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왕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사진설명]

1. 유다 왕들의 유골(?)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표현은 곧 에꼴 비블릭크 무덤의 안치대 밑에 있는 유골보관소를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기존의 유골을 안치대 밑에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는 것이 당시의 독특한 매장 풍습이었다.

2. 베이의 `다윗성의 무덤'

프랑스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가 1913~4년에 다윗성에서 발굴한 이 동굴들은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다윗성 안에 묻혔다는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왕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그 구조가 무덤과 차이가 있고 당시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뚜렷하게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3. 드 소시의 `왕들의 무덤'

드 소시는 1851년 초 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신약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아디아베네왕국 출신 헬레나 여왕의 가족무덤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시온산에 있는 다윗의 무덤을 찾지만 그 곳이 3천년 전의 무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 그 곳은 2~4세기에 건설된 교회 건물로 십자군시대 이후 다윗 왕의 기념묘로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다윗의 무덤을 찾는 작업은 1851년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의 한 큐레이터가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왕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한 바위굴 무덤에서 입구를 막고 있던 둥근 돌을 굴려서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서 다윗 왕의 관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럽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은 다윗을 비롯하여 모두 23명에 달하는 유다 왕들의 무덤 중 하나라도 찾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따라서 다윗의 무덤이라는 소식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 소시(F.de Saulcy)는 1807년 오늘날 벨기에에 위치한 `릴르'의 전통적인 군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도 군인이 되기 위해 포병학교에 진학했고,재학중 고고학에 흥미를 느껴 취미삼아 연구결과들을 발표했다.그러다가 결국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에 큐레이터로 취직하게 됐다.

43세 되던 해에 부인을 잃게 된 드 소시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예루살렘까지 가는 성지순례를 계획했다.경비 마련이 문제였으나 당시 파리 귀족들의 문제아들을 성지순례를 통해 순화시키는 프로그램의 후견인으로 나서면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다. 1851년의 탐사 후 드 소시는 파리에서 정치가로 지내다가 프랑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1863년 `왕들의 무덤'을 공식적으로 발굴하게 됐다.

당시 드 소시는 `여왕'이라 기록된 석관을 발견하고,이를 시드기야의 왕비로 해석했다.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전형적인 신약시대의 가족무덤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이곳이 당시 유대교로 개종했던 아디아베네왕국 출신인 헬레나 여왕과 그녀의 가족 무덤으로 확인됐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성 밖으로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느헤미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윗의 무덤이 성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프랑스의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는 1913년~1914년 다윗의 무덤을 찾기 위해 성의 남쪽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사하던중 바닥을 파서 만든 여러 개의 바위굴들을 발견했다.

베이는 그중에서 길이 15.7m,폭 2.4m에 달하는 가장 큰 동굴을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굴이 도무지 무덤같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BC 10세기의 무덤이 아직 한군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 길은 없지만 여러 고고학자들의 지적대로 그 동굴은 구조상 창고나 물저장소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 곳은 후대에 채석장으로 이용됐는데 과연 누가 왕들의 무덤을 감히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3의 왕들의 무덤이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이 무덤은 오늘날 `에꼴 비블릭크'(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로 더 잘 알려진 성 스데반 수도원 구내에 있으며,1885년에 처음 발견됐지만 신약시대의 무덤 정도로만 알려졌었다.하지만 바르카이와 클로네르가 재발굴한 이 가족무덤은 전형적인 BC 8~7세기의 무덤으로 가운데 다섯평 정도의 전실을 일곱 개의 묘실이 둘러싸고 있고 한꺼번에 20여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시신 안치대 밑에는 모두 네 개의 유골보관소가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유골을 한군데 보관하는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의 바위굴 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족무덤의 특징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시신들이 안장됨에 따라 안치대에 있던 기존의 유골은 그 밑에 파 놓은 유골보관소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다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좋은 예다.

열왕기서에는 다윗 왕부터 아하스 왕까지는 다윗 성안에 묻혔고 그후의 왕들은 성 밖에 장사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오늘날 다윗 성에는 여러 채의 집들이 있어서 다 발굴하기가 어렵다.따라서 다윗 왕의 무덤은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현재는 에꼴 비블릭크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김성(협성대 교수·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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