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3) - 역사신학 ④ - 현대교회사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는 17세기 중반에서 현재까지 포괄하는 근·현대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대표되는 사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17세기 중반 - 근·현대교회사의 시작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반대해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세의 연장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공로 사상이나 연옥 같은 중세 기독교의 여러 종교적 신념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운동을 통해 형성되던 인본주의적인 관념이나 가치들도 함께 배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시대 역시 교회의 권력이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삶과 생각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강력한 지배는 17세기 초 일어난 30년전쟁(1618∼1648)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기독교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기독교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7세기 중반을 근·현대교회사의 시작으로 본다.

 
2. 17세기 후반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태동

 30년 전쟁 이후, 유럽 국가와 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신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성의 힘에 의한 사회의 개혁을 믿었다.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과 함께 개신교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과 교리를 논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개신교 정통주의 혹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직접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에 맡겨놓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계시와 기적을 부정하는 자연신론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계몽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건주의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운동은 신앙의 본질을 이성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서 찾았다.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6)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운동은 스페너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가 함께 세운 할레대학에서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1) 그리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3. 18세기 -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영국의 기독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1714∼1770)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엄격한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에 ‘감리교도’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다. 감리교운동은 영국의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의 상류층에서 노동계층까지 전 계층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웨슬리의 사회참여 주장은 영국 전 사회에 각성을 가져왔다. 후에 복음주의운동은 영국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71∼1901)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 감리교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즈음에, 북미에서도 영국 식민지들을 중심으로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 불리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을 이끈 영적 지도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조지 휫필드였다. 초창기의 청교도적인 신앙과 경건성이 사라지고, 종교적 열정이 무시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들은 죄의 회개와 개인적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던 미국 교회에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약 반세기 후에 일어날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적 토대가 되었다.  


 4. 19세기 - 위대한 선교의 세기

 19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린다. 현대 개신교 선교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1761∼1834)가 1793년 인도의 콜카타를 향해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이후 런던선교회(1795년), 미국 국제선교 본부(1810년), 바젤선교회(1815년), 영국 성공회선교국(1799년) 등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각국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기독교 해외선교는 드와이트 무디(1837∼1899)와 아서 피어선(1837∼1911) 같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도 모두 무디와 피어선이 조직한 ‘학생선교자원운동’을 통해 선교의 비전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5. 20세기 이후 - 교회일치운동과 오순절운동

 교파와 교단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교회일치운동은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교 현장에서 여러 교단의 과다한 경쟁과 분쟁을 피하고, 좀 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지역선교대회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세계 선교의 실제적 방향과 전략을 점검하기 위한 국제규모의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세계적 차원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1901년 1월 1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 미국 캔자스 주 타피카에서 찰스 팔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작은 지역 부흥운동에 불과하던 오순절운동은 1906∼19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부흥회를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확산 이외에도 오순절운동은 1960년대부터 성공회, 가톨릭교회, 장로교, 루터교 등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들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를 좀 더 성령 충만한 종교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순절운동은 비서구 지역에서의 놀라운 성장에 힘입어 서구 중심의 기독교를 비서구 중심의 종교로 변화시키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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