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 장                             

                 

 

창세기 14 장


1. 전쟁 팀을 둘로 나누어 보시오

메소포타미아 연합국(4개국)

사해 동맹국(반란국 연합, 5개국)

1)

2)

    1) 시날왕 아므라벨, 엘라살왕 아리옥, 엘람왕 그돌라오멜, 고임왕 디달
    2) 소돔왕 베라, 고모라왕 비르사, 아드마왕 시납, 스보임왕 세메벨, 소알(벨라)왕

2. 전쟁의 경과를 정리하면서 빈 곳을 채우시오.

진 행

내 용

구 절

발 단

1)

1-4

경 위

2)

5-9

결 과

3)

10-12

수 습

4)

13-14

아브라함에게 끼친 영향

5)

    1) 사해 5개국이 동맹을 맺어 그돌라오멜을 배반함
    2) 엘람왕이 주축이 된 메소포타미아 연합국이 사해 지역까지 원정, 도중에 있는 가나안 열국들을 초토화시킴
    3) 사해 동맹국이 참패함, 원정군들이 포로와 전리품을 취해 귀환, 롯도 포로로 잡혀감
    4) 아브람이 원정군을 뒤쫓아가 모든 약탈물을 되찾고 롯을 구출해 냄,
    5) 이 일로 일개의 이방인이었던 아브람이 강력한 부족 단위의 지도자로 국제적인 위상이 대단히 높아짐: 말하자면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를 한 셈이다.

3. 이 전쟁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려면 최소한 이 나라들의 위치라도 파악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위치를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시날: 수메르지역 (바벨론, 지금의 이라크 북부지역쯤)
    엘람: 바벨론의 동부 고원 지역인데 지금의 이란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셈이다.
    소돔 고모라: 사해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군이 엄청나게 먼 곳까지 원정을 온 고대의 세계대전이었다.

4. 전쟁에 참패한 반란군 연합국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해보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핀 다음에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보장이 있어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비록 졌지만 그래야 한다. 국가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충고일 뿐이다. 세속 역사야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5. 남의 전쟁에 말려 억울하게 당한 민족들(6족속)을 정리해보자.

    르바 족속, 수스 족속, 엠 족속, 호리 족속, 아말렉 족속, 아모리 족속(5-7): 메소포타미아 연합국의 침공 진로는 북에서 남으로 곧장 내려와서 사해연합국을 친 것이 아니라 사해 동편으로 내려와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7절의 ‘돌이켜’) 남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그 도중에 있는 이들 작은 나라들을 모조리 초토화시킨 것이다. 주변 청소를 먼저 한 셈인데 아마 반란군에 가담할 가능성을 미리 없애기 위함이거나 힘있는 자의 오만 때문인지 모른다.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이 이런 것이다.

    개인은 선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국가 간에는 힘이 정의다. 인정이나 양보심이란 없다. 오직 자국의 이익만 존재하는 것이 국가 간의 일이다.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에 너무 많은 경제적인 부를 넘겨주고 있다. 학생들의 학용품, 비디오, 만화, 만화 영화에서부터 첨단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러 해 전이긴 하지만 국산 비디오 카메라를 하나 얻었는데 알고 보니 껍데기만 국산이었고 껍데기와 상표를 제외한 알맹이는 완벽한 일제 sony였다. 정말 위험한 일이다.

6. 아브람은 어느 족속이라고 하는가?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람은 자신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이방인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히브리 사람(13):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이 ‘(강을) 건너온 사람들(=아바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위시해서 ‘에벨’의 후손(10:21)이라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기도 한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당시에 천한 계급을 일컫는 말 ‘하비루(아피루)’와 뒤섞여 사용되면서(창39:14,17: 출2:6: 삼상4:6,9) 분명한 어원을 밝히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브람이 나그네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한다(벧전2:11). 불신자들이 볼 때에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는 있지만 분명히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란 것이 표시날 정도로 살아야 한다.

7. 온 천지가 초토화되고 있는 판에 겨우 318명을 거느린 아브람이 어떻게 이겼을까? 승리의 요인을 두 가지 지적한다면? (멜기세덱의 표현을 빌리자)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20)과 야간 사방기습작전의 성공(15): 아브람이 혼자 싸우러 간 것이 아니라 다른 부족과 함께 동맹해서 싸웠다(13, 24). 유일한 혈육인 조카 롯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모하게 전쟁에 뛰어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운이 좋았을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키우고 계시다는 뜻이다.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의 맛배기가 아닐까?

