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즐기는 게장백반부터 지금 막 제철을 만난 새조개 샤부샤부까지, 전라남도 여수에서 맛깔스런 바다 밥상의 진수를 맛봤다.
소위 ‘여수십미麗水十味’라는 것이 있다.
여수에 오면 꼭 맛봐야 할 10가지 진미. 거두절미하고 일단 읊어본다.
돌산 갓김치, 게장백반, 서대회, 여수 한정식, 갯장어, 굴구이,장어구이와 탕,
갈치조림, 새조개 샤부샤부, 그리고 전어다.
철에 따라 먹기 힘든 종류가 몇몇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언제든 문을
열어둔 채 여행객을 기다리는 여수 식당가의 핵심 메뉴들이다. 수려한 남해바다를 끼고 365개 섬으로 이루어진 여수는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도 유독 미식에 자부심을 갖는 도시다. 실제로 ‘다도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이 섬들은 천혜의 비경이나 희귀 생태계만을 품어낸 것이 아니다. 금오도의 방풍이며 돌산도의 갓처럼 여수 외 다른 지명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특산물들이 섬마다 쑥쑥 자라나 여행객의 지갑을 열게 한다. 실제로 돌산 갓과 갓김치가 벌어들이는 수입만 해도 연간 1천억여 원에 달한다. 그뿐인가. 섬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청정해역 아래는 온갖 해산물이 그득하다. 가까이 금오도부터 멀게는 거문도까지, 다도해를 오가는 수많은 어선들이 매번 선창 가득 해산물을 싣고 여수항으로 모여든다. 이러니 사람도 음식도 쉬이 끊어질 리 없다. 여름이면 어지간한 횟집마다 ‘갯장어 샤부샤부’란 현수막이 내걸리고, 가을이면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 굽는 냄새가 도시 곳곳에 진동한다. 찬바람이 불면 시작되는 굴 철이나 슬그머니 봄을 뒤따르는 도다리와 새조개 철은 또 어떤가. 이 정도면 날 때부터 축복받은 ‘금수저’감이다. 물론 모든 걸 천혜의 환경 덕으로만 돌릴 순 없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든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든, 오늘날의 여수 미식 지도를 완성한 데는 지역민의 단련된 혀와 호기로운 인심, 차진 손맛의 공을 무시하지 못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사방이 온통 바다니 얼마나 다양한 해산물을 푸짐하게 맛보며 자랐겠나. 여수에 말린 생선이 많은 것도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노하우의 결과다. 무조건 ‘생물의 신선함’이 최고인 줄 아는 내륙 도시민들과 달리, 여수 사람들은 굽든 찌든 조리거나 탕을 끓이든 일단은 생선을 다듬은 뒤 햇볕과 해풍에 살짝 말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당에서 내놓는 찬이나 한정식 메뉴도 마찬가지. 그래야 생선살이 꼬들꼬들해지고 감칠맛과 깊은 맛이 더 살아난단다. 이른 아침 수산시장에 나가보면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것도 반건조 생선들이다. 상인들은 서대, 돔, 우럭 등 다양한 생선의 내장을 빼 깨끗이 씻고 소금에 절인 뒤 하루 정도 말려 판매한다. 보통 바싹 말린 생선은 찜으로, 약간 덜 말린 생선은 구이로 먹는다. 이런 예민하고 까다로운 입맛이 도시의 미식 문화에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오직 ‘먹기 위해’ 봄이 오는 길목, 여수를 찾았다. 늘 해왔던 여행과 달리 이번엔 여행객의 버킷 리스트보다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식당 찾기에 집중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 려져 어느 정도 밑천이 드러났을 거란 예상과 달리 여수엔 토박이만 아는 맛집들이 ‘개 미진(전라남도 방언으로 감칠맛이 난다는 뜻) 맛’과 ‘넉넉한 인심’으로 여전히 시민들의 한 끼 식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갓김치와 돌게장은 아무리 작은 식당에서도 밑반찬으로 올랐고, 아침나절의 어시장은 여수에서 가장 핫한 쇼핑 거리였다
DAY 1시작은간장게장부터
