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 <6> - 구약신학 ③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 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이번 호부터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 <편집자 주>
구약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우선 구약은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들어졌으나(창 1:27) 불순종의 결과로 말미암아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즉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묘사한다(창 3:19). 또 구약은 인간을 갈망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갈망하는 존재다. 인간이 갈망하는 종류는 식욕에서(전 6:7) 영적인 영역까지 다양하다(시 63:1). 이 외에도 구약은 인간을 느끼고 생각하는 이성적 존재로 설명한다(삼상 12:24). 인간은 마음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을 깨달을 수도 있고(호 6:3), 악을 계획할 수도 있는 존재다(창 6:6).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과 신약 모두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완성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시작인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과 파괴를 보여주고, 흥망성쇠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인 실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신앙적 모범을 제시한다. 예언자들은 장차 이루어질 전 우주적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한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곳이 될 것이다(사 1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의 기준과 다르다(삼상 16:7).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은 곧 하나님의 은혜다. 구약성경에서 창조는 이스라엘 주변국들로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구별해주는 중요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성경의 창조 기사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가나안, 이집트, 앗수르, 바빌론 등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나라들은 자기들만의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 신화와 구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에서 이방 신들은 짜증이 많고, 매우 괴팍하며 이기적으로 묘사되지만, 구약성경의 창조 기사가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한 창조주시다. 또한 주변 국가의 창조 신화에서 인간은 신들의 노예로 묘사되지만, 구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정의된다. 많은 신앙인이 구약의 제사를 어렵게 생각한다. 물론 수천 년의 시간적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에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구약의 제사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 있었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등장하는 제물은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다양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형편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레 14:21).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제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는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옹호하거나 선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수비적 입장이었고, 군사 장비나 군대의 규모에 있어서 상대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고, 기적적인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였다(왕하 19:35). 구약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전쟁에 능한 야훼라고 찬양하지만(출 15:3; 시 24:8), 그것은 전쟁에서 약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다. 구약에는 전쟁에 대한 언급만큼이나 평화에 대한 언급도 많이 등장한다. 일례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사사 기드온은 자신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야훼 살롬의 이름을 불렀다(삿 6:24).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들에게 알리기 위해 예언자나 선지자를 세우셨다(암 3:7). 그들은 자신들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야만 했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 알아맞히기가 아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백성에게 악한 거짓말을 쏟아냈다(미 3:5).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예언을 대가로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렘 20:8∼9). <국제신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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