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 (요 14:1-3, 마 8:19-20)|이사/ 김병화목사          

         

“집 이야기” 

14:1-3, 8:19-20

 

1.

톨스토이 우화(寓話)입니다.

거대한 땅을 가진 주인이 어느 날 말했죠.

“해 뜨기 시작해서부터 해 지기 직전까지 내 땅에 말뚝을 박고 망을 쳐 경계선을 그어라. 네가 경계선을 긋는 대로 그 땅을 네게 주겠다.

한 사람이 정말 열심히,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말뚝을 박았어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쳐갔지만, 한 평이라도 더 넓게 경계선을 긋기 위해 헉헉 거리면서 달리고 달렸어요. 해가 지기 직전, 그는 헐떡거리며 비틀비틀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출발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는 출발점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온 힘을 기울여 쳤던 자신을 위한 땅의 경계선은 그에게 소용이 없었죠. 사람들이 호흡이 멈춘 그를 들고나가 대지에 묻었어요.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1평이면 충분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우화(寓話)를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본질을 보게 합니다.

욕심 부리며 살지 말라고 경고음도 내보냅니다.

인생이란 자기 땅을 마련하려고 애쓰다가, 마련한 땅의 귀퉁이 1평에 묻히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합니다.

 

2.

오늘은 집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728)에 새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전도사 생활비 5만원을 받으며 시작된 혼인생활, 그때 전세금 120만원 중 50만원을 빚을 내어 마련하여 시작된 혼인생활 40여년 만에 “내 집”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초동교회 사임 때 퇴직금과 전별금으로 받은 것으로 4년 동안 전세로 살던 집에서 떠나며, 30년 동안 나라 빚을 얻어 마련한 집입니다.

친구들에게 ‘언덕 위에 전망 좋은 집’이라 했더니, “출세한 것이냐?”합니다.

방학동에 아파트를 가졌던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동안 거주했던 집들은 목회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목사는 늘 보따리를 싸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교회를 떠나야 할 때 훌쩍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마련해준 집에서의 생활은 늘 ‘떠돌이’같은 마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아갈 집이다 보니 “내 집으로서의 첫 집”이라는 뜻입니다.

솔직히 기분 좋아요.

그렇지만 집을 마련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톨스토이 우화에서처럼 1평이면 충분하고, 이제는 자꾸 버리고 포기해야 할 때인데,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난해지라고 설교하며 가르쳐왔던 것에 작은 집이라도 소유하는 것에 혹시 욕심 부리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어요.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8:20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누가복음9:58에서는 ‘집’)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어요.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목사가 ‘제 몸의 거처를 마련해?’송곳으로 찔리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답니다.

 

3.

그러다가 성경을 묵상하던 중, 오히려 용기를 얻게 되었고, 무겁게 느끼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예수님의 말씀 “여우도,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를 잘못 해석했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상황을 살펴보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8:19은 ‘한 서기관이’이고, 누가복음9:57은 ‘어떤 사람이’라 했는데,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집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한 곳에 정착하여 머물 삶을 살려는 것이 아니다. 마치 집 없이 이곳저곳,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나는 순례자이다. 이런 나를 따르겠느냐? 너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집이 없었나요?

우리는 없다고 짐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집이 있습니다.

나사렛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곳이 예수님의 집이죠.

단지 예수님은 출가(出家)했을 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어머니나 동생들의 시각으로는 가출(家出)한 예수의 귀가(歸家), 귀향(歸鄕)은 없었어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래도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오빠 나사로 집 다락방에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세리장삭개오의 집에서도 머무셨죠.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도 머물렀었어요.

노숙자 생활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흔적들이 많아요.

예수님은 집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궤를 맡을 정도로,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며 다니면서도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굶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나의 길은 한 곳에 정착하여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랍비들과는 다르다.

나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닐 텐데, 그래도 날 따르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살 집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 그 동안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4.

다시 성경을 봤더니,

하나님은 끝없이 반복하여 우리들이 살 집에 관심했고, 마련해 주시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하신 일을 보셔요.

창세기 1장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 생물, 식물, 물고기를 만든 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했어요.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1:26)

가축(家畜)이 무엇이죠?

집에서 기르는 짐승입니다.

집이 있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7-28) 했어요.

창세기 2장의 J문서의 창조도 보시죠.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2:8) 집이라고 구체적인 표현은 없어도, 그곳이 아담이 거처할 곳이었다는 것에서 에덴동산이 거처(居處), 곧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담은 죄를 범한 후 거처()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인류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존재로 삽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5-16)

‘더 나은 본향’과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이 예비한 한 성’이 모두 하나인데, 우리의 거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집을 주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예를 보시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내용이 중요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하나님께서 보여 준‘땅’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이스라엘 민족이 온갖 고난과 시련,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었죠.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는 걸음, 순례기가 신앙여정으로 해석되지요.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땅’은 ‘집’입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3:8, 17)

여호수아24:13에서는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서 거주하며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24:13)

세겜의 재계약 때 한 약속입니다.

 

5.

예수님의 요한복음 14:1-3의 내용도 ‘집 이야기’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갔다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집, 천국이라고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라고도 합니다. 회복된 에덴동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성경이 우리의 집을 위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의 결론의 말씀도 집짓기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7:24, 26)

그렇습니다.

‘집짓기’입니다.

여기에서 경계할 집짓기가 있어요.

아모스 예언자가 질타(叱咤)한 “상아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송아지를 잡아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6:4-5),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어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여”(5:11) 사는 집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고단한 하루의 삶에 안식처로 삼아 새 힘을 얻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처로서의 집은, 하나님께서도 주님께서도 늘 신경 써 주신 집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집’에 매이고 집착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물질에 속하는 것이 되죠.

이런 뜻에서 우리는 신앙의 집, 주의 영이 거하실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서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의식주(衣食住)가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입을 것, 마실 것, 거할 곳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한 것입니다.

 

6.

새집이사를 하고 며칠 지내면서 어찌된 집인지 돌아봤어요.

톨스토이 우화처럼 헐떡이며 욕심 부리며 마련한 집은 아니었어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증거겠죠?

떠돌이 심정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에서 마련해 준 집에 머물다가, “이제 안주하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집이 어떤 집이어야 할까요?

다짐하는 마음이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음을 얻는 집이요,

쓰고 싶은 글을 집필하는 집이요,

맡겨주신 생명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이요,

목회의 길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집이 되어야 하리라 다짐합니다. 기도해 주셔요.

 강 석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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