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하는 복음/조용기목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
 
 
 

신앙이란 이론적, 형식적, 이성적 3차원의 세계를 의지하여 말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그 어떤 이론을 개발해도 살아서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고로 신앙이 체험에 뿌리를 두고 가슴에 뿌리를 내려야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앙인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그 맛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이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와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론적인 설명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막힌 신앙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체험해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신앙은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보증자로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불빛 중에 임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가?’ ‘뉘십니이까?’ ‘내가 너를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의 환상을 직접 보고 거꾸러져서 기독교 역사상에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일심하여 새사람이 되려면 체험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1.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져라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면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까? 예수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또 우리 삶 속에 있는 정신적인 불안, 공포, 절망, 미움, 파탄, 답답한 마음입니다. 폐병, 심장병, 신장병, 암 등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우리 인생에 헐벗고 굶주리고 괴로운 삶을 사는 고통스러운 삶 등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을 멸망시킬 죄가 횡행하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건지러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부정적인 것하고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대적해서 싸워야 우리를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알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깨닫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같이 걸머지면 예수 살린 것이 내 몸에 역사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못되는 것을 예수님이 짊어지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끌어안으면 영혼이 잘못되게 하는 것을 끓어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일체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다 짊어짐은 예수와 똑같이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예수 동참하게 된 그 속에서 똑같이 예수 부활하는데 같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와 싸워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골리앗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4절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자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 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장37절)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해 올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기절초풍을 했는데도 다윗은 “무슨 소리 하는거냐? 곰과 사자도 내가 잡았는데 그 곰 같은 다윗, 사자 같은 다윗을 무얼 두려워하겠어?”라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야훼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개 힘이 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로마제국이 거꾸러졌습니다.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의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장20절)라고 전합니다. 사도들이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보고 들었기 때문에, 즉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하더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믿었다가 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 흔적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 믿는데 대해서 조롱을 하더라도 그 조롱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 모자이크교회를 담임하는 어윈 맥매너스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관한 책을 썼는데 제목이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 주듯이 초대교회는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물고기 잡는 사람, 세금 징수원 등 사회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거의 전부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체험했느냐? 예수님 세상 뜨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 할 때 오순절 날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모두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서 온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뿐 아니라 성령이 오신 증거로써 자기가 배우지 않은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하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상 생각 속에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말로 목욕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 입으로 그들은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일천만 성도들이 모두다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한국이 바짝 뒤집혀질 것입니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니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같이 하심을 전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한국사회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질 때 고난과 괴로움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잡혀가는 중에 이스라엘 청년들 중에 지혜롭고 총명하고 대단히 아름다운 청년들도 잡혀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포로 중 지혜로운 자를 관리로 등용했는데, 그들 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높은 자리에 임명을 받아서 관리로 활동을 했습니다.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우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왕에게 고발을 합니다.
 ‘왕이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습니다.’
 왕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너희들이 이 신상에 절을 하면 살려주겠으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절재절명의 위기입니다. 말 한마디에 죽음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다니엘 3장16절~17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얼마나 담대한 신앙입니까?

 이스라엘 청년 중에 다니엘이라는 똑똑한 청년이 바벨론의 국무총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왕을 속여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그 어떤 신에게도 숭배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반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반포된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집니다. 밤이 새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왕이 아침일찍 사자굴로 달려가 ‘다니엘아 너 하나님이 너를 불러 살려주었더냐?’라고 부를 대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 신앙을 견제했을 뿐이지 왕의 나라에 아무 해도 끼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천사가 내려와서 밤새도록 저를 지켜서 저는 살아있습니다.’
이에 왕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고 그 참소한 다른 사람들을 사자굴에 대신 던질 때 그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도 사자들이 그들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2.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라 (타협하지 않는 신앙)

 구약성경에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고난을 당할 때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로 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압박과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으로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부패와 횡포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은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4절)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갖고서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불평이 나왔는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17절~18절)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서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음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정돈하고 하박국이 신앙한 것과 같은 절실한 신앙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3. 오중복음을 적용하라 (오중복음의 실천)

 우리는 예수님이 걸머진 우리의 짐을 보고 예수님을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장21절)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걸머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부정적인 세력은 예수님이 다 짊어졌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끌어안으면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짐을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은 전부 우리 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짐을 지셨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끝까지 잘 달려서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선교 사역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모든 상황이 내게는 불리하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투정했던 생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버려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그러다 결국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자기 스스로를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저는 자기가 자기를 보고 격려하는 말을 대단히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몸이 건강이 좋지 못하면 늘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용기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는 건강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았다. 두려워말라.’라며 날 보고서 하나님 말씀으로 격려를 하고나면 온 몸이 후끈해지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힘을 얻어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낙심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면 기도조차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장 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시련을 당해서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들어와서 응접실에 들어오니까 7살 먹은 딸아이가 “아빠, 이제 왔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손에 짐을 들고 있으니까 “아빠, 내가 짐을 들어줄게.” 7살 먹은 딸이지만 소아마비 병을 앓아서 걷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얘, 네가 소아마비가 걸려서 걷지를 못하는데 내 짐을 어떻게 네가 들고 간단 말이야?” “왜 못 들고가? 내가 짐을 들고 아빠는 나를 안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 딸이 그 말 한 것이 번갯불같이 자기 마음을 때리더랍니다. “네가 왜 걱정하고 있느냐? 네 딸이 짐을 들면 네가 안고 올라가면 되는 것처럼 네 짐을 네 손에 들면 내가 너를 안고 갈 것이 아니냐? 뭐 두려워할 것이 있느냐?”그래서 그 번개 같은 암시를 받고 믿음을 회복해서 굉장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 글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증명 및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이론과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120 성도는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짊어졌습니다. 하나도 없이 다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고, 영원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끊임없이 마귀하고 싸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서 빼앗긴 세상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럴 동안에는 33년 동안 예수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세상 우주를 돈 주고 산다고 비유한다면 아직 사기를 다 해도 소유등기를 넘기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주가 주님이 가져갈 것인데 아직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소유등기를 다 예수님께로 넘겨갔습니다. 피를 흘려서 대가를 지불하고 마귀는 영원히 쫓겨나가고 하늘과 땅과 세계의 그 안에 모든 것은 예수님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구하면 예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여러분을 직접 도적직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거짓이나 하고 협박이나 하고 다니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보혈로 이 우주를 마귀가 아담을 통해서 점령한 것을 도로 다 빼앗았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과 같이 계시면 여러분을 해할 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과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인류에게 지어져있던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을 청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세상과 짝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붙잡고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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