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설교.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히브리서 6장 1-12절)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괜찮을까요? 구원을 이미 확보 했는데 대충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지 않나요? 라고 생각하신다면, 대답은 “NO,! 아니오!”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은 어떠한 죄를 짓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고 지극히 비 성경적인 발상입니다. ‘구원파 이단’이 이렇게 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 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구원받은 자는 오히려 옛사람의 행실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 될수록 더 나은 말과 행실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징표(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일시적이고 확정적으로 발생하지만, 그 구원을 뒷받침하는 개인의 거룩한 생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럼 한 걸음 더 나아가 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변화되기는커녕 예전 보다 더 온갖 죄를 지으면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성경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도 준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구원이 취소가 됩니까? 여기에 대한 답도 역시 “NO,! 아니오!”입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이 취소되거나, 변경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구원이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것이라면, 구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구원파랑 다른 게 뭡니까? 어차피 구원 받았음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 머 적당히 살아도 되지 않나요?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결정은 하나님만의 주권이십니다. 사람이 섣불리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구원이라는 것을 결정함에 있어 어떤 사람이 지닌, 믿음의 진실함, 회개하고 돌이킴의 분명함, 구원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겸손함,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삶,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삶,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전체적인 삶의 족적들을 다 평가하신 후에, 그것이 믿음에 기초한 것인지를 보고 판정을 내리십니다.
학창시절에 새 책, 새 노트 가지면 의욕이 넘칩니다. 전교 1등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책에는 밑줄을 치면서, 침을 묻혀가면서 열심히 읽습니다. 노트에는 형형색색 표시를 하면서 정성스럽게 써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중간시험 지나면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아서 깨끗합니다. 노트 필기는 흘림체이진, 필기체인지 모를 정도로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습니다. 초반전에 강하지만 인생의 후반전, 신앙생활의 종반전에 가면 갈수록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냥 주저앉아 쉬고만 싶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 다 지켜 가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대충 사는 것이 편해지다 보니 말씀 따로, 나 따로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는 것이, 시험 답안지를 백지제출해도 다 100점주는 것처럼 그렇게 물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의 인생이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는 구원의 일정표는 결코 끝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구원을 잃지는 않을까? 내가 구원의 방향에서 빗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조심하고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로 몸과 마음을 돌이키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5절의 말씀을 읽으면 매우 심각해집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어떻습니까? 말씀을 접하면서 두려움이 느껴지십니까? 과거에 저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 “은혜 받고 타락한자들은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는 말씀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자신하고 살아가다가도, 이 말씀만 읽으면 찜찜한 기운이 나를 덮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빛 되신 주님을 만난 기억이 분명합니다. 방언을 하는 것을 보면 은사도 주어 진 게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리고 시인하고, 순간순간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성령 받았음도 맞습니다. 말씀이 그저 텍스트(문자)에 불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살아 역사한다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제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겠습니까?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말씀 속에 살아가지만, 내가 여전히 타락한 자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동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동부 친구들 모두가 다 천국에서 만나 잔치하게 되기를 원하세요. 다 천국 갈수 있죠?” 라고 했더니, 다연이가 저에게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목사님이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해요?” 저는 당황해서, “목사님도 예수님 잘 믿어야 천국 갈수 있지, 천국에서 함께 만나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연이의 그 말이 4-5절의 말씀과 매치되면서 심한 괴로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바뀔 것이 없다, 끝이다”라고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의무감으로 외식적인 신앙생활과, 여전히 세상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의 이중적인 태도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으로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이거, 대충 살았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다시 새롭게 되는 회개의 기회가 내개서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강력한 경고조차도 무시하고, 계속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 듣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멋대로 살아가도 구원 받았다는 상황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7-8절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7절은 은혜를 은혜답게 사용하는 좋은 예입니다. 좋은 땅은 은혜 받고 순종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은 풍족하게 주신 것에 감사하여 많은 열매(복음의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 의의 열매 등)로 화답합니다. 은혜 받고 삶의 열매로 반응하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은혜 받고, 성령 받고 타락한 자들은 8절과 같이 됩니다. 하늘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비를 내려 줍니다. 비는 곧 쉼 없이 부어지는 풍성한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땅은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땅은 은혜만 받고 입 싹 닦고, 도무지 열매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 은혜의 비가 내려오자 눈치 보이기는 싫어서 가끔은 무어라도 내놓기는 하는데, 그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쓸모없는 것들만 내 놓습니다. 땅에서 화답이 없자 비는 점점 줄어들고 땅은 불모지로 변해 갑니다. 마침내는 버려진 땅으로 저주까지 받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고 저주 받은 땅은 불에 타 없어지는 폐기 처분을 당하게 됩니다. 은혜와 성령이 비 같이 주룩주룩 내리는데도 끝까지 거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저주와 버려짐 뿐 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이 말씀대로 하실 것입니다.
