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제사장인가? 

 


최근 대형교회들의 세습 문제가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는 가운데, 감리교단은 세습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를 비롯해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세습을 옹호하는 근거로 구약시대 제사장직을 들고 있다. 제사장직이 세습됐던 것처럼 목회자의 세습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성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제사장적 사고의 특징은 이 세계를 거룩과 속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 또 거룩함도 그 정도를 구분해 만물을 '거룩'의 위계질서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핵심을 요약하자면, 더 거룩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계층)'이 존재하며 공간적으로는 성전이,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이,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제사장 자신들이 더 거룩하고 우월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제사장들에 의해 상당 기간 일종의 '신정정치'가 행해졌던 제2성전시기를 거치며 유대사회에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에서 이런 세계관은 완전히 전복된다. 그는 적법한 제의의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은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실 뿐이라고 답한다(
요한복음 4:24). 제사장들의 '공간적 거룩'의 개념을 부인한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 또한 제사장들과는 다르게 이해했다. 신이 휴식한 날이므로(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인간도 일할 수 없다고 규정했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는 (안식일에)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요한복음 5:17) 제사장적 안식일 개념의 근간을 뒤흔든다. 거룩한 계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스스로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규정하면서(요한복음 14:6) 자신 이외에 누구도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될 수 없다고 사실상 선언한다. 또한 신이나 신앙심을 내세워 남다른 대우를 받거나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모습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이렇게 예수는 당시의 지배적 관념이던 제사장적 세계관을 획기적으로 뒤집는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 역시 제사장적 규정들을 재해석하여 일상생활에 세세히 적용하고자 했던 율법적 형식주의자들에 집중되었다. 예수는 당시 종교권력이었던 제사장들과 그들의 관념에 대해 대척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신약성서히브리서에서는 예수가 레위인들의 전통적 제의제도를 폐했다고 선언되기에 이른다(히브리서 7:18).

그러므로 이런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의 (특히 개신교) 성직자들이 은연중 자신들을 제사장에 준하는 특권계층으로 여기거나 세습을 합리화하는 논거로 이 제도를 차용하는 것은 예수가 개혁하고자 했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며, 그가 가리켰던 삶의 방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물론 예수 자신도 제사장적 구실을 한 것으로 이해되지만(히브리서 4:14), 그는 세습적 특권계층인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닌, 신비적 존재로 인식되던
멜기세덱의 계열로 여겨졌다(히브리서 6:20 등). 또한 이후 교회 공동체에도 제사장적 기능이 부여되고 있지만(베드로전서 2:9), 이는 옛 이스라엘을 대치하는(출애굽기 19:6) 집단적 개념이지 교회 내의 일부 계층에 특권을 부여하자는 취지는 결코 아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질서의 유지를 위한 권위도 필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일정한 신학적 소양을 갖춘 리더십을 양산해 내는 것은 일면 무척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양산된 리더십들이 다시금 종교적 특권계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과연 예수가 진정으로 뜻했던 바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특히 요즘같이 일부 성직자들의 도덕적 수준이 우리 사회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고, 적지 않은 경우 목사라는 계급적 특권이 그들에 대한 비난을 방어하는 방패막이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권을 포기하고 낮아짐으로써 얻어지는 권위가 하나님 나라의 권위다. 이것이 예수 자신이 삶으로 보여준 본보기다.

전재영 성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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