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 살펴볼 종교개혁이란 16세기경 부패한 로마교황과 교황청에 대항하여 일어난 개혁운동을 말한다. 대체 당시 로마가톨릭의 부패는 어떠했길래 유럽 전역에서 개혁운동을 불러일으켰을까? 먼저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1. 종교개혁운동의 배경
수백 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당시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일방적이었던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교황의 아비뇽유수). 교황무오설(교황은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성서 해석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는 주장)을 통해 쌓아온 절대적 교권은 르네상스를 통해 일어난 지식층의 도전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들의 타락이었다. 서품을 위해 큰돈이 오고 갔으며, 이를 회수하기 위해 비성경적인 면벌부(죄로 인한 형벌의 감면 또는 사면을 보증하는 증서) 판매에 앞장섰다. 독신이어야 할 사제들은 축첩을 일삼았으며, 사제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로 고아원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2. 종교개혁 시대 설정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1517년으로 알려졌다. 사실, 교황에게 대항하는 개혁의 요구는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14세기 존 위클리프, 15세기 얀 후스). 그럼에도 1517년을 손꼽는 이유는 마르틴 루터 때문이다.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의 양상은 점차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사이의 무력 충돌로 치달았고 ‘30년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 내 개신교도를 살육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측(오늘날의 체코, 헝가리, 독일, 덴마크,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의 저항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전쟁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었고 각국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종교개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3.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유럽 내 여러 국가의 개혁운동을 일일이 다루지 않고,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인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비텐베르크
루터의 교구는 브란덴부르크의 대주교 관할하에 있었다. 루터의 교구를 넘겨받고자 했던 마인츠의 주교 알브레히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고, 교황은 그에게 베드로교회 신축을 위해 1506년 발행한 면벌부를 팔도록 했다. 알브레히트의 판매 대리인은 도미니크수도회의 요한 텟첼이었다. 그는 “돈이 금고에 떨어지자마자, 연옥에 있는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른다”라고 설교하며 잘못된 믿음을 부추겼다.
비텐베르크의 고해신부였던 루터는 설교를 통해 이를 강하게 질타하면서,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게시,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 루터의 반박문은 마침 만성절을 맞이하여 비텐베르크교회에 전시된 엄청난 성(聖)유물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수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근래에 발명된 인쇄술 덕에 대량 인쇄된 전단지는 이들을 통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와 더불어 루터의 종교개혁 논문들(『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교회의 바벨론 포로 서곡』,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름스 칙령
칼 5세가 황제가 되자 로마교황청은 “주여 분기하소서”라는 글을 통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 역시 1520년 12월 10일 로마교황청의 파문서와 여러 가지 잘못된 로마교황청의 지침서들을 모아 불에 태우면서 로마교황청의 모든 잘못된 제도를 따르길 거부했다.
제국법에 따라 교회 파문에 이어 곧장 추방돼야 했기에 제국의회가 소집됐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루터는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제국회의에 나타났다. 심문 과정에서 황제는 루터에게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할지 물었다.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루터는 이튿날 자신의 주장에 대한 취소를 거부하며 말했다. “폐하!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심에 붙들려있습니다. 저는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잘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는 여기에 서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황제는 루터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보름스 칙령(5.26)을 반포하기로 했다. 그사이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루터는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러나 이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프리드리히 영주의 계획이었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인도된 루터는 이후 융커 요르크라는 가명을 쓰며 약 1년 동안 숨어지냈다. 이때 독일어 신약성경이 완성됐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보름스 제국회의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황제는 루터의 사건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터는 열광주의자들의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으며, 글을 통해 계속 종교개혁 운동을 펼쳐나갔다. 어려움도 있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이 결렬됐고, 결혼(1525)으로 인해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예상과 달리 보름스 칙령이 재추진되기도 했다(1526 슈파이어 제국회의. 이때 거세게 ‘항의’하는 종교개혁 측 제국의원들은 ‘프로테스탄트’, 즉 ‘항의자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개혁운동은 확산되어갔으며, 결국 개신교 진영은 1532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체결, 통일된 연합체가 되었다.
독일 밖에서 루터의 영향
독일의 종교개혁은 주변으로 확장되어갔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가 여기에 포함된다.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핀란드, 헝가리와 발트해 연안 리보니아 지역의 비독일어권에서도 예배 개혁과 성경 번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루터의 사상은 취리히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뱅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국 청교도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다음 시간부터는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교회와 그 이후 시대를 다루게 된다. 17세기 말부터 등장한 경건주의운동과 18세기 부흥운동, 19세기 해외선교, 20세기 오순절운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제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