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마태복음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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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육체로 이 땅에 계실 시간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인생의 마지막 행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일요일)에는

절친하게 지낸 나사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명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는데, 식사 도중에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12). 유월절 닷새 전(토요일)에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 나흘 전(월요일)에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서 환전하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유월절 사흘 전(화요일)에는 성전에 가셔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있은 것을 보셨고,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권위 논쟁을 벌이고, 천국비유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유월절 이틀 전(수요일)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며 가룟유다를 포섭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배반을 당할 것을 예언 하십니다. 유월절 하루 전(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이 때 가룟유다가 배신자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식사 후 감람산으로 가셔서 마지막 고뇌의 기도를 드립니다. 유월절 당일(금요일) 새벽에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 당하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 받는 장면입니다. 시간상으로는 오전 6시를 전후한 시간 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한 번 당하고 빌라도 법정 앞으로 끌려 오셨습니다. 새벽녘에 감람산에 잡히셨을 때부터 군병들이 거칠게 다루었고, 가야바가 심문하는 과정 중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마구 쳤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참혹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 사형권한이 빌라도 총독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세 부류의 사람()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빌라도 총독이고, 다음은 빌라도 총독의 아내이고, 마지막으로는 유대인 군중들입니다. 이 세 사람()이 법정에 끌려온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일 먼저 빌라도 총독의 태도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라는 유대인청년의 목숨 따위는 하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왕을 자처해서 군중들을 소란 시켰다면, 그를 정치범으로 다스릴 생각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신성모독자거나, 세상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이든, 메시아가 아니든, 그런 종교적인 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당신이 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의 의미는, 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해놓고 유도 심문 할 거면 알아서 하라는 답변입니다.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절묘한 대답입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크게 놀랐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기이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란 이유는, 정치범 죄목을 씌워 간단하게 처리 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에게는 정치색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빌라도의 생각을 몇 수 앞서는 대단한 고단수였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 판단하면 자신이 이 상황을 온통 책임져야 하는 나쁜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직감 했습니다. 빌라도는 상황을 반전 시키려, 죄수와 예수님 중에 한 사람을 풀어 주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하고, 군중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라는 열심당원을 풀어 줍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주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드디어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판결을 선고하기 전에 행동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군중들을 향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아무 죄가 없다. 이 일은 너희가 책임을 져야 한다.”(24, 우리말성경)고 말합니다. 총독으로서 권한 행사를 하여 사형 집행 결정을 해 주긴 하는데, 자신은 이 판결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빌라도의 이 선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정치력을 발휘하여 곤란함을 잘 벗어나는 처세술의 달인처럼 보입니다. 군중들은 빌라도에게, “그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25, 우리말 성경)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즉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판결합니다.

 

