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적


진실과 화해를 통한 참된 용서

 1996년 9월 1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쇼에서는 특별청문회가 열렸습니다. 4년 전 이곳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행진을 벌인 흑인들을 향해 군인들이 총을 쏴 50여 명이 사망한 대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청문회였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들이 수백 년간 흑인들을 지배하며 차별한 나라였습니다. 식당 버스 화장실은 물론이고 공원 벤치와 구급차, 심지어 교회도 백인용과 흑인용이 따로 있었습니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들을 백인 경찰과 군인이 마구잡이로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1994년 마침내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백인에게 복수하길 원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위원회는 인종차별의 진상을 규명하고 청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위원장은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주교였습니다. 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는 누구나 와서 지켜볼 수 있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생중계했습니다.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흑인들의 분노는 커져갔습니다. 이날은 비쇼 대학살 사건의 책임자였던 군인들이 증인으로 불려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흑인들은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이런 청문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우리가 직접 저 군인들을 처벌하겠다.’

 마지막으로 소베스버거 대령이 나왔습니다. 그는 군인다운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차분히 진실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총을 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고 담담하게 인정했습니다. 방청객들은 곧 분노를 쏟아낼 기세였습니다. 그때 소베스버거 대령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함께 청문회에 나온 동료 장교들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평생 동안 비쇼 학살 사건의 책임을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감히 잊어달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저희를 용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청석이 일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제 동료들의 무거운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다시 받아들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베스버거 대령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청문회장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점점 커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분노한 표정이었던 방청객들의 얼굴에 감동과 경의가 가득했습니다. 투투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집시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모두 아실 겁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용서하는 일은 더더욱 힘듭니다.”

 투투 위원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약 내가 백인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백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거나 눈을 감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서글픈 처지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며 함께 웁시다. 우리는 용서가 아니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값싼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같은 처지였으리라!”

 투투 주교는 진실을 찾아내고 용서하고 용서하자고 호소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차별 받아온 흑인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인들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히 고백하길 두려워했습니다. 투투 주교는 그럴 때마다 흑인과 백인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청문회 자체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섬뜩하고 소름이 끼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도 여전히 회개하고 달라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곳으로 따라 갑시다. 용서와 화해는 쉽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을 함께 실천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김지방(국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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