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은총 /역대상 29:10-17 요한복음 11:39-44 

???내가 만민 중에 오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리 열방중에서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내가 만민 중에 오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리 열방중에서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10대 학창시절에 똑똑한 친구를 당할 수 없더라. 20대 똑똑한 사람은 예쁜 사람을 당할 수 없더라. 30대-40대 예쁜 사람은 시집 잘 간 사람을 당할 수 없더라. 50대 시집 잘 간 사람도 자식 잘 둔 사람을 당할 수 없더라.
60대-70대 자식 잘 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당할 수 없더라. 80대 건강한 사람도 세월을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당할 수 없더라 감사

겨울에 눈이 오면 어떤 곳은 하루 만에 금방 녹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겨울 내도록 안 녹고 쌓여서 봄이 되어야 녹는 곳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햇볕입니다.
똑 같은 설교  은혜받고  못 받는다. 이유는  마음의  상태다.
눈이  왔다. 눈이  녹은 쪽은 남쪽 눈이  남은 곳은 북쪽이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성공하는 사람들과 실패하는 사람, 갈수록 잘되는 사람과 갈수록 안 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가 뭘까요? 알고 보면 한 가지 해석의 차이라고 합니다.

① 두 사람의 선교사 지망생이 아프리카로 출발하기 위하여 항구로 갔다가 큰 낭패를 당합니다.

자신들이 타고 갈 배가 돌풍에 흔들리다가 화재가 나서 타버려 출발이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두 사람은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교사 가는 걸 원치 않는가 보다하고 그길로 직장을 구하여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였습니다.
또 한사람은 달랐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준비하라는 모양이라고 생각 한 것입니다.

② 똑 같은 사건을 만났습니다. 해석의 차이로 갈라집니다.
열두명의 정탐꾼 똑 같은 장소를 봤습니다.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해석의 차이입니다.

③ 왜 하나님은 12 아들 중에 요셉을 크게 들어 썼을까요?
해석을 잘합니다.
[창세기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1. 다윗의 감사 이유  
역대상 29: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 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은 유다 땅 베들레헴 산골 동네 양치는 목동에 불과한 흙 수저 출신에 불과했습니다.
블레셋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왕의 사위가 됩니다. 이 때에 승리 이유도 해석의 차이입니다. 보는 시각이 다른 것입니다. 모든 군사들은 두려워서 아무도 항거를 못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내 죽고 나서 승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다윗의 해석을 달랐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더럽히는 자를 내가 가만 둘 수 없다. 너는 칼과 단창을 의지하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 하노라

사울왕이 다윗의 도전을 두려워하여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난 다윗을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습니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 때 그의 해석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이지 않습니다.

왕으로 등극하여 40년을 통치합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감람산을 맨발로 울면서 도망갈 때 시므이가 욕을 합니다. 죽여버립시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잘못한 것을 알고 저사람을 시켜서 나를 욕하게 하는 것이라면 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재기할 때 아둘람굴에 40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예부대도 아니고 군사 훈련도 제대로 안된 사람들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무엘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들을 어떻게 훈련해서 최고의 정예부대로 만듭니다. 그들과 함께 통일천하를 이루고 최고의 번성국가를 만들어 나갑니다.
다윗이 바쳤던 헌물이 소개 됩니다.
역대상 29: 3-5 5톤 추럭하나다

역대상 마지막 29장은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1. 나같은 죄인을 들어 쓰신 주님께 감사한다.
2. 사람들은 다 나를 버리고 떠나지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
3. 내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나에게 가장 알맞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심을 감사

실지 다윗은 감사의 조건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양원 목사님은 1948년 10월21일에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이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고 함으로써 공산 반란군에 의하여 무참히 총살 당 하여 순교하자, 동년 10월27일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어버이로서 감사한 마음의 답사를 다음과 같이 하셨다.
(그 후 두 아들의 살해범인 ‘안재선’을 양 아들로 삼았으나 후일 손목사님은 6.25 당시 여수를 점령 했던 공산군에 의하여 끌려 가서 순교 당 하셨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쩌면 이렇게 귀한 보배 사역을 나에게 맡겨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셋째. 3남 3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次子)를 바치게 하신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
넷째. 두 아들이나 순교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
다섯째. 누워서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복인데 끝까지 전도하다가 총살로 순교 당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여섯째. 미국을 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두 아들을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보내주셔서 내 마음을 안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맺어 질 듯이 믿어지니 하나님께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理想)의 진리(眞理)와 사랑과 신애(信愛)를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열 번째 나같은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을 감사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중학교 기독학생회 간부로 활동 중 끌려나가 총살 직전 나무에 묶인 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순교 했습니다> 

2. 감사의 방법
역대상 16:7.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9.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10.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1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12. -13 그의 종 이스라엘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법도를 기억할지어다

네 가지입니다.
① 알 릴지어다
② 전 할지어다
③ 자랑하라
④ 즐거워하라

앞에 있는 16장은 감사를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드리는 것일까?
마음 옛날 애인 잘 사는거 같으면 배가아파고, 못살면 가슴 아프고 같이 사는 사람이 힘들면 머리가 아프다
상어는 부래가 없다 그냥 가만히 뜨 있을수가 없다 밤낮 헤엄쳐야 한다. 자는동안에도 지느러미후들어야 뜬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야한다 가장 빠르고 멀리 간다 부래가 없는것 원망하지 마라 힘있게하는거 감사 하라

김동길 선생님 글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8년 동안 흉년이 와서 다 굶어 죽을 것이다.”하니 노비 하나가 “나는 관계없습니다. 8년 흉년이 아니라 10년 흉년이 와도 끄떡없습니다.”라며 돌아다니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데 그 사람만 문제없다고 자신하고 다니더랍니다. 그래서 왕이 불러다가 “앞으로 8년 동안 흉년이 온다는데 무엇을 믿고 그렇게 자신하고 다니는가?”하문하니 “폐하, 걱정할 일 하나 없습니다. 저는 흉년 첫 해 굶어 죽을 것이니 8년이든 10년이 계속되든 무슨 상관있습니까? 100년 흉년이 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라는 대꾸에 “너같이 배장 있는 자가 내 밑에 있어야 되는 건데.”라며 끄덕였답니다.

슈바이처 가 아프리카 선교사 간 이유
박관태 선교사 몽골 아가페기독병원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낼 때에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성숙한 것이었다.
슈바이처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21세 때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부터는 인류에의 직접 봉사 활동으로 들어가자'는 결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학과정에 진학했다.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통역은 백인 선교사들과 동역하여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흑인 간호조무사 누쳉이 해주었으며, 병원 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의 기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알자스 지방은 당시 프랑스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다.[10]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그 후 6년간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며 강연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로써 모금을 한 다음 다시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처지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후원한 것이었다.(의료선교 이야기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참조) 그를 돕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곳으로 자원하여 왔다.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하였으며, 1965년 랑바레네에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짐승만도 못한 나를 건져주시고 세워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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