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이영훈목사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막 11:1~6)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로서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든 백성들이 나와서 겉옷을 펴고 그 앞에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을 기념해서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을 보면 이 한 주간의 기록을 전체 3분지 1이나 할애해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마가복음뿐 아니라 마태, 누가, 요한복음, 이 4복음서 전체가 예수님의 고난주간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월요일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고, 화요일 날에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셨고, 수요일 날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고난을 준비하면서 하루 종일 기도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루를 보내셨고, 목요일 날에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새 기도하시다가, 한밤중에 가룟 유다가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예수님을 붙잡아 가지고 대제사장의 장인인 가야바의 집에 먼저 갔다가, 그다음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갔다가, 자고 있는 빌라도 총독에게 갔으나 빌라도가 자기가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헤롯왕에게 보냅니다. 헤롯왕에게 갔는데 헤롯왕도 이 말 저 말을 물어보았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니까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밤새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예수님을 끌고 다니던 그들이 와서 예수님을 사형 선고하도록 재판한 것이 새벽 6시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던 그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그래서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산을 올라가셔서 금요일 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누이셨다가 안식 후 첫날, 주일 날 새벽에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행하신 그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우리가 뒤따라가면서 이 한 주간 정말 뜻깊게 경건한 모습으로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겸손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1장 7절에 보니까,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일반 다른 왕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앞뒤에 호위대를 세우고 나팔을 불며 입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뒤에 갑자기 등에 무거운 사람이 앉으니까 뒤뚱거리면서 들어온, 그러한 보잘것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어린 나귀 새끼는 겸손, 낮아짐, 평범함, 가난, 이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가장 낮아지셨고, 겸손의 종으로 그 일생 동안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 땅에서 행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펴주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에 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마태가 그 예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5절에,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던 모세는 그 많은 무리들이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들었음에도, 온유한 모습으로 장정만 60만 명, 약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이끌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셔서, 평생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도 제자들이 옆에서 목에 힘을 주고 예수님이 높아지면 한 자리 하려고 하는 그런 교만함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15절은 설명합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람의 근본 뿌리가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순간부터 교만이 우리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교만에서 벗어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이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쓱 나를 점령하고, 그 교만이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활한 뱀이 자신의 교만한 독을 최초의 인간에게 주입했을 때, 모든 인간이 비참함에 떨어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에 참여하는 자들로 만드시기 위해, 그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셨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질 때,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 남보다 더 많이 배웠을 때, 내가 사람들 앞에서 칭찬 받고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이때 조심해야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이 더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옛말에 완장을 채워주면 알 수 있다고 했어요. 보통 때는 멀쩡하던 사람들이 감투를 하나 씌워주면 목에 힘주고,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꼭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더욱 귀한 일을 이룰 줄로 믿습니다.

2. 순종의 은혜

 둘째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순종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건너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면 끌고 와라. 누가 뭐라 하면 ‘주가 쓰시겠다’하고 말을 전해라.” 마가복음 11장 2절, 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누가복음을 보면 그 임자들이 나와서 왜 가져 가냐고 항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3절, 34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런데 “주님이 쓰신답니다” 라고 말하니까 거기에 저들이 아무런 토를 달지 아니하고 “예, 그러면 가져가셔서 주님이 쓰시도록 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길이요, 등불입니다. 말씀을 읽고 지켜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의 거울입니다. 말씀에 비춰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회개해야 됩니다. 말씀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데, 그것이 바로 순종의 삶입니다. “주여, 말씀만 하시옵소서!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할렐루야!

 순종은 희생을 동반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100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의 기록은 믿음의 조상으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가 없습니다. 더구나 100세가 되어 낳았으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눈만 뜨면 “이삭아, 이삭아, 어디 있냐?” 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가서 바쳐라.”

 3일 길을 가야되는데 아브라함은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지만 마음을 정하고 말씀에 순종해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그를 묶고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로 18절입니다.
이르시되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온전한 순종이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도 순종의 일생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5장 8절, 9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길은 순종밖에 없습니다. 순종은 내가 그 말씀을 스스로 동의하고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복종은 내게 그것을 따를 마음이 없어도 억지로 따르는 것이 복종인데, 그러나 복종을 해도 복을 받고 순종을 해도 복을 것이니까, 어차피 복을 받을 길을 가려면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님,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시간, 내게 주신 물질 가지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주의 일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게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사 쌓을 곳이 없이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3.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님