1.10:00 |소선우 여수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먹거리 중 유독 여행자들이 편애하는 메뉴가 있다. 여수시청에 따르면 여행객 10명 중 9명은 꼭 먹고 돌아간다는 음식. 바로 게장백반이다. 오전 10시,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봉산동 게장골목으로 향했다. 그리 넓지 않은 골목길 사방으로 20여 개의 게장백반 전문점 간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소선우는 대부분 돌게장 메뉴를 선보이는 게장골목의 맛집 가운데서 드물게 꽃게장으로 명성 높은 곳인데, 금오도의 특산물인 방풍을 넣어 간장게장을 담그는 것이 특징이다. ‘소선우 방풍꽃게장 정식’을 주문하자 광어회와 갈치조림을 비롯해 10여 가지 찬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물론 이 상의 주인공은 살과 알이 튼실하게 들어찬 꽃게장. 방풍 자체의 맛과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간장에 방풍으로 만든 효소와 각종 약초, 생강 줄기 등을 넣고 세 번 끓여내 뒷맛이 맑고 개운하다. 무엇보다 너무 달거나 짜지 않다. “간장 국물이 달면 게의 진맛이 느껴지지 않거든.” 주방장의 말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옹골찬 꽃게살을 느긋하게 맛본 뒤 간장 국물이 자작하게 고인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으면, 소선우 특유의 깔끔한 꽃게장 맛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2.2:00 |여수 갓구운 여수가 갓김치로 유명한 건 다른 지역에 비해 맛과 향이 독특한 돌산 갓 덕분이다. 겨울에도 기온이 거의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돌산도에서 남해의 해풍으로 키워낸 돌산 갓은 특유의 향과 아삭거리는 식감이 특징. 여수에는 일찌감치 별미로 자리매김한 갓김치 외에도 갓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특산물이 있다. 봉산동 게장골목을 나오는 길, 인근에 위치한 여수 갓구운 베이커리에 들어섰다. 다양한 종류의 쿠키와 파이, 빵이 진열대를 채운 가운데, 빵 굽는 냄새가 가장 먼저 감각을 자극했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여수의 오동도를 형상화한 ‘오동빵’과 ‘갓파이’. 두 제품 모두 특산물인 돌산 갓이 들어가는데, 갓의 성분이 빵 반죽의 발효를 억제하기 때문에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오랜 연구를 거쳐야 했단다. 특히 갓파이의 경우 갓 함량이 15퍼센트나 되지만,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특유의 맛과 향은 최대한 억제시킨 것이 포인트다. 옆집에서 아무리 게장을 든든히 먹고 와도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맛이, 먹방 여행의 간식거리로 딱 알맞다. 오동빵에는 갓뿐 아니라 팥과 시나몬, 견과류가 풍부하게 들어가 영양의 밸런스를 잡았다.
3.14:00 |검정고무신 먹기 위해 여수까지 왔다면 선어회를 빼놓을 수 없다. 여수에서는 보통 삼치나 병어, 민어 등을 활어회로 먹지 않고 피를 뺀 뒤 충분히 숙성시켜 선어회로 즐긴다. 그래야 식감과 맛이 한층 깊어진다는데, 그중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겨울 별미인 삼치다.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삼치 선어회를 맛보기 위해 전남대학교 앞에 위치한 검정고무신을 찾았다. 오픈한 지 2년밖에 안 되어 전통의 맛집 리스트에는 끼지 못하지만, 인근 주민들의 강력한 호응을 얻으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이미 여수 미식가들 사이에서 선어회로 정평이 난 곳이다. 삼치회를 주문하자 살을 두툼하게 썰어 빈틈없이 채운 회 한 접시에 굴, 문어, 새우 등 정갈한 해산물이 찬으로 딸려왔다. 이곳에서는 얼음에 넣어 하루 동안 숙성시킨 거문도산 삼치를 특제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데, 생선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연한 일본 간장을 베이스로 사용하는 것이 비법이란다. 주인장이 알려준 대로 회에 간장소스를 넉넉히 묻혀 김에 올린 뒤 부추와 배추김치, 마늘, 고추를 함께 싸 먹으면 부드러운 삼치의 식감과 감칠맛이 입안 가득 긴 여운을 남긴다. 들깨를 잔뜩 넣은 쌈장도 삼치와 궁합이 잘 맞는다.
