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 장                            

                 

창세기 12 장


1.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5: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는 증거로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다지만 완벽한 순종은 아니다. 가나안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하란에 오랫동안 정착했었음에 틀림없다. 재차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거듭 명령하셨기에 떠났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비록 부족함이 많고 억지로 떠밀려 순종했다고 해도 그것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세가 그랬고, 구레네 시몬이 그랬다. 억지로 진 십자가조차 그렇게 은혜로운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아름다운 교제를 원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셋을 통하여 믿음의 후예들을 기대했으나 모두가 타락하고 말았고 홍수 심판을 초래했다. 노아의 가족을 통하여 믿음의 후예들을 기대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모양이다.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길래 이렇게 끈질기게 사람을 부르고 계실까? 답을 짐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본문에 있다면?

    3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받을 복이 무엇이겠는가? 메시야를 아브람을 통해서 이 땅에 보내겠다는 말씀이다. 그 약속은 뒤로 가면서 차츰차츰 분명해진다(22:18).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메시야를 통한 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브람을 불러낸 목적이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나만 이런 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나의 이웃과 모든 족속에게 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3. 아이들 만화에 나오는 말이지만 어떤 戰士에게 방탄막이 둘려쳐져 있는 경우가 있다. 적이 공격해오면 총알이든 몽둥이든 튕겨나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는 사람이 피해를 입는 그런 방탄막을 아브람이 입고 있었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신앙 문제로 우리 남편을 핍박하고 괴롭힌 사람치고 지금까지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효자제일교회 김진경 집사님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삶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애꿎은 소리를 퍼부어도 우리는 웃으며 넘어갈 수가 있다.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안가나?’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학생에게 충고해 준 말이다. ‘개가 짖는다고 따라 짖니?

4. 아브라함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릴 때부터 특별히 신앙이 좋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었다고 생각한다.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 것일까?

    아니다: 결코 성경은 아브라함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허물 투성이 인간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런 아브람을 인도하여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가신 하나님이다. 아들을 바치기까지 순종한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건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훈련기간이 다 끝나고 마지막 테스트에 합격한 셈이다. 그런 신앙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셨다는 말이다. (cf. 고전 1:26-29, 수 24:2)

5. 포항중앙국민학교 6학년 때(1967년도) 담임 선생님 성함이 ‘김 복원’ 선생님이었다. 26년 후에 뜻하지 않게 그 아들을 만났다. 그 선생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학교 다닐 때에는 몰랐는데 그 분이 독실한 장로님이시라고 해서 더욱 반가웠다. 이제는 정년은퇴를 하시고 대구에 계신단다. 이 귀한 시간과 지면에 나는 왜 이런 쓰잘 데 없는 말을 하고 있을까?

    ‘복 福자, 근원 原자’ 라는 이름이니 틀림없이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의 이름은 불행한 경우가 많다. 항렬에 따라서 아무렇게 지었거나 사주팔자를 살펴서 지었거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적어도 부모의 신앙이 전달되는 이름이어야 한다. 아이 이름이 ‘새날’이면 그 부모는 틀림없이 운동권 출신이란다. 신앙적인 이름 하나가 평생 그를 붙들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신앙없는 자처럼 살고 싶어도 이름만 듣고도 불신자들마저 그를 믿는 사람으로 인정해 버리는 데는 타락해볼 재간이 없더란다.

6.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이 말이 잘못이 아니다. 단지 너무나 세속적인 복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표현은 예수 믿는 사람은 (            )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우리의 이웃과 형제들이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란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복을 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게 복을 전해져야하는 복의 근원이어야 한다. 복의 최종 기착지가 되면 안된다.

7.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일가 친척을 떠나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집을 떠나서 먼 아프리카로 떠나라 하면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낯익은 사람을 떠나는 것
    낯선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정답은 없음)

8. 아브람은 오랜 여행 끝에 가나안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이 말도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흠을 잡는다면?

    자기가 먼저 단을 쌓았더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면 그렇게 칭찬을 해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신 후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7)께 단을 쌓았으니 칭찬의 강도가 조금 떨어진다. 그런 다음 거기에 거해야하는 데 버려두고 옮겨간 것도 문제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경우를 살펴보면 대부분 아브람이 힘들고 어려울 때였다.

9.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려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느 약속이 이루어진 결과인가?

    큰 민족을 이루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은 크리스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유대인, 심지어 이슬람교도들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이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니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리기 어렵다.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2000년 전에 쫓겨난 땅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 기적을 일으키긴 했지만 진정한 회복은 예수를 영접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10. 아브람의 행위 중에서 잘못을 찾아보시오.

    1) 기근으로 약속의 땅을 떠난 것
    2)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아니함
    3) 자신의 목숨만 생각함(13), 비굴한 삶을 도모함
    4) 아내를 팔아 많은 재물을 얻음: 차라리 돌려주었더라면...

    아내나 딸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당시 상황(창 19, 삿 19장)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으나 적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임.

11. 데이트 중에 한 무리의 깡패를 만났다. 남자가 혼자서 도망가버리고 여자만 잡혔다. 봉변을 당하기 직전에 멋있는 사나이가 나타나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상대를 바꾸어서 새로 연애을 시작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도망가버린 남자를 어떻게 하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대답을 하길래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그냥 안 만나느냐? 최소한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 안 만나야지.’ 아브람이 한 짓이 꼭 이 모양이다는 말이다. 아니, 피치못할 형편에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궁리한 짓이니까 이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12. 아내를 빼앗기고 많은 재물을 얻은 아브람은 그 날 기분이 어떠하였을까? 혹은 그 날 밤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고통 속에 밤을 지새웠을까?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니면 이왕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얻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이나 하고 있었을까?

13. 바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브람의 씨를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 때 아브람의 씨란 아브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래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래를 통해서 얻은 아브람의 씨만이 아브람의 씨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야의 길을 막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예수의 탄생 때 있었던 유아학살사건이다.

14. 아브람이 특별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유가 될 만한 것이 본문에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제일 불쌍한 아들이었을 지도(자식이 없는).

15. 12장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손해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사래를 좋아했기 때문(사래의 신분을 알지도 못한 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있는 여자인 것도 모른 채),

    하나님 편이 되는 것: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이런 불행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400여 년 후의 바로도 똑 같은 이유로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자신의 선하고 악함이나 잘나고 못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마느냐하는 것이다. 이왕에 하나님없이 살려면 믿는 사람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 것이 낫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아는 친구 옆에 있으면 내가 애꿎게 당할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위하여 훈련시키시는데 나만 죽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16. 아브람의 경우나 이삭의 경우에는 기근 때문이었지만 무슨 이유이었건 간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을 떠나서 잘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야곱은 마땅히 애굽으로 가야하는 데도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하셨다(46:3). 약속의 땅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들의 예를 아는 대로 말해보자.

    아브람, 이삭, 야곱, 나오미, 다윗(하나님께서 도로 들여보내심), 상징적이지만 롯(아브람을 떠남): 비록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고생을 적게 하는 비결이다. 내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하다가 더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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