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신석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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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창 9:2)


  노아가 첫 경작인 이었다는 성경본문의 말씀은 홍수 후 급격히 변화된 환경 가운데 노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환경의 변화와 경작의 시작 및 식생활의 변화는 소위 신석기 혁명으로 표현되는 인류 문화상과 유사하다. 이러므로 홍수 이후 노아의 생활이 신석기 시대 초기인들의 삶과 부합되는 점을 고찰하는 것은 노아 홍수 연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는 정착생활과 식량, 생산경제, 마제석기, 그리고 토기의 사용으로 특징 지워 지지만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을 신석기 문화가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1만 년 전에 자취를 감춘 후빙기 이후 지역에 따라 보통 1,000년에서 수천 년 동안의 후구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인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 농경의 시작으로서 농경으로 인한 잉여 생산의 축적은 궁극적으로 계급사회와 국가의 발생을 가져오게 하였다. 현재까지 농경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동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중동지역은 후빙기의 환경변화로 건조 지대가 되었지만 곳곳에서 발달한 오아시스에서는 동식물의 서식이 가능했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점차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게 되었다. 이것을 차일드의 '오아시스 가설'이라고 하는데 이 설은 석기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원자재의 변화양상에 의거하는 인류문화사 발전단계설의 난점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발전단계를 고찰함으로서 극복하려고한  시도였다. 이 이론은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도전을 받기도 하였지만, 많은 학자들은 농경의 시작이 기후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점에 상당한 공감을 표했다.    

 

환경 및 기후의 변화와 농경의 시작과 관계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은 노아홍수 이후의 기후 변화와 노아의 농경시작과의 관계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증거는 인간의 수명이 홍수 후 현저히 단축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홍수 전에는 900세 전후의 수명이 홍수 후에는 급격히 단축됨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오늘날 창조 과학회에서는 홍수 이후의 환경변화가 인간의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식생활의 변화는 홍수 후 환경변화에 다른 적응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육식의 문제는 동물의 사육화에 따른 육식의 편이성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창 9:3에서 채소와 함께 고기가 식물로 주어짐으로써 농경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하는 가축의 사육으로 인한 육식의 보편화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농경의 시작은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연관 되는데, 노아의 경작과 육식의 사실은 그러한 신석기 문화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전술한 바와 같이 홍수 후 인간 수명 단축으로 추정되는 환경의 변화 또한 신석기 혁명이 야기된 기반과 유사하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초기 농경의 연대를 통하여 노아 홍수의 연대를 추정 고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농경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역으로 레반트(Levant)와 자그로스(Zagros), 아나톨리아(Anatolia), 이 세 지역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중석기 시대에서 초기 신석기 시대에 걸친 유적들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결과를 살펴보겠다.


  레반트 지역에서 초기 농경의 흔적을 보이는 문화를 나투피안 문화(the Natufian Culture)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문화적 성격을 가진 유적은 동서로는 지중해 해변에서 내륙으로 80km까지, 그리고 남북으로는 베이루트에서 카이로까지 나타난다. 그 연대는 주전 1만년에서 8천년에 속한다. 이 후에 재배된 동식물의 조상종이 발견 되는 대가 9천-8천 년기인데, 아직까지는 확실한 재배의 증거가 없으므로 본격적인 농경과 사육 시기는 더욱 늦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그로스 지역의 중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 유적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자위 케미(Zawi Chemi)의 유적이다. 근처의 샤니다르(Shanidar)동굴 유적과 함께 농경의 시작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자위케미는 주전 8,900±300년, 샤니다르는 주전 8,650±300년으로 측정되었다.


  한편 아나톨리아 지역의 시원적 농경유적인 촤이외니 티페시는 주전 8천년기 중반까지 올라가고 그보다 좀 늦은 촤탈휘익 유전은 주전 6천 년기에서 5천 년기의 연대를 갖고 있다.


  요약컨대 신석기 혁명과 연관을 시킨 노아의 경작 시작 및 홍수 연대는 어셔나 딜레의 홍수연대보다 수천년 이상 상회하는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근동의 최고 석기를 10만년 이상으로 올려본 이후, 근동에서 발견된 인류의 흔적은 갈릴리 호수 남쪽에 위치한 우베디야(Ubeidiya)에서의 50만년 전으로 비약적인 상승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과학적 연대와 성경을 어느 정도까지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연대 측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다. 종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안정된 위치를 찾아 가고 있다. 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연대 측정법이 있는데, 어느 한 연대 측정법에 약점이 있을지라도 다른 영대 측정법과 상호 보완하면 상당히 신뢰도가 높은 결과를 얻을 수 가 있다.