복을 받는 7절의 삶을 살아가느냐, 저주를 받는 8절의 삶을 살아가느냐는 오로지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고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과의 책임은 순전히 선택하는 자의 몫입니다. 결과를 오픈하고 가르쳐 주는데도, 복을 택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저주를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으실 겁니다. 여기쯤에서 다시 고민해 봅니다.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나는 유익한 농작물을 내는 좋은 땅입니까? 아니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입니까? 나는 7절 라인에 속해 있습니까? 8절 라인에 속해 있습니까?
실제로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살면서도 “왜 복 안주십니까?” 불평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살면서도, 저주 받고 불사름 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위기감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려 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믿는다, 안다, 필요하다, 심지어는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타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아, 더 이상 듣기 싫다, 그만해라, 나도 너희에게 돌이길 수 있는 기회를 끊어 버리겠다” 정말 무섭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데도, 과연 우리가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자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단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인, 변화, 새사람, 정직, 겸손, 예의, 사랑, 미소, 소망, 행복...많은 단어들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들을 보기 좋으라고, 폼 잡으라고 적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단어들에 어울리도록 각자 삶의 자리에서 얼굴로, 말로, 태도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결과물이 없는 홍보성 문구나 발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잠언 25장에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시~원한 얼음냉수를 가지고 나아가야 된다고 합니다. 그 얼음냉수는 우리가 이 땅에서 땀 흘려 수고한 삶의 열매들입니다. 그 얼음냉수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고 합니다. 주님 다시 만날 때 빈손으로 그냥 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좋은 땅, 시원한 비를 내려 주었으면, 좋은 수확물을 많이 준비해서 주인에게 나아가는 것이 종 된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는 다른 사도들 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고백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일생에 이런 고백들을 남겼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그늘에서 나를 건져내랴”,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요, 만물의 때만도 못한 자요,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노라” 이런 말들이 위대한 사도라고 칭함을 받는 한 인간이 주님 앞에서 말하는 자기인식의 고백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정할 줄 아는 사람은 죄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주님을 결코 홀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식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교회 역사의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견주어서 우리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아주 사소한 죄 의식조차 희미해진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부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뭐가 그렇게 당당하고 잘났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실 인식은 왜 이렇게 깜깜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앞에 제대로 무릎 꿇지 않는다면, 주님의 크신 위엄 앞에 나의 자존심을 굴복 시키지 않는다면,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의 죄를 다 꺼내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회를 갖지 못하는 타락한 자들로 인생을 끝내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대부분이 8절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에, 가장 강력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 앞으로 다시 우리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 받으며 살아가는 7절을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가 삶아가면서 적용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 제가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들어 보십시오.
1. 1절, 죽은 행실(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2절,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 의심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3. 9절, 내가 구원에 속해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4. 11절, 주님 오실 끝날 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5. 12절,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본을 보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드린 이 다섯 가지는 우리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오늘 설교 제목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주어에서 나는 쏙 빠지고 너와 너희들만 들어가면 곤란합니다. 나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는 타락한자들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매우 슬픈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고통을 참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주어를 넣으니, 내가 지금 주님을 바라보고 올바로 행동하며 살아가는지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나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이 말씀을 카톡 에도 올려놓고, 차 안에도 붙여놓고, 사무실 책상에도 붙여 놓고, 침대 머리맡에도 붙여놓고, 내 눈이 뛸 만한 곳에는 붙여 놓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멈칫 하실 겁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리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은혜 받고, 성령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말씀의 권능을 경험한 내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가지 실천 사항을 꼭 되새기시고, 기름진 좋은 땅을 잘 일구어 가셔서,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 복음의 열매를 많이 수확 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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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타락한 자로 인생을 마치는 불쌍한 영혼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큰 은혜와 성령 주심에 항상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삶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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