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꿈꾸는 자의 몫                    

                 


사람은 왜 웃는가. 웃음은 전통적으로 생리 철학 심리 미학적 측면에서 주로 다뤄져 왔다. 이에 대한 연구는 10세기 이슬람 철학자인 아부 하이얀 알-타우히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규명한 웃음의 본질은 대략 70여 가지에 이른다.

타우히티는 웃음을 인간의 사유능력과 동물성 사이의 중간영역에 뿌리를 둔 ‘어떤 힘’으로 규정했다. 어떤 힘이 사유능력 쪽으로 치닫게 되면 영적 힘을 발휘하고 동물성 쪽으로 향하면 영적 힘을 표출시킨다는 것이다. 이 영적 힘은 다시 기쁨 혹은 쾌감 그리고 분노로 나누어진다. 이 힘이 내부로 스며들면 기쁨이나 쾌감이,외부로 발산하면 분노로 터져 나오게 된다는 주장이다. 내부로 스며든 힘은 마약성분보다 훨씬 강한 도파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바로 기쁨이나 쾌감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타우히티의 견해다.

임마누엘 칸트는 ‘웃음은 고조된 기대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변화되는 데서 생기는 강렬한 감정’으로 정의했다. 기대했던 것에 대한 돌연한 소실의 결과로 해석한 것이다. 또 쇼펜하우어는 ‘웃음이란 돌발적 사건이 유발되면서 나타나는 우스운 심리상태’로 봤고 마르세르 파뇰은 ‘돌연한 긴장으로부터 해방’으로 정리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불행’(데카르트),‘큰 사건은 아니지만 타인이 권위를 상실했을 때’(알랙산더 페인),‘기계적인 것과 살아 있는 것 사이의 모순’(베르그송) 등으로 규정해 웃음의 본질은 보는 시각에 따라 혹은 시대 흐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웃음에 대한 다양한 본질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번째가 우월론이다.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너는 역시 나보다 못났구나’라는 순간적인 우월감에 젖어 웃음이 일어난다는 학설이다. 개그맨이 바보연기를 하면 관객은 박장대소하는데 이는 자신이 웃음의 대상보다 역시 잘났구나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는 견해다. 우월론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남을 보고 웃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견해지만 자신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면 불쾌하기 짝이 없게 된다. 이 학설은 훗날 사디즘(Sadism)적 행위와 연결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론의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기대상실론이다. 사람들이 우월감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상실됐을 때 웃음이 터진다는 주장이다. 머릿속에 생각했던 개념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부조화가 웃음을 자아낸다는 이론이다. 빗나간 상식이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사회론이다.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지 못해 웃음거리의 원인이 된다는 견해다.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이상한 옷차림,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장애,무학 무능 등이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웃음의 공통점은 뭔가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통상적인 수준이나 표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들이 웃음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학설이다. 사회적 일탈현상이 웃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웃음은 일탈현상을 배척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론 외에도 안도감의 이론,인지반응 이론 등 웃음에 대한 학설은 다양하지만 이를 종합해 볼 때 웃음은 우월감과 빗나간 상식 그리고 언어적 유희 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는 웃음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기쁨과 감사가 넘칠 때 웃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성서적 입장이다. 기쁨과 감사는 웃음의 원인이요 웃음은 그것들의 산물이라는 해석이다. 시편 중 익명의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여호와께서 포로들을 시온에 돌아오게 하셨을 때,우리는 (기뻐)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시 126:1?쉬운성경) 그러면서 꿈꾸는 자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시 126:2)고 노래했다. 웃음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의미다.

또 한 사례도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었다(창 17:17). 아내인 사라 역시 속으로 웃었다(창 18:12). 당시 아브라함은 100세였고 사라는 90세였다. 이들은 자녀를 낳을 생리적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웃은 이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일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의 한계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애착은 결코 맘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이런 꿈은 사라를 통해서도 잘 설명되고 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남편과 나는 너무 늙었는데,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생길까?”(창 18:12)

꿈을 꾼 일이 현실화될 때 기쁨의 산물로서 웃음이 뒤따른다는 것이 성서가 암시하는 웃음의 배경이자 원인이다. 여기서 성서가 무시로 기뻐하라(빌 4:4)고 명령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시로 기뻐하면 무시로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당시 뇌속에 웃음보(본보 4월12일자 33면 참조)를 숨겨놓으셨다. 웃음보가 이미 있다는 것은 웃도록 디자인된 피조물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왜 웃는가에 대한 그 어떤 학문적인 설명도 ‘뇌속에 웃음보를 숨겨놨기 때문’이라는 창조의 비밀 앞에서는 한낱 사족에 불과하다.

남병곤 편집위원
namb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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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주신 분 △박광동 교수(단국대 천안캠퍼스 체육대학장) △류종훈 교수(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김영호 연구원(한국표준과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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