4.19:00 |청해식당 여수를 비롯해 남해안 중서부 지방의 명물로 꼽히는 서대라는 생선이 있다. 생김새는 볼품없이 납작해도 “서대가 엎드려 있는 개펄도 맛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민들에겐 오랜 별미로 꼽힌다. 여수에서 꼭 먹어봐야 할 서대 요리는 서대회무침이다. 중앙선어시장 근처에 위치한 청해식당은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맛집인데, 이름난 서대횟집은 많아도 맛이든 인심이든 “이만한 곳이 없다”는 게 시장 사람들의 조언. 약 20년간 식당을 운영해온 주인 할머니의 손맛은 과연 단단했다. 일단 서대의 양이 다른 곳에 비해 확실히 많고, 직접 담근 막걸리 식초와 매실청, 초고추장으로 버무린 새콤달콤한 맛이 입맛을 쉴 틈 없이 돋운다. 서대회무침은 그냥 먹어도 별미지만, 참기름을 살짝 두른 밥 위에 넉넉히 올리고 상추와 김가루를 뿌린 뒤 비벼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철마다 구성을 달리하는 밑반찬과 시래기를 듬뿍 넣은 구수한 통장어탕도 서대회무침과 잘 어울린다.
5.21:00 |교동시장 포장마차촌 여수의 밤을 대표하는 2가지가 있다. 한때 버스커 버스커가 노래해 당시 여행객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는(실제 시청의 조사 결과다) 여수 밤바다, 그리고 교동시장 인근에 위치한 야간 포장마차촌이다. 방금 먹고 일어난 저녁 밥상이 아무리 푸짐했어도 진정한 미식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여수의 명물. 연등천을 따라 포장마차들이 일렬로 늘어선 이곳은 해 질 무렵부터 슬그머니 불을 밝히기 시작해 밤이 깊어질수록 더 살뜰히 객들을 끌어모은다. 연등천 근처를 서성이다 운명처럼 17번 포장마차에 들어섰다. 바로 프라이팬에 올릴 수 있도록 다듬어둔 각종 해산물부터 선어회, 볶음탕용 닭까지 온갖 재료들이 먹음직스레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손바닥만 한 금풍생이(군평서니)구이와 해물삼합. 특히 낙지, 키조개, 새우 등 각종 해산물과 삼겹살, 묵은지를 함께 볶아낸 해물삼합은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주문한다는 포장마차촌의 별미란다. 해물삼합에 생선구이 한 접시, 생막걸리까지 곁들이자 여수의 밤은 더 묵직하고 진해졌다. 짧고도 긴,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DAY 2 여수의제철 미각
1.08:00 |여수수산시장 오전 7시 30분, 아침을 맞은 여수가 다시 말간 하늘을 드러냈다. 끝내 여행지에서의 늦잠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세운 건, 오직 이 시간에만 펼쳐지는 여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각종 제철 활어와 말린 생선을 파는 여수수산시장은 아침에 찾아야 그 온전한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1982년 여객선터미널이 문을 열기 전까지 터미널 자리에 구 여수항이 있었는데, 1968년 항구 주변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장이 5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시민들을 먹여 살린 이곳은 오늘날 많은 외지인들이 여행의 막바지에 들러 선물거리를 챙기는 주요 관광지이기도 하다. 연등천을 따라 난 시장에 들어서면 진열대 가득 말린 생선을 늘어놓은 상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시장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오징어나 낙지, 새우, 조개 같은 생물들이 대야마다 묵직하다. 분주한 시장통에서 상인들은 바지런히 해산물을 다듬거나 잠시 짬을 내 아침밥을 주문한다. 큼직한 밥그릇이 하얀 비닐봉지에 싸인 채 시장 구석구석을 오가는 사이, 생선 값을 흥정하는 손님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진다. 여수가 왜 미식으로 유명할 수밖에 없는지 직접 확인시켜주는 곳. 적어도 1~2시간 아침잠과 맞바꾸기엔 너무 아쉬운 여행지다.
