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우리 교회의 모습을 들어본다
김상길 부목사(교무담당)
가슴설레며 교회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
처음 서대문중앙교회에 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다. 아버지인 김일영 장로님이 조용기 목사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온가족이 냉천동 꼭대기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나는 토요일이면 마치 소풍 전날처럼 가슴 설레며 주일을 기다렸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는지 항상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아끼며 품어주었다. 토요일, 주일이면 북과 장구를 들고 서대문회관을 출발해 독립문을 돌아 현저동으로 내려오며 전도할 정도로 교사들이 성령 충만했다. 교회를 안다니던 아이들도 그 뒤를 따라오며 교회에 발길이 닿아 예수님을 믿게 됐다. 그때의 교사들이 바로 오관진, 양태흥, 이광지 목사님이시다. 교사들뿐 아니라 성도들도 북치며 열정적으로 전도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믿음은 성령의 불만 붙이면 화르륵 타오르는 거룩한 인화성 물질과도 같았다.
서대문 부흥회관에서는 거의 매일 부흥 집회가 열렸다. 조용기 목사님 말씀이 은혜로워 하룻밤 사이에 천 명씩 모여들었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해 종을 쳐도 기도의 열기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도들이 방언을 말하면 당연히 전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한다는 말이 생겼다. 이것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부흥의 초석이다.
뜨거운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또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이영훈 목사님의 탁월한 리더십이다. 이영훈 목사님은 중등부, 고등부, 대학, 코이노니아 회장을 맡으며 각종 기도회를 추진하고 아이디어를 내며 청년들을 이끌었다. 내가 고등부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안양농민학교 1회 수련회다. 이영훈 목사님의 아이디어로 처음 교회 밖에서 3박4일 기도회를 가졌는데 외부에서 모여 기도하니 너무 좋았고 많은 청년들이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
60년동안 우리 교회를 통해 정말 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섬김이 앞으로의 우리 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어 열매를 맺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윤재혁 원로장로
1965년 남선교회 교통실 봉사 잊을 수 없죠
1964년 6월 24일 순복음교회에 나오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조용기 목사님 말씀을 듣는데 어찌나 성령 충만한지 큰 은혜를 받았고 3개월 후 성령 침례를 받았다. 그 때부터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됐다. 65년부터 남선교회 봉사실에서 첫 봉사를 시작해 원로장로가 될 때까지 교회에서 봉사했다. 지금은 원로장로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서대문 시절을 떠올리면 조용기 목사님의 능력의 말씀이 많이 생각난다. 부흥회도 많았고 예배 때마다 방언기도도 뜨거웠다. 그리고 성령 충만했던 구역예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데 교역자들이 부족해 권사님들이 교역자의 역할을 했다. 성령 받고 싶어 구역예배에 참석했는데 당시 남자는 나밖에 없었다. 구역식구들과 권사님들의 중보기도를 받으면서 성령 받아 지금까지 뜨겁게 신앙생활 할 수 있었다.
1974년 8월 서대문에서 나와 여의도로 성전을 이전할 때 벌판에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며 순복음교회는 망할꺼라고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하지만 주일이 되면 여의도로 오는 마포대교는 성도들의 행렬로 이어졌고 구름 떼처럼 많은 성도들이 몰려왔다. 성도들은 대성전 밑에서 가마니 깔고 기도하며 변화받고 기적을 체험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은 적금통장을 헌금함에 넣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팔아서 헌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여의도 성전이 세워졌다.
당시 나는 남선교회 교통실에서 봉사를 했다. 남선교회 교통실에는 봉사자 14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도 차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별로 없어 개인택시 운전하는 분과 군대에서 운전을 해본 내가 교통봉사를 맡았다. 여의도에서 마포대교 건너기 전 신호등 앞에서 안내를 했는데 예배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1975년 7월 23일 장로 장립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더 배우고 싶어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를 시작했다. 아동4부 평교사로 시작해 교회학교에서 30년을 봉사하며 교회학교의 큰 부흥을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정리=이미나 기자
고상권 원로장로
서대문시절의 뜨거웠던 기도 눈에 선해
나는 1965년도부터 교회에 출석해 1978년도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감사한 장면들이 있다.
가장 감사한 것은 조용기 목사님의 후임으로 이영훈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세우신 것이다. 두 분 목사님이 생각이 같고 성령운동이라는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또한 어려움이 있을 때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까지도 같다. 앞으로도 이영훈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님처럼 교회를 지금처럼 잘 이끄시리라 믿는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대문시절 집사로 봉사를 하던 때였다. 그 때 여의도로 성전을 이전하는 것을 선포했던 시기였다. 여의도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장소가 비좁아 성전 인근에 천막을 치고 접수를 받았다. 그런데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다 잠시 짬을 내어 헌금을 작정하러 오신 분들이 많았다. 벌떼같이 몰려드는 이들로 인해 순식간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작정금액이 500만원이나 되었다. 당시 500만원은 매우 큰돈이었기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여의도성전 건축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런데 교회건축이 시작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건축비 문제로 어려움이 찾아왔다. 건축업체들은 건축비를 달라며 조용기 목사님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이 때 짓고 있던 여의도성전 지하에서 성도들을 중심으로 매일 철야기도가 시작됐다. 조용기 목사님도 성도들과 함께 매일 기도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가 가장 우리 교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기도로 지금의 여의도성전이 지어졌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이제 60년을 맞아 서대문시절의 그 뜨거운 기도의 불이 다시 점화되어 이어 가길 바란다. 아무리 종을 쳐도 멈추지 않았던 기도의 함성이 지금 필요하다. 그 뜨거운 기도를 통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 번 더 부흥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정리=정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