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영훈목사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 11:1-5]

 오늘은 대강절,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12월 둘째 주일은 전 세계적으로 ‘성경 주일’로 지켜집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축복이고 귀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성경을 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서 모금을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성경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크게 두 권의 책으로 되어있는데,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고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답이 오늘 특별히 11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온 세계에서 전쟁 소식이 들려옵니다. 중동 지역에서, 또 우리나라 북쪽에서 자꾸 뭘 쏘아 올리면서 본인들을 건드리면 미국 본토까지 폭격을 하고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런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 가운데 임하실 때에 미움과 갈등과 분노와 전쟁의 소식이 사라지고 사랑과 화목과 평화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1. 성령님과 함께하신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첫째로, 성령님과 함께 그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이새의 줄기에서 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새의 아들이 다윗이고 다윗의 족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마태복음 1장 17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십자가에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때까지 한평생 성령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이사야서 11장 2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과 동행하신 예수님이 그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로 2절은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갖가지 시험을 당하지마는 성령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넉넉히 모든 문제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 많은 세상, 어려움 많은 세상에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과 능력이 함께 하신 일생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자세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늘 내 생각, 내 뜻, 내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내 주장을 하다가 사람과 부딪히고 갈등하고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는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결혼해서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킬 수가 없고 아내가 남편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성령께서 그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만들어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성경은 권면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 ‘받으라’는 표현은 진행형입니다. 받고 또 받고 또 받고 또 받으라는 것입니다. ‘옛날 언제 한 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늘 재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고 평생 달리는 차가 없습니다. 며칠 다니면 또 휘발유를 채워놓고, 또 채워놓고, 또 채워놓듯이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 말씀과 성령으로 또 충만받고, 또 충만받고, 또 충만받아서 문제와 어려움과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 앞에 놓인 구체적인 사역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은 성령임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의 경험은 곧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역을 담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성령충만한 삶을 선택해야 한다. 성령충만함을 위해 죄사함과 용서를 구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삶의 모든 주도권을 그분께게 넘겨드리자. 이런 삶을 산다면 반드시 성령이 충만한 삶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성령충만 받을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과 8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문제와 어려움과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실수하거나 분노하지 않게 하여주시고, 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한평생 성령과 동행하신 것처럼 반드시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신 예수님

 둘째로,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1장 3절에,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다고 그랬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늘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셨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돼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모습, 자기 영광, 자기 자리, 자기 인기, 너무나 거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해서 은혜받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난 다음, 그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인 것을 알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게 된 것도, 또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수입을 얻게 된 것도, 내가 하는 일이 잘되는 것도 다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될수록 고백하는 것이 “주님,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나의 왕국을 세우지 않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얻게 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위로함을 받고 치료함을 얻게 되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돌이켜서 이제는 나, 나, 나, 내가 아니라 주님, 주님,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잠언서 1장 7절에,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할렐루야!

 전라도에 증도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이 증도를 천국의 섬으로 만든 한국이 낳은 위대한 여성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 17살 때 증도로 시집을 갔는데 그때는 중매결혼이어서 가보니 남편 될 사람이 이미 딴 여자랑 살고 있었고 자기 부인 온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떠나버렸어요. 남편이 없는 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20년. 요즘 같으면 뭐 그런 일을 상상할 수가 없죠. 아니, 남편이 없는데 가서 시부모님 밑에서 삯바느질하고 20년 시부모를 공경하고 시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니까 그제야 목포로 나왔는데, 거기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만나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너무나 그의 인생이 절망적이고 상처투성이였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시부모도 없이 홀로된 그 문준경 전도사님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고백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
그래서 지금 서울신학대학이 된 경성성서학원에 들어가서 40세 만학도의 그 어려운 공부를 마치면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계속해서 전도를 합니다.

 신안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었는데, ‘대리거지’ 라는 별명을 얻어가면서 욕을 먹으면서도 잔칫집, 부잣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다가 굶주리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거지들에게 나눠줍니다. 또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장티푸스가 돌아서 가족들조차 다 돌보지 않을 때 ‘나는 홀몸이니까 간호하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가서 그들을 돌보고 기도하고 그들이 죽으면 장례식도 치러줬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었으니까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 문준경 전도사가 가서 장례식을 치러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전도사님에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분이 목소리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에요. 전도하는 방법은 그 언덕에 올라가서 찬송을 부릅니다.

