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쓴 교회사 산책 - ⑤ 초기 그리스도교의 내적 위기(1)

교회사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역사라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교회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고대(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근대교회사. 여기에 종교개혁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하여 종교개혁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2018년 10월 14일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참조). 각 시대마다 유구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로 충만하다. 교회사 산책을 통해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향해 출발해보자. <편집자 주>


“지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몬타누스 운동”

지중해 세계 도처에 세워진 초대교회들은 하나의 통일성을 갖춘 가톨릭(보편적) 교회가 아니었다. 당시 초대교회는 다양한 그룹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단의 등장은 초대교회의 큰 내적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이단 역시 다양한 초기 신앙공동체 가운데 섞여 있었고 이들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처방안이 마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당시 중요한 이단들 가운데 몬타누스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초대교회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 나아갔는지 알아보자.

1.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는 재림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을 약속하셨다(요 14:3).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었다(행 1:11).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면서 초대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난감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재림하기 전에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살전 4:15∼18), ‘재림은 언제 이루어지는가?’(살전 5:1) 등과 같은 것이었다.

2. 재림 시기의 계산

재림의 시기에 대해 초대교회는 시와 때를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도둑처럼 언제 임할지 모른다고 강조했다(마 24:43; 눅 12:39).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날과 시간을 계산하려 했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에 근거, 종말 직전 천 년 동안 있을 평화의 왕국(계 20:2∼3)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했다(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 터툴리아누스).
 어떤 이들은 창조된 세상의 역사를 6000년으로 계산하면서(창 1∼2장, 시 90:4 - 바르나바의 편지)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어디 즈음 위치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재림의 시기를 설명하려고 했다(5500년-히폴리투스). 이러한 시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장래 반드시 일어날 사건임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3. 몬타누스 운동의 등장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주후 156년경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프리기아 지방에서 ‘새로운 예언’ 운동이 일어났다. 키벨레(Kybele) 여신을 섬기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몬타누스라는 남자가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라는 두 여인과 함께 황홀경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소위 ‘새로운 예언’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령께서 우리를 칠현금처럼 연주하시므로 우리는 노래한다. 우리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우리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영은 그 보혜사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의 뜻을 알려야 한다. 이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 페푸자에 새 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며 천년왕국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이들이 그곳으로 모여야 한다.” 그들은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기 때문에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강요했다. 먼저 사도 바울을 끌어들이며 결혼을 가급적 포기하라고 권면했고 재혼은 아예 금지했다. 특별한 장소에서 행하는 단식을 강조했으며, 침례 이후에 범하는 죽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순교를 장려했다. 순교의 상황에서 도망하는 것은 배교행위였다. 몬타누스 운동은 다른 소아시아 지역과 갈리아 지역, 더 나아가 로마와 북아프리카에까지 급속히 확산되었고 주후 3세기까지 꽤 많은 추종세력을 얻었다. 이들은 몬타누스를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예언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 육체로 나타난 보혜사라고 믿었다.

4. 제도적 교회와 몬타누스 운동

자유로운 영의 활동과 카리스마적 권위를 강조하던 몬타누스 운동은 당시 제도화(직제 및 직임)된 교회 안에서 식어버린 초대교회의 뜨거운 영성 회복과 관련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터툴리아누스는 스스로를 열렬한 몬타누스주의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몬타누스 운동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를 고취시킨다는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기존의 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제도화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선포했던 예언자들에 대해 무조건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헤르마스의 ‘목자’는 5개의 환상이 포함된 교회적인 예언서로서 당시 매우 많은 성도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그러나 몬타누스 운동이 갖는 예언의 형태들, 즉 황홀경을 추구하며 극단적인 윤리를 강요하는 점 그리고 기존의 신약성서(정경)와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신탁을 동등하게 만들려는 시도 등은 조직과 제도를 세워 나아가던 초대교회가 받아들이기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5. 초대교회의 대응

몬타누스주의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해 주교들은 160년경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운동과 관련된 자들이 파문됐고 교회의 친교에서도 축출됐다. 곧이어 갈리아 지방과 소아시아 지역 그리고 로마의 교회들까지 파문에 동참했다. 더욱이 몬타누스파가 주장했던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고 당시 뛰어난 저술가들(밀티아데스, 아폴로니우스)이 몬타누스 운동을 비판하면서 이 운동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점차 많은 교회가 극단적-카리스마적 영적 권위보다 순수한 영적 권위를 추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은사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객관적인 직임 제도를 공고히 만들어 나아갔다. 보편적 교회가 인정할 수 있는 정통적인 교리를 세워갔으며, 교회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과 규율 등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이단들로 비롯된 교회의 내적 위기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으면서도 믿음 안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체질로 개선되어 나아갔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 Recent posts