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로 보는 대재난과 그리스도인] ③ 종교개혁자들과 흑사병 |
14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유럽 인구 거의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창궐했다. 1차 흑사병의 대유행(팬데믹)으로부터 약 200년이 지났지만 병의 전염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흑사병은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신의 징벌이었다. 전염과 죽음의 위기는 당시 종교개혁의 리더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글에서는 흑사병의 위기를 겪었던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울리히 츠빙글리 루터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리더였다. 그가 1519년 1월 1일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흑사병의 물결이 거침없이 라인강 상류를 향해 들이닥쳤다. 라인강 인근에 있던 바젤과 샤프하우젠에 이어서 그해 여름엔 취리히까지 초토화되었다. 당시 약 7000명이었던 취리히 인구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2000명 가량으로 격감했다. 성직자로서 츠빙글리는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신의 공동체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떠나 홀로 남겨진 환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그러던 9월 중순, 츠빙글리 자신도 흑사병에 전염됐다. 그는 약 두 달간 사경을 헤맸지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훗날 그는 자신이 지은 '역병가'에서 당시 겪은 죽음의 공포와 그 가운데 얻게 된 견고한 믿음을 이렇게 고백했다. "<1절> 주 하나님, 저를 도와주옵소서. 죽음이 문 앞에 와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저를 죽이고 있는 이 화살을 빼주옵소서. 그러나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를 만드실 수도 부수실 수도 있습니다. <2절> 하나님, 위로해주옵소서. 병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통증과 두려움이 제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저의 유일한 위로가 되는 주님!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제 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감각도 거의 마비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싸워주실 시간입니다. 저는 미쳐 날뛰는 이 악마에게 저항할 힘조차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주님만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3절> 하나님! 당신이 저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원상태로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 입술은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가 받은 엄청난 죽음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세상을 향해 저항해 나아갈 것입니다. 오직 당신이 도우실 때 저는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얻었다. 마치 풀무불에서 연단되어 나온 정금 같은 그의 믿음은 로마가톨릭의 파문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2. 마틴 루터 1516년 1527년 1535년 1538년 그리고 1539년 마틴 루터의 도시 비테베르크에도 수차례에 걸쳐 흑사병이 창궐했다. 당시 독일 사람들 역시 전염병의 창궐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불신앙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종교개혁의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루터는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통해 사람들의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려 했다.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일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물에 빠지면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합니까? 배고프고 목마를 때 먹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됩니까? 만일 누군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입니다. 약을 먹고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십시오!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감염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언제든지 거절하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흑사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 주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시장이나 판사 의사 등과 같은 공무원들은 계속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병자를 돌보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받은 은혜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루터는 전염병을 피하는 일은 불신앙이 아니며 감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일에 부름 받은 직분자들은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간에 자리를 지키고 병자나 약자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 자신도 전염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자들을 돌보고, 죽어가는 자들의 곁을 지키기 위해 비텐베르크에 남았다. 루터는 섬김을 위해 부름 받은 직분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3. 장 깔뱅 깔뱅은 프랑스 출생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흑사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파리로 옮겨 학교에 다녔다. 깔뱅은 1540년 이델레뜨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이델레뜨는 아이가 둘 있는 과부에다가 허약한 여인이었다. 깔뱅 역시 가난한 목회자로서 당시 다섯 달 동안이나 사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랑 앞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깔뱅은 찰스 대제가 소집한 제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석 달이나 집을 비워야 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슈트라스부르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걱정으로 회의를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가 절친한 동료들과 주고 받은 편지에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이 잘 나타난다. "지금 내 집은 매우 안 좋은 상황입니다. 내 동생은 이웃 마을로 피했고, 아내는 내 동생의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밤낮 내 머리엔 아내 걱정으로 가득합니다"(기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나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로조차 해 줄 수 없습니다"(삐에르 비레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다행히 6개월 후 깔뱅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개혁을 위해) 제네바로 가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맞이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고백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된 지 거의 석 달이 되어간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을 교훈 삼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① 전염병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참된 성도! ② 부름 받은 사명을 기억하고 섬기는 일에 용기를 내는 참된 성도! ③ 소중한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참된 성도!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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