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세미원

            
ㆍ겨울 정원의 텅 빈 충만을 만나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란 소설을 보면 '눈에서 읽은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음악을 글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라는 문장이 있다. 두물머리와 세미원의 설경을 마주하며 그 말에 맞장구쳤다. 물과 꽃의 정원을 뒤덮은 순백의 폭설은 음 소거 버튼을 누른 듯 풍경에 소리를 지웠다. 가없는 소멸의 풍경을 바라보며 얼음 같은 침묵의 노래를 들었다.

이른 아침, 폭설이 내린 두물머리를 찾은 객은 청둥오리 떼뿐. 물안개를 두르고 아스라이 바라다 보이는 뱀섬은 두물머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촬영 포인트다.눈은 풍경에 소리를 지운다


양평으로 향하는 내내 눈이 내렸다. 출발할 때만 해도 쌀가루 같은 게 흩날리는 수준이었지만,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은 두물머리에 도착할 즈음 절정을 맞았다. 무려 동백꽃만 한 크기의 탐스러운 눈송이를 보니 동백 숲으로 유명한 절집에서 들었던 꽃 지는 소리가 떠올랐다. 꽃잎을 흩뿌리지 않고 꽃송이째 툭- 떨어지는 동백은 드물게 낙화의 소리를 가진 꽃이다. 하여 꽃구경 중 유일하게 끝물을 보고 싶은 꽃이기도 한데, 툭- 툭- 동백이 지는 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걷노라면 말을 삼가는 것은 물론이요, 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흰 동백의 낙화를 연상시키는 눈송이라 혹여 '눈 소리'를 내지 않을까 귀 기울였으나 눈은 풍경에 소리를 지웠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양평은 '물의 고장'이라 부를 만큼 아름다운 수변 경관을 자랑한다.눈 내리는 이른 아침 두물머리엔 청둥오리 떼가 전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엔 새들의 발자국만 이국의 언어 같은 문양으로 남아 있다. 강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강가의 느티나무는 강건하다. 400년 수령의 위엄 앞에 절로 소원을 빌게 되니 괜히 '소원나무'가 아니다. 느티나무가 서 있는 둔치에서 강을 바라보면 아스라이 뱀섬이 보인다.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섬이지만, 물안개를 베일처럼 겹겹이 두르고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니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칠 줄 모르는 눈발은 눈밭에 새겨진 새들의 언어를 지우고 내가 남긴 발자국까지 덮어버렸다.

강가의 침묵을 깬 건 청둥오리였다. 눈 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강물 위에 그림처럼 떠 있던 오리 떼가 한순간 일제히 날아올랐다. '새들은 어떻게 점호도 없이 날아오르는가'로 시작되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알고 있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희덕, '동작의 발견' 중에서)

세미원엔 재미있는 모양의 분수가 많다. 한국적인 미를 자랑하는 장독대 분수도 그중 하나.마지막으로 두물머리를 찾았던 기억을 더듬어봤으나 또렷하지 않았다. 상반된 계절과 시간, 조합이 어려운 동행인들이 뒤섞이는 바람에 그냥 "또 왔네" 그러고 말았다. 두물머리는 그런 곳이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고 애인과 단둘이 가고, 봄에 찾고 가을에 또 들르는 곳. 새벽 물안개와 황혼녘 노을을 배경 삼아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뱀섬을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을 것이다.

특정 지역이나 장소의 이름은 별다른 수식 없이 그 자체로 이야기를 품기도 한다. 마치 춘천처럼. '춘천'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나 청춘의 한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숱한 인연이 흘러들고 헤아릴 수 없는 추억이 고인 두물머리 역시 그러하다. 두물머리는 '양수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이곳에서 만난다.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란 의미 매김에 서울 근교에서 즐길 수 있는 수려한 경관이라니, 연인들의 성지가 되기엔 충분한 조건 아닌가.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재현한 사랑의 연못. 연 방죽은 폭설에 묻히고 구름다리만 남아 있다.가없는 소멸의 풍경을 바라보며


예부터 물 맑고 산세 좋은 고장엔 그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 나는 법. 두물머리 인근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터와 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두물머리 끝자락에 정자를 지어놓고 물색과 풍광을 즐기며 '북한강 남한강의 물이 겹쳐 흐르는 곳 / 마을 이름이 두물머리라네 / 마을 입구의 점방 주인 늙은이가 / 버티고 앉아 가는 배를 보내네'와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팔당호와 두물머리 일대를 조망하고 싶다면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올라가볼 것을 권한다. '구름이 가다 산에 걸려 멈춘다'라는 운길산(雲吉山)은 두물머리 북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보유한 수종사는 탁월한 조망권만으로도 충분히 운치 있는 절이다. 팔당호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라지는 거대한 물줄기와 멀리 하남시 검단산과 광주시 정암산의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다산의 숨결은 이곳에도 깃들어 있다. 어릴 적 수종사를 앞마당 삼아 뛰놀았다는 다산은 '운길산의 수종사 / 옛날엔 우리 집 정원 / 마음만 내키면 훌쩍 가서 절문에 이르렀네'라고 읊기도 했다.

폭설에 덮여 연못과 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세미원. 'ㅅ'자로 허리를 꺾은 연 줄기가 남아 이곳이 연 방죽이었음을 알려준다.
두물머리 맞은편에 자리 잡은 세미원은 배다리를 통해 이어진다. 배다리란 말 그대로 배를 띄워 그 위에 놓은 다리로, 두물머리와 세미원 사이의 북한강 지류를 연결한다. 245m 구간에 52척의 목선을 띄워 만든 배다리 양쪽엔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나부낀다. 왕의 행차를 재현한 까닭이다. 배다리는 정조대왕과 정약용으로부터 기원한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건릉을 찾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배 수십 척을 연결한 다리로 건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배다리를 고안한 이가 바로 다산이다.