 셋째로, 우리의 삶은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 삶 속에 영원히 찬양 받으실 주님이라는 것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장 8절로 10절을 보니까 이와 같이 성경은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예수를 맞이했습니다. 겉옷을 펴서 그 앞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흔들었습니다. 저들이 최고의 예의를 갖춰서 예수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환영한 목적은 그때 마음 가운데 ‘이 메시야가 우리를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 성경에 메시야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고난 받는 종의 메시야의 모습이 있고, 위대한 승리자의 메시야의 모습이 있는데, 저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의 메시야를 상상해서, 예수님이 저들을 로마에서 구원해주실 것으로 알고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마음 가운데 소원했던 것을 예수님이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는 순간 완전히 돌변했습니다. 며칠이 안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성난 군중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내 개인의 유익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고,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만이 높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만이 존귀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곳에 와있는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이렇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북녘에 있는 이천오백만 우리 동포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마음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발각이 되면 붙잡혀서 감옥에 갑니다. 평생 노동을 해야 되는 수용소로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북한에 있는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이렇게 은혜 받고 이렇게 축복된 땅에 살게 되었으니, 세계 10대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에서 살게 되었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받은 바 은혜를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에게 나누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는 것은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영원히 존귀함 받고 찬양받으실 주님이십니다’라는 점입니다. 내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내가 나의 뜻대로 되면 그것이 좋아서 신앙생활 하고, 그것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고 하는 그러한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되면 안 됩니다.
 저희 작은아버님이 부산 광안리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셨는데요. 지금은 천국 가셨습니다만, 부산 광안리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목사님으로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시면서 그쪽의 노회장, 우리 교단으로 말하면 지방회장을 지내시면서 사역을 하셨는데,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또 여러 가지 교회 일을 말씀해주셨는데, 꼭 그 교회에서 장로님 투표하는 공동의회가 지날 때면 저한테 연락을 합니다. “이 목사,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공동의회 끝내서 추천된 장로님들이 다 뽑혔어.” 그런데 이 장로교회에서는 장로님을 뽑을 때 교인들이 투표를 하는데 잘 떨어집니다. 그런데 떨어지는 것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면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장로님이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그리고 딴 데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의회를 치른 다음에 교회에 후유증이 남게 되고,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 작은 아버님이 공동의회만 다가오면 기도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교회에는 장로추천위원회에서 6개월 동안 심사를 해서 공동의회에 나오니까 한 사람도 안 떨어뜨리고 다 붙여드리는데, 그 교회 가면 어떤 사람은 1년, 2년, 3년, 4년 계속 떨어지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진정으로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시고 주님이 나의 삶의 모든 것이 되신다면 열 번 떨어져도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네 번, 다섯 번 떨어졌다가 장로가 되면 더 충성해야 됩니다. 더 겸손해야 됩니다. “그래도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보다 그 자리가 높은 데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높은 곳에 계시면 “내가 사람들이 나를 인정 안 해줘도 좋고, 인정해줘도 좋고, 모든 영광 하나님께!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사나 죽으나 나의 삶은 주님의 것이로다!”라고 영광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순종하고 복종하면 주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로 11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당한 예수님을 높여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낮아지시고 겸손하여 십자가를 지시니까, 하나님이 높여주셔서 온 천하 만물이 주님 앞에 다 무릎을 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은 여생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바쳐 헌신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청각장애인이면서도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김동현 선수에 대한 간증을 끝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봅슬레이라고 하는 경기 종목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썰매 타는 것입니다. 썰매 타는 시합인데, 우리나라에는 이 봅슬레이 경기장도 없고, 장비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나무로 이것을 바퀴를 달아 만들어가지고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은메달 리스트 중에 장애를 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김동현 선수는 모태 신앙인인데,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청각장애인입니다. 어릴 때부터 보청기를 끼었는데, 어머니가 입술을 보고 상대편의 말을 알아듣는 법을 가르쳐줘가지고, 얘기를 하면 가만히 입술을 보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고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너는 장애인 학교 가지 마라. 일반 학교에 가서 똑같이 생활해라. 장애인 학교 가면 오히려 네가 마음껏 활동할 수 없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학교에 가게되었고 또 체육에 특기가 있어가지고 연세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대학에 가서 독실한 크리스천인 교수를 만나고 신앙이 점점 더 자랐습니다. 감사하게도 2008년에는 인공와우관 수술을 받아서 청각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봅슬레이 대표 선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신청을 했는데, 원래 장애가 있는 사람이 뽑히기가 힘듭니다. 30대 1의 경쟁을 뚫고 거기에 뽑혔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그래서 30대 1의 경쟁을 뚫고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고, 벤쿠버올림픽, 소치올림픽에 참가했으나 성적이 좋지않았습니다. 그는 굉장히 낙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연습중  썰매가 엎어져서 부상을 당하고 입원하게 되었는데, 입원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늘 경기 때마다 기도했지만, 생각해보니 제 마음속에는 내가 더 잘해서 인정받아야지라는 숨겨진 욕심이 더 컸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하루하루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메달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만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그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은 미국에서 열린 아메리카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게 하셨고, 이번에 은메달을 따게 하셨는데, 주님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 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네 명이 팀이 돼서 출발했는데 계속해서 지고 있다가 마지막 네 번째 레이스에서 백분의 일초 차이로 역전해서 은메달을 땁니다. 할렐루야! 사실 계속 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백분의 일초 차이로 뒤집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저는 청각장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믿어요.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 단련하게 해주시고, 우연처럼 대표로 뽑아주셔서 청각장애를 가지고도 올림픽에 나가게 하신 이 모든 것이 마치 퍼즐을 맞춘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번 올림픽에서 극적인 순간에 저를 세워주셔서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의 경기를 통해서 세상의 많은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제 소명입니다. 앞으로도 복음의 경기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드러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인생은 금방 지나갑니다.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우린 하나님 자녀로 택함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남은 여생을 겸손의 종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으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종으로 살다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잠깐 지나가는 세상길에서 나의 욕심을 위해 살지 않게 하여주시고, 하나님 영광 위하여 살게 하여주옵소서. 나를 어떤 모습으로 부르셨던지 그 모습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며 노력해서 거기서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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