 당시 뭐 라디오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누가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니 사람들이 노래들으러 몰려옵니다. 몰려오면 열심히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가 같은 여러 가지 찬송가를 부른 다음, “이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다.”라고 하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그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교회가 서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였던 1931년부터 6년 동안 임자 진리교회, 중동리 성결교회, 대초리 성결교회를 개척하고 또 우전리, 재원, 방축리 기도처를 세웁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에 고무신이 무려 9켤레나 닳도록 동분서주하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젊은 주의 종들이 본받아야 될 거 같아요. 이 40이 넘은 홀로된 아주머니 전도사님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어요. 우리는 여의도교회 개척국에서 개척비도 지원해주고 때로는 교회도 사주고 “열심히 하라!”해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셔서 이와 같은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여주옵소서!
6.25 전쟁이 나자마자 공산당들이 그를 잡으러 왔습니다.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 그래서 문준경 전도사를 붙잡아 죽창으로 찌르고 발로 차고 총대로 찍어서 그를 죽였습니다. 죽어가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주님,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

 늦게 주의 종이 되었지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는 공산당에 의해서, 공산당원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생을 떠나셨지만, 천국에 가셨지만 섬마을 주민 전체의 90%가 예수를 믿게 되고 이러한 영향이 신안군 전체로 퍼져나가서 14개 면에 1004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에 약 100여개 교회가 세워지고, 문준경 전도사가 순교한 증도는 ‘금연의 섬’, 그 섬에는 다 예수 믿어가지고 담배 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그 분의 전도를 받고 훌륭한 한국 교회의 역사에 자취를 남긴 목사님들이 많이 탄생하셨는데요, 대학생선교회 CCC총재인 김준곤 목사님, 지금 천국 가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이시며 중앙선교회 담임이었던 이만신 목사님, 한신대 총장을 지내신 고재식 박사님, 한국치유상담원 대표이신 정태기 목사님 외에 법관, 기업가 100여명 등이 우리 문준경 전도사가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홀로된 여 전도사님 한 분이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여러분들은 그 전도사님보다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 전도사님보다 다 옷도 더 잘 입으신 거 같고, 삶도 훨씬 더 풍요롭게 사시는 거 같은데, 우리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가 돌아보면서 “주님, 이 전도사님이 이렇게 일생 바쳐 헌신하다가 죽창에 찔리고 총대에 맞아 순교했는데 이제 우리 남은 여생 정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이 사회에 큰 사랑의 감동을 끼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결심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공의를 행하신 예수님

예수님 이 땅에서 셋째로, 공의를 행하셨습니다. 11장 4절 5절은 설명합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공의를 행하시는 예수님. 이사야 선지자 그 당시는 공의가 사라졌던 때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 하느라 저들이 타락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상인들이 자꾸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 행각을 해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재판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받고,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의 공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인간 법정에서 공의가 무시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만일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의 유익에 대해 무관심하시거나, 공의의 실행을 무시하시거나, 교만한 압제자들을 끝내 방치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 떨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시며, 공의로써 우리의 행실을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에게 응분의 보응이 돌아가게 하실 것이며, 거만한 핍박자를 징벌하심으로써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의를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메시아가 오셔서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하신다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공의를 통해서 그들이 빼앗겼던 권리를 회복시켜주시고 그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72편 2절입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때로는 세상에서는 힘없는 자들이, 권력 없는 사람들이 이 재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권력을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하나님의 공의로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그리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만들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72편 4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기독교인의 공의는 없는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불쌍한 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셔서 늘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부자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무시하고 짓밟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 결혼했다가 실패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따뜻하게 말을 건네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또 병든 사람들 한센병 환자들 등 당시 사람들로 취급하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가깝게 지내시고 돌보시면서 주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죄지은 여자라고 끌려 와서 돌로 쳐서 죽임 당할 위기에 있던 사람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아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잘사는 사람들은 그 주변에 늘 사람이 있습니다. 잘사는 것 때문에.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요. 이 추운 겨울을 지나도 겨울에 바닥이 따뜻하지 못한 그곳에서 전기담요 하나 두르고 덜덜 떨면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그것이 공의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친구가 많은 사람을 찾아가지 말고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고 외로워서 홀로 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그들을 찾아가서 예수의 사랑을 나눌 때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널리 널리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와 같은 사랑의 사람들 되시기를, 공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고 가진 것이 너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 자신밖에 모르고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님과 동행하시며 사랑을 실천하시고 공의를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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