팔당호로 삼면이 둘러싸인 세미원은 수생식물을 이용한 자연 정화 공원이다. 6개의 연못에 연꽃과 수련, 창포 등의 수생식물 군락을 조성함으로써 이 연못을 거친 한강물은 중금속과 부유물질이 거의 제거된 뒤 팔당댐으로 흘러들게 된다. 세미원(洗美苑)이란 이름은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이란 장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과 꽃의 정원'이란 타이틀이 붙은 세미원은 연꽃으로 특화된 정원인 만큼 여름이 제철이다. 연꽃이 필 때 찾았던 세미원은 아기자기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재현한 사랑의 연못은 그림엽서 같았고, 물줄기가 퐁퐁 솟아오르는 장독대 분수와 창덕궁 옥류천을 모델로 한 유상곡수 정원 등 면면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라는 의미를 담아 빨래판으로 조성한 길이 인상적이었건만, 이미 눈 속에 파묻혀 찾을 수 없었다. 얼어붙은 연못 위로도 눈이 쌓여 땅과 못의 경계가 모호했으나, 가슬가슬 말라비틀어진 연잎과 'ㅅ'자로 꺾인 앙상한 줄기들이 스크럼을 짜고 그곳이 연 방죽이었음을 증거했다. 태양을 향해 생장점을 활짝 열어젖힌 채 초록으로 들끓던 계절을, 물 위에 피는 꽃이 풍기던 배릿한 향기를 기억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계절. 허리를 꺾은 연 줄기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ㅅ'을 바라보며 소멸과 순교와 숙명을, 'ㅅ'으로 시작하는 낱말들을 천천히 주워 삼켰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물과 꽃의 정원은 '텅 빈 충만'의 다른 이름이었다.

1·2 양평은 수변 경관도 좋지만 병풍처럼 에워싼 산세도 수려하다. 그야말로 산빛 곱고 강물이 맑다는 산자수명(山紫水明)의 땅이다. 3 황해도식 냉면을 선보이는 양평의 별미 옥천냉면은 쫄깃하면서도 굵은 면발이 특징이다. 두툼한 돼지고기 완자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양평은 하루 나들이 코스로 찾는 관광도시인 만큼 다양한 축제와 레포츠가 즐비하다. 특히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 초순까지 열리는 '물 맑은 양평 빙어 축제'는 겨울 축제의 꽃이라 할 만하다. 빙어축제를 주관하는 수미마을에선 빙어 낚시와 연날리기, 썰매 타기 등 다양한 겨울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꽁꽁 언 저수지에 작은 구멍을 내고 빙어를 낚아 올리는 손맛은 한겨울 추위도 녹일 만큼 짜릿하다는데, 빙어를 잡든 못 잡든 빙어튀김은 맛볼 수 있다 하니 일정이 맞으면 가볼 만도 하다.

산악자전거, 산악오토바이, 수상스키, 패러글라이딩 등 양평에서 즐길 수 있는 레포츠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철에 인기 있는 레포츠는 옛 중앙선 구간인 원덕-용문 간 기찻길을 이용한 레일바이크다. 칼바람 속에 가능할까 싶겠지만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면 땀이 솟는다. 물론 완전무장은 필수. 무릎 담요를 챙겨도 좋겠다. 어둑해질 무렵 기찻길을 따라 색색의 알전구가 불을 밝히면 은근히 설레기도 한다. 터널을 통과할 땐 겨울의 심장을 관통한다는 기분마저 든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게 마련. 등허리에 땀이 솟고 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오다가도 어느 순간 힘을 쓰지도 않았건만 저절로 바퀴가 구른다. 잠깐이지만 얼어붙은 강을 바라보고 먼 설산을 우러르는 여유도 즐길 수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순간에도 바퀴가 구르고 있다면 그것은 내 옆 사람 혹은 앞 사람 덕분이다. 동행인이 지쳐 보일 땐 내가 조금 더 힘을 내면 된다.

때때로 속도를 내기 힘든 순간이 찾아오지만 누군가 페달을 밟고 있다면 바이크는 앞으로 나아간다. 함께 바퀴를 굴린 사람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 연대감을 새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레일바이크는 원점 회귀 코스로 운행된다. 등줄기에 땀이 마를 즈음, 출발지로 돌아와 중얼거린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또다시 찾아온 두물머리 앞에서 꺼내들었던 시 구절이다.

1 꽁꽁 언 저수지에 작은 구멍을 내고 빙어를 낚아 올리는 손맛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사로잡는다. 2 옛 중앙선 구간인 원덕-용문 간 기찻길을 이용한 레일바이크는 강과 산, 양평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내 옆에 끼고 달린다.
Tip 여행 정보

1

세미원의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11월~2월 기준). 관람료는 4천원(어린이 및 청소년, 65세 이상은 2천원)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주차는 양서문화체육공원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문의 www.semiwon.or.kr

2

'물 맑은 양평 빙어 축제'는 2014년 12월 24일부터 2015년 2월 8일까지 백동낚시터 일원에서 열린다. 온라인 예약은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
문의 soomyland.winterfestival.kr

3

양평 레일바이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7회 운행한다(11월~2월 기준). 양평 용문-원덕 간 3.2km(왕복 6.4km) 구간을 시속 15~20km로 달릴 수 있다. 요금은 2인승 2만원, 4인용 2만9천원. 문의 www.yprailbike.com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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