꽉 껴안고 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그런 생각도 해보면서 셔터를 눌렀다. 조개나물,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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