8. 아브람에게는 무모할지라도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함께 싸우러 간 세 부족은 어떻게 이런 싸움에 뛰어들 수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평소에 아브람을, 혹은 아브람의 하나님을 신뢰할만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소를 지붕에 올리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 딸, 며느리들이 군소리 없이 순종했다는 얘기를 하고서 집안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어른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평소에 아버지의 말이 얼마나 자식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기에 말도 되지 않는 말에 그렇게 순종을 하는가? 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아브람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9. 아브람이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왜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18): 살렘왕 멜기세덱은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인물이다(시 110:4): ‘살렘’은 ‘평화’, ‘멜기’는 ‘왕’, ‘세덱’은 ‘의’를 뜻한다. 히브리 기자에 의하면 그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이라고 한다(히 7:1-3).

    시편 110편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막12:37, 마 22:45, 눅 20:44)’ 할 때 인용한 시인데 그 시의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 이 시편이 쓰여질 때에는 아론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있었음에도 또 다른 계열의 제사장이 필요한 것을 말씀하였다. 결국 이 대제사장은 오실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람이 이런 내용을 알고 드렸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도 그 의미를 잘 모른 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 셈이지만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10. ‘너 때문에 부자 되었다’는 소리 듣기 싫다(23). 이 말은 끔찍한 말이다. 학교에서 옆의 친구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는데 ‘네가 도와주어서 100점 맞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생각해 보자. 1) 왜 이런 말을 하게 될까? 2) 친구 사이는 어떻게 될까?

    1) 네가 너무나 싫어서, 혹은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 롯은 좋아라 하고 갔지만 아브라함은 죄악에 물든 소돔을 대단히 싫어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신감의 발로라기보다는 소돔을 싫어했던 것 같다.

    2) 관계가 완전히 끊어짐: 그래 너 잘 났다. 내 꺼는 더럽다 이거지?

11. 내가 옳다고 믿고 내가 희생할 각오를 하는 것은 좋으나 남도 나와 같이 하기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는 내 이익을 포기하지만 타인의 것을 챙겨 주는 자세가 어디에 있는가?

    14:23-24 ‘소년들과 나와 동행한 자들의 분깃을 제하라’: 진리가 아닌한 나의 기준을 함께 사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자. 동화되던지 아니면 나는 이렇게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의 서랍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사람은 겨우 볼펜이나 칼을 빌려쓰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서랍을 허락없이 여는 것을 굉장히 기분나빠 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동료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는 글렀다. 나는 남의 서랍에 허락없이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특히 부부 사이에 여유를 좀 가져야 한다.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올라가야 하느냐 중간을 쿡 눌러 짜야 하느냐? 신문을 본 다음 페이지대로 차곡차곡 접어야 하느냐 마느냐? 양말을 벗을 때 뒤집지 말아야 하느냐? 싸울 필요 없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버릇이므로 동화되던지 이 정도의 여유를 가지던지. 제발 상대방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12. 사해 근처의 동맹국들이 다 패했음에도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잃은 것을 다 찾아 돌아왔다. 어쩌면 가나안의 통일왕국의 초대 왕이 될 수 없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가져도 되는 노획물을 마다하였을까?

    그런 욕심으로 전쟁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오직 롯 때문이었다. 인기나 지위가 높아지면 쉽게 변하는 것이 사람인데 처음에 가졌던 선한 생각이나 의도가 얼마나 변하기 쉬운가?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것이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굽에서 있었던 일로 인하여 재물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확신한 것 같다.

    때로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하여 맹렬하게 노력하면서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 묘한 자세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출세를 위하여 회사 일에 전력을 투구하는 사람과 출세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차이점이 아닐까?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해야 한다. 이런 일로 인해서 받을 칭찬이나 사례금이 먼저 떠오르면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의 눈에는 하나님만, 은혜를 바라는 성도들만 보여야 한다.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초심,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 자는 복되다!

13. 이 전쟁이 롯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치없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화려한 도시로 찾아간 그에게 닥친 최초의 시련이었다. 웬만하면 그쯤에서 소돔을 나와야 했는데... 19장처럼 파멸에 이르기 전에 악다받게 버티지 말고 잘못되었구나 싶으면 돌아서야 한다.

14. 아브람은 그렇게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아니었다.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목숨을 보존하려던 것을 보면 그렇게 용감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용감하게 나섰을까? 소돔왕에게 하는 말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가리켜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른 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려는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22):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새로운 각오로 사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소돔왕에게 한 말은 좀 신중하지 못한 것 아닐까? 신앙으로 살려는 사람이 열심이 지나쳐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열심히 전도하다가 잘 안되면 저주 비슷한 말을 하거나 부조리 한 세상의 모습을 인식하고 같은 회사의 동료를 모조리 불결한 인간으로 치부해버리고 혼자서 순교하듯이 정의의 투사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가!

    < 14절의 ‘단’ 먼 훗날 사사시대에 붙인 이름인데(삿 18:29)? 후대의 가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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