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1. 한일합방과 한국교회의 수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이후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군사권을 차례로 빼앗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거쳐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조선을 강제로 합병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당시,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 270여 명, 조선인 교역자 2300여 명, 신도 20만 명의 인원과 전국에 1900여 개의 예배당과 300개 이상의 학교를 보유한 유일하고도 강력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다수의 인사가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나란히 전개하고 있었다.
합병 초기 일제는 기독교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자 서서히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상실되어 가고 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4월에 안창호 전덕기 등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항일 비밀조직이었다. 기독교 세력이 신민회의 배후라고 확신한 일제는 항일 민족운동과 기독교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합방 직후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1911년 12월에 기독교인들이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여 100여 명의 기독교 인사를 잡아들이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한 악랄한 음모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가 겪어야 할 길고도 긴 핍박과 수난의 출발선이었다.
2. 3·1운동과 기독교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하며 우리 민족을 경제적·문화적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를 통해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 경제를 철저히 수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가 강해질수록 이에 저항하는 한국 민족의 저항의식 또한 커져만 갔다. 이렇게 누적되었던 우리 민족의 반일의식과 항일 에너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호응하여 각계각층의 사람이 참여하여 거의 1년간 지속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 것이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시작과 전개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단계에서는 교회가 조직과 인원을 제공했다. 당시 2000만 겨레 중 10%인 200만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전체 참가자의 22%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가량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써 유교 불교 천도교인의 총수 1556명보다 많았다. 또한, 미국교회협의회 동양위원회가 1919년 출판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631명이 살해되고 2만 8934명이 체포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라는 시선을 불식시키며 ‘민족의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3. 사회적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교회
3·1운동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강압적인 무단정치에서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내세워 이전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세력을 말살하려는 집요한 분열 및 이간책을 사용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다소 헐거워진 틈을 타서 국내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3·1운동 실패 후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구원에는 미진한 기독교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회·청년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공산주의자들은 1925년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반기독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거센 도전과 교회에까지 침투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기에 내적인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이 전개되어 우리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 지도력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정한 개인보다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진행된 집단적 신앙체험이 주류를 이룬 이전의 부흥운동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와 같은 특출난 개인이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신유와 기적을 동반한 부흥운동’(김익두)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용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길선주)을 한국교회 안에 정착시킨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주의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힘없는 다수 민중계층 교인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수난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를 위하여 식민지였던 한국을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과 동원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일제가 시행한 것이 ‘황민화정책’이었다. 황민화정책은 ‘천황 신앙’을 강제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고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추진된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하였고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그리고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론’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어 개별교회와 각 교단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학교 폐지와 선교부 철수 및 신사참배 거부 등의 강력한 수단으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사참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한국교회 파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성결교는 1941년 12월에 침례교회는 1944년 5월에 해산되었고 장로교는 1943년 5월에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1945년 7월 19일에 한국의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국제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