  노아 홍수 연대의 검토에 있어서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치밀한 신학적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나 숫자만의  단순한 적용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는 이러한 이해의 차원에서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볼 때 노아홍수는 어셔의 연대기가 제시하는 주전 2,348년보다 훨씬 오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성서고고학의 업적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으로 고대 근동 세계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주전 3,000년경에 속한 설형 문자와 상형문자 토판들이 발견됨으로써 언어의 분화가 주전 3,000년을 훨씬 상회함을 알게 되었다.


  노아로부터 시작된 땅의 경작 사실이 신석기 문화의 도래와 연관 된다고 할 때 노아 홍수는 신석기 혁명 이전 시기가 될 것이다. 아직 확정적인 농경개시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주전 9천 년에서 7천 년 사이에 농경이 시작 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는 이를 앞서는 시기가 될 것인데, 그 확정적인 연대는 구약 성서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해석과 발맞추어야 할 것이다.


도시 문명의 발생과 니므롯


   인류 문명은 수천 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성경에서도 대홍수를 기점으로 이전의 문명시대와 이후의 문명시대가 구분되고 있다.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어떻게 도시가 건설되고 고대문명이 시작되었는가하는 점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의 확산과 종족 및 국가의 형성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 10장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는 아브라함의 10대조로 창세기 11장에 나와 있는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이미 중기 청동기 시대로 고대문명이 꽃피고 고대 제국의 흥망성쇠가 거듭된 지 오랜 시절인 것이다. 이러므로 노아 홍수 이후로 언제부터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있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화 과정이 규명되어야 하고, 노아가 최초로 성경에 언급된 제국의 건설자인 니므롯의 정체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도시화에 관한 가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위대한 문명의 발전 과정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고대 문명사회의 존재, 발전, 성장 요인에 관해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지만 대개는 경제와 환경과 인구의 세 요인들의 결합 내지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홍수 이후 인류 사회는 촌락 농경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 공동체는 사육 제배하는 동식물의 생리학적 개선과 토기를 비롯한 용기의 제작으로 가공과 저장, 교역 등의 기술발전, 그리고 인구 증가와 정착생활에 따른 조직의 구성이 양성적 환류 작용을 일으켜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들 공동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하수나 공동체, 사마라 공동체, 할라프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고, 도시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도시문명의 발전가설들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들 발전 이론은 관개를 통한 농경의 집약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은 자연 자원으로서의 물과 대규모의 관개 시설의 건설을 위한 중앙 집중적 협력과 감독의 필요성에 의해 소규모 사회보다는 더 효율적인 중앙 집중화된 사회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수력가설을 발표하였다.


  차일드(Gordon V.Childe)는 도시로 성장하기 이전에 순회 장인이 출현하고 노동이 전문화되며, 주전 4천년 경부터 효율적인 관개 농경이 개발됨으로써 특정지역에 생산물이 집중되어 도시가 이루어 졌다는 장인-전문화-관개 가설을 주장하였다.


  로버트 카네이로(Robert Carneiro)는 전 세계적으로 초기 문명은 산, 바다, 사막 등으로 한정된 농경지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농경지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발발되고 그 결과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 조직화, 기구의 확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인구-압력-갈등 가설을 제시하였다. 인구압(Population-pressure)가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국가 형성 연구에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특히 맥가이어 깁슨(McGuire Gibson)은 티그리스 와 유프라테스 강이 수로를 변형할 때마다 주변 주민들이 심한 입구압을 겪게 됨으로써 조직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밖에도 도시화의 다원론이 아담스와 플레너리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여 문명의 발전에 대한 체계, 생태학적 모델을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에서 자연 수로에 의존하는 농업 공동체는 물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토지 생산성이 달라지고, 그 결과 부의 축적으로 인한 권력의 차별과 이의 세습화가 야기되었다.


  (2)농경의 집약화와 함께 생산의 전문화가 수반되었는데 이는 교역과 생산의 재분배가 사원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종교 공동체에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다.


