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우리 순복음 신앙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을 말씀합니다. 처음에 ‘순복음’이라고 그러니까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러면 당신들만 순복음이고 우리는 가짜 복음이냐?”라며 비판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그대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주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이 바로 순복음 신앙이고, 이 순복음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엉망이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여,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되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주옵소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나타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3등분해서 세 열매씩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세 번째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모습인데,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과 희락, 화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1. 사랑(Love)
먼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어야 될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을 잘 대해주고 사랑하는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잘해주다가도 피해를 입히고,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됩니다. 친구가 변하여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있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에 머물러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밤이 지나기 전에 본인을 배반하고 다 도망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설명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람들은 좀 사랑하다가 싫증이 나면 돌아서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면 다투고 멀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못 보면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 났어도, 때때로 주님을 섭섭하게 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 위대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에 대하여 감사, 감격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다음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남을 사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은 설명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또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나누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조금 다투어도 그것 금방 잊어버리고,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 도와줍니다. 왜?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는 잠시 잠깐 섭섭한 것 있고 오해가 있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금방 풀어집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은 주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기준이 내 몸처럼 사랑하라, 내가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장애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섬기며 살아가는 귀한 분이 계십니다. 김경식 목사님입니다. 임마누엘집 원장 목사님이신데, 3살 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아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신발을 신고 기어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보면서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들도 “차라리 죽어버려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니까 그렇게 동생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예수를 믿던 유일한 그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이 아들을 품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란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될 거야. 장애는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뿐이지, 네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넌 축복받은 사람이야, 멸시와 천대를 받을 지라도 조금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여러분, 장애를 있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저들을 멸시하고 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한쪽 다리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어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기술을 배워 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려줘서 받으러 갔다가 그만 도박하는 자리에서 도박에 빠지게 되었어요. 전 재산 다 날리고 교도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는 그는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그런 신세가 되니까 저 같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걸인들, 장애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저들을 모시고 살겠다’고요. 그래서 1983년에 도봉산 안골부락 천막집에서 장애인 10여 명과 임마누엘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껌팔이 행상으로 간신히 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도봉산 산자락에 오갈 데 없는 장애인 10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저들을 먹이기 위해서 길에서 볼펜, 양말, 껌을 팔고, 기독교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들을 섬깁니다. 별별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이것저것 팔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모금을 해서 저들을 보살피고,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섬긴다는 소식이 계속 퍼져나가자, KBS 방송에서 이것을 특별히 취재해서 보도하고 난 후에 전국에서 그를 불러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가서 강의도 하고 예배도 드려주고, 책도 써서 그가 인세를 많이 받게 되니까 그 돈을 다 모아서 송파에 땅을 삽니다. 1990년에 이곳에 땅을 사고, 임마누엘집을 짓습니다. 1993년, 자신도 소아마비 장애인이면서도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최연소로 국민훈장 동백상도 받게 되었고요, 현재 임마누엘집은 2개의 법인과 산하 11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약 1000명의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집의 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말씀대로 주변의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는 귀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역하면서 가장 기쁜 일은 중증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용기를 얻고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두 목발로 걸을 수 있도록 건강한 두 팔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제가 받은 은혜, 그 체험을 장애인은 물론 지역사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애인 대교구가 있어서 많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더 사랑으로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몸이 건강하고 멀쩡하면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아니하고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하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고개를 이웃으로 돌려서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이 절망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러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여서 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2. 희락(Joy)
그 다음에 성령 충만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희락,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기쁨은 긍정적인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쁨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힘들어도, 어려워도, 오해를 받고 속상해도, 상처를 입어도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네 권의 편지, 책을 썼는데 이 편지가 책이 되는데, 그것이 우리 성경에 신약성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이 네 편의 서신이 책이 되어서 성경에 들어가 있는데, 빌립보 교회에 보낸 빌립보서 끝에 가서 4장 4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옥중에 있는 그가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밖에 있는 사람이 옥에 갇힌 그에게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위로함을 받고 기뻐하세요.”라고 해야 되는데 뭔가 바뀐 것 같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여,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당해도, 문제를 만나도,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해서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성에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장 8절).
주여,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을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기뻐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핍박을 하고, 믿지 않는 동료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미국 뉴욕 브룩클린 테브너클교회 짐 심발라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기루이지만, 기쁨은 다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의하면, 기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행복의 덧없음을 아시고 성령을 통해 상황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말한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의 특징이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을 함께 고백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여,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주의 사랑이 넘쳐나고 이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치 샘이 펑펑 솟아오르듯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하여주옵소서.
3. 화평(Peace)
그 다음 세 번째가 화평, 평화입니다. 히브리말로 ‘샬롬’이라고 말하는데,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이 영어로는 ‘peace’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평안, 평화, 평강, 화평’, 이 네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하나님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그 누구가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샬롬, 이 평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 잡은 평안함입니다. 환란의 풍파가 몰아닥치고, 문제가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 요동하지 않는 평안함입니다. 깊은 바다는 동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해변가가 촐랑 거리지, 깊은 바다는 늘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깊은 바다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바다의 신앙으로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두려워 떨며 숨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날,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여, 이 평강이 우리 마음 가운데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짜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극한 절망에서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그것을 이겨내는 평안함입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호레이시오 스패포드씨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요, 운영 위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무디 부흥사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교회가 다 불타게 되고 그의 큰 저택도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봅니다. 오히려 자기 집이 불탄 것보다 교회가 불탄 것을 걱정해서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안나 스패포드 여사는 몸이 약해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네 딸과 함께 영국에 잠깐 가서 좀 쉬고 오도록 했습니다. 원래 같이 가려고 했는데, 본인은 일 처리할 것이 많아서 먼저 떠나보내고 다음에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1873년 11월 15일 새벽 2시, 영국 범선과 충돌해서 가라앉습니다. 이 사고로 22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원에 의해서 구조되었지만 네 딸은 이미 모두 목숨을 잃고 다시는 그 딸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 도착한 부인이 남편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혼자 살아남았음’ 전보를 받고 너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보를 듣고 달려온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내게 어떤 희생이 닥쳐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데리러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데, 선장이 어느 지점을 지날 때 와서 말합니다. ‘이곳이 배가 충돌해서 가라앉은 곳입니다.’ 그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선실로 돌아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밤새 눈물로 기도할 때, 새벽 동이 터오는데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지금 이 여인은 자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안하냐고 물었을 때 “평안합니다.”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찬송가 가사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파도가 치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2절을 지었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주님 앞에 죄짓고 부끄러운 모습이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
하늘을 바라보니 뭉게구름이 피어있는데 천국 가있는 딸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4절은 그가 이렇게 작사했습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그 이후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에 건너가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돌보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어떤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주시는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고,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성령 충만함 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시고, 늘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주시고, 주님 주신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