,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게 한 과정에 하나의 책임도 질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돌아가셨다고 했을까요? 잘못 된 것이 아닌가요? 신천지를 포함한 이단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님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성경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의 내용은, 빌라도 의하여’(~by), 죽임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여러 문서에는, ‘빌라도의 면전에서’, ‘빌라도 앞에서’, ‘빌라도에 근거하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틴어, Passus sub Pontio Pilato-‘sub’()지배하에, 아래에’)(영어,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전치사 ‘sub’()‘under’로 번역)(헬라어, παθοντα επι Ποντιου Πιλατου-‘에피(επι ~위에)+소유격(폰티우 필라투 Ποντιου Πιλατου)’‘~면전에, ~에 기초하여, ~에 근거하여등의 의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십자가 사건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작위적이고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확실한 근거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거짓 이단들 때문에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인데, 현재의 많은 이단들도, 빌라도 이름이 들어간 것을 트집 잡는 것을 보면, 역사가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보신을 위해서,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청년 예수를 죽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면, 예수님 당시의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나 심문 하게 된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불행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을 살려 주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제 자신을 빌라도에게 대입시켜 보아도, 저도 청년 예수를 죽이라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빌라도의 결정을 두둔하거나, 혹은 공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 있을 뿐이고, 하나님만이 그의 결정에 대해 심판 하실 것입니다.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 결정은 우리에게 기회주의적이고, 책임 회피적인 신앙 태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여야 하는 순간에는, 빌라도와 같이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자리를 내거는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빌라도의 선택은 당연합니다. 열 번이라도 똑 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빌라도의 결정은 가장 좋은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또한 사건의 주범이면서도, 입 싹 닦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뒷짐 지고 모른 체하는 회색분자와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는 결정은 항상 어렵고 고민되는 과정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결정을, 단지 자기 자리보전을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살면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결정할 순간에 내일, 내 시간, 내 가족, 내 성공, 내 돈이 장애가 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막상, 예수님을 결정하려고 하면서도, 내가 받아서 누려야 하는 어떤 실질적인 이익이 보장 되지 않으면 거래를 중단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제가 너무 큰 범위로 말씀드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쉬운 예를 드리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휴대폰 평균사용시간이 2시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제가 지하철 타고 다닐 때 휴대폰 성경 앱을 통해 말씀 읽으면 30분 내에 10장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0분만 성경 읽으려고 휴대폰을 사용한다면 하루에 3장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 자연적으로 일 년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나라 신자의 90% 이상이 혼자 있는 시간에 일 년이 가도 성경 1장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휴대폰 속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조차 내 시간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신자의 80% 이상이 주일 오후 예배를 드리지 않고, 신자의 95% 이상이 새벽예배를 포기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주일에 약속이나 예배가 충돌한다면, 우선 내 시간을 먼저 갖겠다는 응답도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총독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포기하고,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러워 졌습니다. 예수님만 골고다 언덕으로 보내고, 나는 총독 관저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빌라도와 같은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해 놓고도 나는 몰라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 그런 거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라고, 빌라도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주어지고 있는 수많은 기회들, 나에게 평안을 누려가라고 주어진 풍성한 신앙의 책임은, 내 앞에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끌려 나오신 주님을 선택할 때 강력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혹시 권세와, 재물과, 지식과, 시간과, 좋은 것을 다 주신 것은, 우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지만, 그 보다 몇 백배 더 중요한 이유는, 만약에 예수님과 그 모든 것을 놓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을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제가 히브리서 6장을 설교 하면서, 우리가 성령 받고 거듭 났음에도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십자가에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나아온 것 같이 매일 같이 우리 앞에 나아오고 계십니다. 쇠사슬에 묶여서, 찢겨진 옷을 입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구타당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아오신 주님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계속 채찍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십시오. 거기서 예정 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십시오.” “나는요?, 나는 뭐 하냐구요? 그냥 쉬렵니다. 피곤하고요, 바쁩니다. 여기 총독 자리에 앉아 있으렵니다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개 싹 돌리고, 모른 체하며, 등 돌리고 살아가는 선택을 한다면, 주님은 묵묵히 채찍을 맞으러, 십자가에 달리시려 희롱하는 군인들에게 끌려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단 한 주간만이라도 제대로 주님을 선택하는 기회를 만드십시오. 또 다시 주님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총독의 자리, 그까짓 거 가볍게 다~~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만을 선택하셔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주님과 만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빌라도의 아내의 태도입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 빌라도 아내의 말은, 단 한 절만 나옵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빌라도의 아내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환상을 꿈을 통해 계시 하였나 봅니다. 빌라도의 아내의 역할은,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하려는 사람 앞에서, 그것을 막아서고, 하지 못하도록 하는 성령의 인도함을 의미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마치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과속에 주의하라는 음성을 들려주고, 차선이탈 경보를 울려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잘못된 선택을 할 여지가 많습니다. 나쁜 쪽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실, 좋은 것을 분별해서 선택할 능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심성은 나약하고, 음흉하고, 간교합니다. 좋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성령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말을 듣고 멈칫 했을 겁니다. 자기 앞에 있는 범상치 않은 청년의 기운에도 놀라고, 자신의 아내의 말에 더욱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그가 결국 아내의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양심에는 매우 거리낌이 있었을 겁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다른 길로 가려고 하면, 제동을 걸고, 방향을 다시 맞추어 줍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높은 레벨의 권면입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신앙의 선배들, 혹은 멘토들이 말하는 것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특별히 아내의 말은, 곧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시고 100% 따르십시오. 말 들으면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아내를 통해 빌라도에게 말하게 하신 것은, 아내의 말이 남편에게는 가장 강력한 조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 들어도 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은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가장 자주하는 말이 남편을 가장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번 주 한 주 내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한 마디의 말도 허투루 듣지 마시고, 다 내 것으로 받으시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한 마디 드립니다. 이 번 주에는 금식도 겸해서 기도에 열심을 내 보십시오. 저는 일단 말했습니다. 알아서 소화 하십시오.



세 번째는 법정에 모인 군중들의 태도입니다.

 

군중들의 대다수의 목적은 오직 총독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내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 주면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랴?라고 말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이리 악하냐, 꼭 이 청년을 죽여야 하겠느냐?라고 묻자, 군중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곧 민란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의 악함은 피를 보아야 끝납니다. 반드시 그 악을 행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목이 터져라 외쳐 대던 수많은 군중들 중에 나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범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이 고난 주간이어야 합니다.

 

악에 가득 차서 광기를 내뿜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고, 빌라도조차, “너희가 어찌 이리 악을 행하느냐라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지난 수요 예배 시간에, 우리 인생이 마치 미친 것처럼 쉬지 않고 악과 죄를 행한다는 전도서 9장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남의 눈을 속이고, 나 혼자만의 사생활을 꼭꼭 숨겨 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았을 때는, 우리의 일상들이 꼭 미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광기어린 빌라도 법정의 군중들의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법정에 끌려 나오신 참혹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도 모자랄 판인데, 언제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실 겁니까? 그만 멈추십시오. “예수를 어떻게 하랴?우리에게 물으신다면, “, 저도 주님처럼 맞고, 치욕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해 주십시오. 준비 되었습니다. 저를 끌어가십시오목이 터져라 이렇게 외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한주 단단히 준비 하시고, 부르짖고, 참회하는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빌라도와 같이 내 욕심만 챙기는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신앙을 회개하시고, 아내를 통해 말씀하셨던 성령의 강력한 권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멈출 것은 멈추고, 끊어 낼 것은 끊어 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던 발걸음을 오직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바꾸십시오. 이제 내 평생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말했던 나의 광기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 이름을 내 이름으로 치환 하여 고백하십시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이 크게 감동 하실 정도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고난 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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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빌라도와 같이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 하시는 성령님의 권면을 무시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죄와 악을 끊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살아가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불을 내려 주셔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진실하게 참회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심자가를 참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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