  (3)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족한 비가공재를 수입함에 따라 무역 전문 종사자와 교역품 생산 장인의 출현 등 도시사회의 특징인 복합성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은 양성적 환류를 일으켜 물품과 부의 편중을 낳았고 이에 따른 내외부적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가 창출되었다. 군대의 성장은 행정 엘리트들의 성장과 함께 행정 집단의 힘을 강화시키게 되었으며, 결국 통제 기능이 강력한 권력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도시제국의 출현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 초기 도시문화의 흔적은 우바이드(Ubaid)기, 우룩(Uruk)기, 젬뎃 나슬(Jemdet nasr)기의 세 시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바이드기(B.C. 5300-3600)는 우르 근처에 있는 텔 알 우바이드 유적을 쫓아 명명 되었는데 모두 4개의 시대로 세분되며 최초 정착생활의 증거로부터 나중에는 2,000명-4,000명 규모의 취락 형성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모습은 단색, 채색 토기의 형태와 문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종교적 건축물에서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다. 사원 유적은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증대하는데 높은 기단과 그 위에 세워진 성소와 측실 및 회랑, 그리고 기단과 성소를 잇는 계단이 수메르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수메르 문화를 대표하는 우륵기(B.C. 3600-3100)는 2기로 세분화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우르에서 북동쪽으로 65km 떨어진 와르카(Warka) 유적이다. 와르카의 옛 이름은 우룩이며, 성서에서는 에렉(창10:10)으로 기록되어 있다. 와르카는 백색의 사원이 높은 기단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의 발굴로 유명한데 이 건물은 하늘의 신 아누 의 지구라트(Anu ziggurat)로 여겨진다. 또한 이 지역의 수호신이자 사랑과 전쟁의 신인 이난나(Inanna)여신을 위한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이들 건축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노동력의 규모와 건축설계기술, 반복된 재건축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이미 대규모 경제력과 노동력 및 전문화된 장인을 통제하는 조직화 된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젬뎃 나슬기는 도시화의 뚜렷한 증거와 아울러 문자의 본격적인 발전이 특징적이다. 이 시기는 통상 주전 3,100-2,900년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다양한 내용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문자를 사용하려는 초기의 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우륵기에 이르러 집단의 규모가 증가하고 더욱 복잡성을 띄게 되면서 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 사원의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종교 집단은 특정한 신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종교 집단의 통합과 더불어 그들의 신들도 가족관계로 서로 얽혀지고, 권력의 위계도 갖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집단들은 제의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 경제 행위에도 직접 관여 하였다. 특히 재화의 재분배 역할을 주도함에 따라 사원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되었고, 사원 관계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니므롯 帝國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도시들이 시민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보호를 해줌으로써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그들은 전통적인 기존의 국경을 넘어 영역을 확장하였고, 급기야 인접 도시국가들을 병합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들이 건설되었다. 고 이집트, 수메르, 사르곤의 아카드제국, 에블라제국 등이 그것이다.


  성경에 보면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과 갈레 등의 도시 국가들을 병합하고,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건축하였다.(창10:10f) 그런데 아직까지 니므롯이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존재이며, 그 이름도 셈어에 속하는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그가 탁월한 사냥꾼이라는 성서 기사로 인해 그의 신원을 사냥과 연관시켜 파악하는 여러 가설들이 나타나게 되지만 설득력이 약하고,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가설은 니므롯이 아카드의 사르곤 1세라는 설이다. 사르곤은 셈족의 영도자로서 우룩과 우르, 그리고 페르샤만에 이르기까지 수메르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엘람,북으로 수바르투, 서로는 시리아를 정복하여 아카드 시대(B.C. 2360-2180)를 창립한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러나 용맹성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름의 유사성이 전혀 없는 것과 셈족의 통치자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폰 라트는 니므롯이 함의 아들 구스에게서 출생한 사실을 중시하고, 니므롯을 애굽왕 아메노피스 3세(Amenophis Ⅲ : B.C. 1411-1375)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엉거(Merrill F. Unger)는 폰 라트와 신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니므롯이 함의 후손으로 바빌론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점에 조금도 의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는 구스가 원래 바빌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구스족의 원고향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하류이며 니므롯은 이곳에서 성장하여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남쪽 인 예멘으로 확산 되었으며, 마침내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 누비아와 아비시니아를 식민지화 하였다. 그러나 구스족은 본래 바빌로니아의 기혼강 주변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창 2:13절의 내용과도 부합되고, 노아의 세 아들 함, 셈, 야벳이 같은 지역에서 살다가 흩어져 나가는 성경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남부 아라비아, 누비아를 연관시키는 고고학적 근거 자료가 부족하므로 더 숙고할 필요가 있으며 주전 3천년기에 출현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왕들과 연결시킬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정리하면,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관개에 의한 농경이 시작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 에 연결되어 니푸르, 라르사, 우룩, 우르 등이 도시국가로 성장하였다. 수메르 문명은 농업용 관개 수로를 그 용도를 넘어서 지역간의 교역을 촉진하는 교통로 역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강물이 운하를 따라 저지대로 흘러들게 되면 늪이나 호수가 형성되어 식량자원이 풍부해지고, 가옥과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갈대가 무성하게 된다. 반면에 주변 숲에는 맹수들이 서식하여 가축들을 위협하고 농경에 방해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사냥꾼의 역할이 중시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니므롯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여명기에 활약한 탁월한 인물이다.


  니므롯은 세상의 지배자들이 출현하는 시기의 첫 번째 영걸이다. 그는 개인적인 용맹과 정치적 권력으로 세상에서 찬탄 받았고 성경에서도 결코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그 다음이다. 그의 왕국이 바벨이란 도시로부터 확장 되었는데 이 도시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온상이 되었고(창 11:1-9참조), 마침내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된 것이다(계 18:2). 이를 통하여 성경은 이 땅에서의 번영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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