LOCATION전라남도 여수시 여객선터미널길 24 TEL061-662-7268
2.10:00 |명품나루터 아침부터 수산시장을 돌며 찬바람을 맞으면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진다. ‘뜨끈한 국물에 갓 지은 밥 한 그릇 넣어, 후루룩 말아 먹으면 좋겠다!’ 이럴 때 여수 토박이들의 선택은 대게 장어탕이다. 실제 토박이의 추천을 받아 돌산도로 향했다. 돌산공원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명품나루터는 각종 활어회와 통장어탕, 2종류의 장어구이를 선보이는 여수의 산장어 맛집이다. 매콤달콤한 양념구이도 좋고 담백함을 살린 소금구이도 좋지만, 이곳의 대표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통장어탕. 워낙 신선하고 튼실한 장어만을 엄선하기 때문에 장어탕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장어의 뼈와 대가리를 넣고 하루 종일 끓여낸 육수에 다시 통장어 토막을 넣어 푹 고아내는데, 들깻가루와 된장, 우거지가 듬뿍 담긴 국물이 그야말로 진국이다. 주인장의 조언대로 장어살을 숟가락으로 으깨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 깊고 시원한 국물 맛이 부드러운 장어살에 배어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특히 교동시장 포장마차촌에서 지난 밤을 하얗게 불태운 이들에겐 다음 날 아침 이보다 좋은 선택이 없다.
3.14:00 |라원정 적어도 이틀 이상 여수에 머문다면 한 끼 정도는 한정식을 추천한다. 워낙 강력한 단품 메뉴들이 많아 놓치고 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사실 여수의 정체성을 그대로 상 위에 올린 것이 바로 한정식이다. 전통적인 여수 한정식은 흔히 생각하는 육해공의 만찬과 달리, 남해안의 신선한 해산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특징. 올해로 12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정식 전문점 라원정을 찾았다. 활어회를 메인으로 하는 3종류의 한정식과 한우숯불고기정식에 주력하던 이곳이 최근 들어 여행객을 위한 새로운 한 상 차림 메뉴를 개발했다. 서대회와 서대조림, 돌게장, 갓김치 등 ‘여수산 알짜배기’만을 모아낸 ‘단체용 한정식’은 일반적인 한정식의 느긋한 식사 시간을 단축하고 좀 더 집밥 같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메뉴다. 대부분의 채소를 직접 재배해 쓰고 화학조미료 대신 새우젓으로 간을 해, 모든 찬의 맛이 깔끔하면서 수더분하다. 그중에서도 가정식의 느낌이 특히 강한 건 가자미 식초로 깊은 맛을 더한 서대회와 짭조름하게 곰삭은 간장돌게장. 갓김치 역시 직접 키운 갓을 사용해 향의 여운이 더 묵직하다. 만약 격식을 갖춘 기존의 한정식 메뉴를 즐기고 싶다면 미리 예약할 것을 추천한다.
4.18:00 |엑스포횟집 딱 지금이 제철인 해산물, 지금 놓치면 1년 뒤를 기약해야 하는 해산물로 여수 먹방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했다. 바로 새조개다. 여수에서는 새조개나 갯장어, 전어처럼 나오고 들어가는 시기가 분명한 해산물의 경우, 횟집에서 제철 메뉴로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박이들에게 ‘맛있고 푸짐한 새조개 샤부샤부’를 수소문한 끝에 여수 신항 근처의 엑스포횟집을 찾았다. 온갖 활어회며 해산물 종류가 메뉴판을 빼곡히 채우지만, 사실 주인장의 추천 음식은 철마다 바뀌는 한정 메뉴. 1~4월까지만 나오는 새조개를 비롯해 하모(갯장어) 샤부샤부, 전어, 삼치회 등을 내놓는데, 하나같이 저렴하고 푸짐하기로 유명하다. 새조개 샤부샤부는 팔팔 끓인 해물 육수에 새조개를 아주 살짝만 담갔다가 먹어야 야들야들한 식감이 살아난다. 전복과 새우, 석화 등 곁들이는 해산물은 물론 여수의 넉넉한 인심도 함께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