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빈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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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 지갑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다 떨어진 후에야

놀이터 느티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어 놓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빈 몸으로 서 있었습니다.

묵빛 까치집 하나를 머리에 이고

혼자 겨울을 서 있었습니다.

 

아내의 가슴속에도 까치가

슬픈 집을 지었던 모양입니다.

 

병원의 아내에게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다가

화장대 서랍 속에 있던 아내의 지갑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사용했던 그 지갑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배부른 나의 지갑

그 속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화장대 위에 꺼내놓았습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거래처 사람들의 명함 몇 장

밥값 영수증,지하철 노선표, 카드와 주민등록증

서너 장의 지폐와 함께 현금인출기가 내뱉은 전표 하나

일곱 살 난 딸아이의 사진까지

그 조그만 지갑 속에

참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휴지통에 버리고

어떤 것은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아내도 나처럼

지갑 속의 물건을 꺼내보았겠지요.

하지만 아내는 아무것도 다시 넣어두지 않았습니다.

 

헤어짐이라든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는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런,.

우리가 전혀 바라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불행은

유리컵이 깨지거나

잠을 설치게 하는 새벽녘의 뒤숭숭한 꿈 같은

그런 하찮은 예고도 하나 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결혼 후 십여 해를 넘게 살았던 언덕 꼭대기

낡은 집을 떠나던 날

부서진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잡동사니들을 쓸어모으다가

시집간 딸에게 보낸 친정 어머니의 편지며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의 오래된 흑백사진 몇 장을

집어 들고 흘리던 아내의 눈물처럼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가 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저 혼자서

속으로 속으로 겪어야만 하는 마음 아픔이

못내 견디기 힘든 그런 것일지라도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마치 날이 차가워지면 제빛을 잃는 잎들이 그러하듯

미련 두지 않고 바람에라도 의지해

떨어져 내려주면 좋으련만...... ,

 

그런 아픔을 지우고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떨쳐버리는 일이

새 밑의 어느 날

오랜 수첩 속의 이름들을

다시 새것에 옮겨 적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쓸모 없는 이름이며 전화번호는

빼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아내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숨짓는 아내의

시리도록 아린 가슴속에 쌓인

나로 인한 슬픔이며 아물지 못한 생채기들을

지갑을 정리하듯 수첩의 이름을 옮겨 적듯

그렇게 훌훌 비워주고

말끔히 정리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곱던 아내의 머리카락이

암세포보다도 더 독한 방사선에 쫒겨나

지는 낙엽처럼 모두 빠져버렸을 때는

아직 첫눈이 내리기 전이었습니다.

 

한 해가 가던 저녁

딸아이가 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왜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깨고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에요?

 

아내는 아이를 껴안고 웃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빠는 맨날 울기만 해.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습니다.

 

아내의 병실 창 밖에도

빈 둥지를 이고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봄이 오고 잎이 새로 나면

까치가 다시 돌아올까요?

 

창 밖으로 보이는 까치집을 보며

나는 아내가 비워둔 그 지갑 속에

다시 뭔가를 채워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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