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창립 60주년 특집>그땐 그랬지(2)

그때 그시절 우리 교회의 모습을 들어본다



이봉순 권사(서대문대교구)
불같은 성령이 임했던 서대문 시절




 내가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은 부흥의 열기가 뜨거웠던 서대문 시절인 1968년 11월 첫 주, 내 나이 28살 때였다. 결혼 전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나에게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순복음교회는 참으로 생소했다. 엄숙한 예배가 아닌 박수를 치고, 북을 치고, 소리 내어 기도하며 우는 모습에다가 최자실 목사님이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을 외치며 강단을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시는데 그 때마다 나무 바닥이 ‘삐거덕 삐거덕’ 하며 정신없는 소리를 내어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 주 조용기 목사님의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설교에 내 교만했던 마음은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대구에서 여고를 나온 나는 따발총 같은 목사님의 경상도 사투리가 쉽게 이해됐다. 명확하고 희망에 찬 복음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이제 가난한 대한민국은 살아나겠구나’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주일이면 조용기 목사님은 네 번 설교를 하셨다. 성전안에 자리가 없어 성전 밖을 빙 둘러싸고 뒷마당까지 사람들도 가득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으면 돌아가야 하는데 또 듣겠다며 나오지 않고, 한쪽에선 들어가겠다고 야단이니 나중에는 왕복 4차선 도로 중 2개 차선이 사람들로 막혀 경찰이 출동해 주일마다 교통 정리를 해야 했다.
 죽으려고 약봉지를 들고 북한산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서대문 로터리가 하도 막혀 차에서 내렸다가 우연히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약봉지를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철야예배는 더 은혜가 넘쳤다. 낮에는 주변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교회에 오지 못하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금요철야 때는 죄다 교회에 와 앉아 있었다. 서대문성당에 다니시던 시어머니도, 돈 빌려주고 빨리 달라고 재촉하는 ○○엄마도, 심지어 순복음의 영성을 받겠다며 동네 무당까지 와서 앉아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그들은 변화 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됐다.
 나는 교회는 다녀도 구역예배 참여는 꺼려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구역에 조오남 권사님이라고 계셨다. 함경도 사람으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닌 이분은 김호성 목사님(국제신학교육연구원장)의 할머니셨다. 절도있지만 사랑이 많으셨던 권사님의 보살핌으로 나는 교구에 정착할 수 있었고,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양태흥 목사님의 장모이신 김마리아 권사님도 어머니처럼 나를 사랑으로 돌봐주셨다.
 나는 71년에 주일예배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았다. 용광로보다 뜨거운 불이 머리를 시작으로 발까지 내려왔다. 다음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성령 임재였다. 주께서 아름다운 호숫가를 환상으로 보여주시더니 ‘이 곳에 들어온 자는 네가 처음이며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였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불같이 뜨거웠고, ‘말씀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했다. 성도들의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교회는 당연히 부흥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서대문로터리에 간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대문 교회터를 바라보며 ‘하나님 이곳이 바로 제가 은혜받은 자리에요. 우리의 자녀들이, 후손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순복음의 신앙을 잇게 지켜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박영순 권사(서대문대교구)
순복음 열정은 나의 찬양사역 원동력



 1966년 남편(김락형 원로장로)을 따라 우리 교회에 처음으로 왔다. 나 또한 3대 기독교 집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성가대 봉사와 군부대 찬양봉사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과 전통적인 장로교회에 익숙한 나에겐 순복음교회의 믿음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 청년부 조직부장인 김락형 원로장로와 전도사인 시어머니는 집보다는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오후까지 일을 하고 다시 교회에 나와 성도들과 밤 늦게까지 지하철, 버스, 서울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는데 열심이었다. 교회에서도 집에서도 항상 찬양과 기도로 시끄럽기까지 했다. 그런 가족들의 유별난 믿음과 강요로 힘들고 괴롭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님은 간질병을 앓고 있는 여자, 집없는 사람까지 데려와 기도해주고 같이 살기도 했다.
 그러던 5월 어느날 가족의 권유로 부흥회를 참석하던 나도 성령침례와 방언을 받게 되었다. 그후 소극적이던 내 믿음도 일주일 내내 교회봉사, 전도와 신학공부에도 열심이었다.
 1960년대 서대문순복음중앙교회는 성령의 폭풍으로 뜨겁고 열정적인 교회였다. 많은 신유와 방언의 역사, 기도로 교회는 항상 뜨거웠고 수요예배에도 2층 자리에 서서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부흥했다.
 나는 중등부 교사와 어머니 성가대(지금의 나사렛찬양대)에서 봉사를 시작으로 영산음악원에서 하는 성악교육도 받게 되었으며 많은 기적이 넘쳐나는 조용기 목사님의 해외성회에도 참석해 찬양사역을 할 수 있었다.
 72세인 지금도 음악선교회 샬롬트리오로 3번째 찬양앨범을 내기도 했다. 찬양은 나에게 행복과 감사의 연속이다.
 60주년을 맞은 교회행사들을 보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그 역사하심 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성령의 이끄심과 순복음교회의 열정, 어머님과 남편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찬양사역을 할수 있었을까 싶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위해 찬양드리고 싶다.
정리=김성혜 기자


박종심 집사(관악대교구)
병 고치러 온 교회에서 평생 기쁨 얻었죠




 내가 처음 우리교회에 오게 된 것은 너무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심장 부정맥을 앓고 있었는데 1976년 당시 큰아이는 그때 고작 여덟 살이었고 둘째는 다섯 살, 뱃속에는 막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병의 위협으로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당장 너무 아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여러 차례 교회 출석을 권유 받다가 결국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교회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 처녀 때부터 순복음교회에 다녔다는 친구는 나를 금요일 구역예배로 인도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구역장님의 말씀에 따라 이틀 뒤 주일 예배를 가게 됐다.
 72세가 된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버스를 타고 내려서 보니 교회에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구름 떼같이 많은 사람들에 섞여서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갔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렇게 교회를 다닌 후부터는 몸도 아프지 않고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둘째인 딸이 초등학생 때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서 병원에 가보니 혹이 있다면서 아이가 자라면 편도선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세아이를 데리고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3일 금식기도를 하고 난 후 거짓말처럼 딸의 목이 깨끗이 나았다.
 젊었을 때는 구역장을 맡아 전도를 정말 많이 했는데 그때는 주로 또래 아이 엄마들에게 전도를 했다. 지금은 이사들을 많이 해서 자주 못 만나기도 하지만 관악구에서 40년 넘게 살면서 교회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기도처가 처음 생겼을 때의 기억도 난다. 기도처가 생기기 전에는 지역장님이나 집사님들의 집에서 다같이 예배를 드렸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옆사람과 포개 안고 동네가 다 무너지게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도님들의 헌신으로 1996년도에 기도처가 세워졌다. 인정 많고 서로를 많이 사랑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40년 가까이 함께 신앙생활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눈 신앙 안에서의 친구들이 있기에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참 행복하다.  
정리=복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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